다운로드받기=>마우스우측클릭하세요

 

요한계시록 16:12-16 복 있는 사람 2009. 12. 13

 

12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16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16절에 아마겟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겟돈에 대하여 교회 다니는 사람만이 아니라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도 아마겟돈에 대하여 많이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인류 최후의 전쟁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제목으로 영화도 나왔습니다. 지구에 유성이 충돌하면 멸망하는데 그 유성을 폭파하러 가는 내용입니다. 또 이현세씨의 만화에도 아마겟돈이 나옵니다. 다윗 계통의 혈통이 왕으로 나오며 비밀리에 활동을 하는데 전 세계와 연결이 되어 있는 정말 만화입니다. 이뿐 아니라 아이들이 하는 게임에도 아마겟돈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전쟁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제 3차 세계대전과 같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문자적으로 요한계시록을 현재의 상황들과 대입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온갖 세상적인 해석이 다 나옵니다. 그런 해석중의 하나가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나오는 것을 군인들의 군복이 얼룩덜룩한 위장복이 더러운 개구리의 영으로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겟돈이란 최후의 영적인 전쟁입니다.

 

영적인 전쟁이라고 하니 지상과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이 땅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마겟돈이란 므깃도와 하르라는 합성어로 봅니다. 므깃도의 산 또는 므깃도의 도시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런데 이 므깃도라는 곳이 많은 전쟁이 일어난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아마겟돈이라는 말은 전쟁이 일어나는 장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특정지역만 심판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적인 심판이 집행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대접이 쏟아지자 유프라테스 강이 마르고 동방에서 왕들의 길이 예비 된다는 것은 구약시대 때에도 유프라테스 강에서 온 적이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이 와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전쟁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당시에는 유프라테스 강이 로마의 국경선을 이루고 있는데 다른 민족이 이강을 넘어서 로마를 공격해 오기도 하였기에 강이 말라버린 다는 것은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고합니다. 그런데 이런 전쟁이 영적인 전쟁이라는 것은 13절을 보면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나옵니다. 이것은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사탄과 국가와 종교의 권력임을 이미 보았습니다.

 

이 더러운 세 영이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이들은 귀신의 영입니다. 이들이 이적을 행합니다. 귀신의 영이 이적을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적을 원하는데 그런 이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이적 중에 참 좋아하는 이적이 무엇입니까?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병 고침도 받고, 부자도 되고,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들입니다. 이런 이적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이적을 보여주면서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14절입니다. 온 천하 임금들을 모아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모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을 요엘서 2:1-32절까지 함께 봅니다. “봉독” 여호와의 큰 날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의 날로 기다렸지만 오히려 심판의 날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여호와의 큰 날이 오기 전에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돌아오면 영영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26-27). 그리고 31-32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기 전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여호와의 큰 날이 이를 때에 무엇이 가장 큰 복이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성이 불에 탈 때 무엇이 가장 큰 복입니까? 성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큰 진노의 심판을 당할 때에 무엇이 가장 큰 복입니까? 전에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큰 화산폭발로 도시가 잿더미가 된 곳을 발굴하다가 화산재가 덮쳐진 끝 지점 바로 앞에서 죽은 자가 발굴이 된 것입니다. 몇 미터만 더 달렸으면 살았을 텐데 그것을 피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사람의 가슴에 금덩어리를 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사는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큰 날을 기다리면서 회개하고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벌거벗고 다닌다는 것은 세상의 것으로 치장하고 다니는 것이 벌거벗고 다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22절을 봅니다. “봉독” 세상 것으로 치장하고 다닌다고 하니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어떻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미지근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니 어떻습니까?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날이 임하는 것은 언제나 교회부터 먼저임하는 것입니다.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시작되기에 세상은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교회가 세상이 되어버렸기에 교회나 세상이나 차별이 없이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큰 날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의 날로 기다렸지만 오히려 심판의 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의의 옷을 입고서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15절을 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도적같이 오십니다. 도적같이 오신다는 것은 알아채지 못하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24:42-44절입니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도 노아의 홍수 때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비하고 있으라고 합니다. 생각지 않은 때에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의 영이 이 세상을 어떻게 속입니까?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개구리처럼 더러운 세 영이 온 세상을 속이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선악과로 속이듯이 오늘 이 시대에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이 채워지고 안목의 정욕이 채워지고 이생의 자랑이 많아지는 것을 성공이라고 하고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세상이 아닌 교회에서 복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하는 자도 그 말을 좋게 듣는 자도 다 더러운 귀신의 영에 속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런 대접이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신약은 시간적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종말이 온 상태이기에 시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묵시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은 묵시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시란 인간의 시간관념과 역사 관념을 공격하면서 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행하는 일이란 자기의 이름을 높이는 일입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듯이 바벨탑을 쌓으면서 자 우리 이름을 내자고 하는 것이 다 자기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하는 행위들입니다.

 

다시 15절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도적같이 오실 때에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큰 날에 온 세상이 심판을 받는 그 날에 누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입혀주신 의의 세마포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는 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에다가 어떤 인간의 공적으로 덧칠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정 반대로 말합니다. 인간의 수많은 공적을 가지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열심히 바쁘게 부지런히 살아가고 있습니까?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부끄럽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부조할 때도 상대가 5만원 하면 나는 10만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동창회를 가더라도 꿀리지 않는 차를 타고 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더 바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일만 바쁘게 살면 되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일 까지 바쁘게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부끄럽지 않아야 되고 교회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더러운 귀신의 영이 임한 모습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고 더럽고 죄스러운 인간인지를 알고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의 거저 주시는 용서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의 영에 사로잡혀 있으면 교회에 와서도 자기 부끄러움을 가리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교회 와서도 자기의 약함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자기는 자랑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서는 약한 것들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심판을 당할 때에 복이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옷은 누더기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자신의 선한행실로 치장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면 그것은 악취일 뿐입니다.

 

16절을 봅니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는 곳으로 왕들을 모읍니다. 무엇을 하기 위하여 모이게 합니까?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모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세상의 왕들이 연합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들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의 현 체제를 영원히 고착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살겠다는 것이 이 세상의 죄악 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왕들을 모아서 끊임없이 발전하여 우주도 개척하고 사람도 복제하여 자신들이 신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 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까요?

 

시편2편을 봅니다. “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세상의 왕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 이런 것입니다.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서 끊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비웃으시고 시온에 왕을 따로 세우십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 왕은 세상의 왕과 다릅니다. 아무른 볼품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마른 땅에 나온 줄기 같아서 누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그를 알아보고 믿게 됩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만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정녕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