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출애굽기 27:9-19 성막의 뜰 2011. 2. 20

 

9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쪽을 향하여 뜰 남쪽에 너비가 백 규빗의 세마포 휘장을 쳐서 그 한 쪽을 당하게 할지니 10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11 그 북쪽에도 너비가 백 규빗의 포장을 치되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기둥의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12 뜰의 옆 곧 서쪽에 너비 쉰 규빗의 포장을 치되 그 기둥이 열이요 받침이 열이며 13 동쪽을 향하여 뜰 동쪽의 너비도 쉰 규빗이 될지며 14 문 이쪽을 위하여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요 15 문 저쪽을 위하여도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 16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짠 스무 규빗의 휘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 17 뜰 주위 모든 기둥의 가름대와 갈고리는 은이요 그 받침은 놋이며 18 뜰의 길이는 백 규빗이요 너비는 쉰 규빗이요 세마포 휘장의 높이는 다섯 규빗이요 그 받침은 놋이며 19 성막에서 쓰는 모든 기구와 그 말뚝과 뜰의 포장 말뚝을 다 놋으로 할지니라

 

지난주에 놋 제단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놋 제단은 번제 단으로 성막의 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막의 뜰이란 한 면이 약 50미터이고 다른 한 면이 약 25미터입니다. 이 안에서 성소가 15미터와 5미터이니 성막 뜰의 넓이가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체를 약 2.5미터의 높이로 휘장을 취게 합니다. 그 말뚝은 역시 놋으로 만들며 가름대와 갈고리는 은으로 만듭니다. 그러니 외부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뜰 안에 들어와야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게 됩니다.

 

이 뜰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부분은 놋 제단인데 이 놋 제단이 나중에 덧붙여지는 놋이 있습니다. 그 사건을 먼저 보고 성막 뜰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민수기 16:37-38절입니다. “37 너는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명령하여 붙는 불 가운데에서 향로를 가져다가 그 불을 다른 곳에 쏟으라 그 향로는 거룩함이니라 38 사람들은 범죄하여 그들의 생명을 스스로 해하였거니와 그들이 향로를 여호와 앞에 드렸으므로 그 향로가 거룩하게 되었나니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철판을 만들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리라 하신지라” 이 사건은 성막을 다 만들고 나서 광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36절까지의 내용을 봅니다. 레위자손인 고라와 단과 온이 당을 지어 모세와 아론에 대항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같은 레위지파인데 왜 너희만 제사장 노릇하느냐는 것입니다. 너희의 분수에 지나치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레위지파인데 모세의 형이라고 아론계열만 제사장이 되고 나머지 레위지파는 성막을 세우고 걷고 운반하고 힘 드는 일만 다한다는 불만이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분수에 지나치다고 합니다. 성막을 가까이 하여 일하게 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데 그렇게 말하느냐고 합니다.

 

이런 불만만이 아니라 더 큰 불만은 13-14절입니다. “13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14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 모세가 하고 싶어서 이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들이 당을 지어서 이렇게 대항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언약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겠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신과 원망입니다.

 

이에 대하여 모세가 화를 내면서 저들을 심판하여 달라고 합니다. 일반인의 죽음과 같지 않게 땅이 갈라져 죽임을 당함으로 여호와께로부터 온 심판임을 회중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향로를 준비하여 분향하게 하니 이들을 따른 지도자들이 250명이 됩니다. 각자가 향로를 가져 여호와 앞에 분향할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 이들을 살라 버리고 그의 가족들은 땅이 갈라져서 산채로 스올에 빠져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분향한 향로는 여호와께 바쳐진 것이기에 그 불은 쏟아버리고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도록 하였습니다.

 

놋 제단을 싸게 하신 이유를 39-40절에서 봅니다. “39 제사장 엘르아살이 불탄 자들이 드렸던 놋 향로를 가져다가 쳐서 제단을 싸서 40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물이 되게 하였으니 이는 아론 자손이 아닌 다른 사람은 여호와 앞에 분향하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함이며 또 고라와 그의 무리와 같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여호와께서 모세를 시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 놋 제단이 이미 심판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제단에 심판받은 자들의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게 하였으니 더욱 심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런 심판을 목격한 자들이 어떻게 하는지 41-50절을 봅니다. “봉독”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치려고 합니다. 이때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 나타납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나아가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들을 떠나라고 합니다. 이들을 순식간에 멸하시겠다고 하시자 모세와 아론이 엎드립니다. 엎드렸다는 것은 다시 중보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 중보가 일어납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제단의 불을 향로에 담아서 백성사이에 서라고 합니다. 이미 염병이 퍼져서 백성이 죽어가고 있는데 제단의 불을 담아 죽은 자와 산 자 앞에 서니 염병이 그쳤습니다. 이때 염병으로 죽은 자가 14700명입니다.

 

심판을 눈앞에 보고도 원망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이들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의 원망과 불평이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적습니까? 많습니까? 저는 훨씬 많다고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단순합니다. 광야에서 보이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물이 없다고 양식 없다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길이 험하다고 원망 불평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보다 천배는 더 많은 살림살이와 삶의 방향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보다 천배는 더 많은 불평과 원망이 쏟아집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염병이 닥쳐와서 다 진멸당해도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구제역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사람을 직접 공격하는 바이러스가 퍼질 가능성이 많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어 나가는 가운데 제단의 숯불을 담아서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니 전염병이 그쳤다는 것은 대신 심판을 받은 제단을 통하여 살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의 전염병을 피하였다고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심판을 알아야 합니다. 산자와 죽은 자 사이에 무엇이 세워져 있는지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합니다.

 

이제 성전의 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봅니다. 성소는 제사장이 상시로 드나들어야 하는 곳이지만 지성소는 일 년에 대 제사장이 한번 속죄의 피를 들고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성막의 뜰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시로 드나들 수가 있습니다.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 뜰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것은 늘 제단에 제물이 태워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들이 직접 제물을 가져와서 번제로 드립니다. 그 번제는 제일먼저 드려져야 하는 것이 속죄제 이며 그 다음이 화목제입니다. 놋 제단에 재물이 희생됨으로 속죄와 화목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막의 뜰 안에 들어와야 보게 됩니다.

 

이 성막의 뜰이 나중에 건물로 성전이 지어지고서는 성전의 마당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들이 생각나는 말씀들이 있을 것입니다. 성전 마당만 밟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사야 1:12절을 봅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 말씀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납니까? 교회의 마당만 밟고 가지 말라는 말씀이 생각이 날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들은 말씀이었습니다. 좀 더 열정적으로 헌신 충성 봉사를 해야지 마당만 밟고 가면 안 된다고 그렇게 교훈을 받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교회 일에 너무 깊이 빠지면 안 된다고 합니다. 교회의 중직자가 되면 교회의 여러 가지 좋지 않은 모습을 보고 시험에 들게 되니 너무 발을 깊이 들여놓지 말아야 된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분인데 장로가 되었습니다. 당회에 참석하여 보니 교회당 건축을 하는 과정에서 건축법을 위반하자는 결의를 당회에서 하는 것을 보고 장로직사임을 하고 다른 교회 가서 집사라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보니 또 그 교회에서 알고서는 협동장로로 세우는 것도 보았습니다.

 

같은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목사의 입장이 다르고 교인의 입장이 다릅니다. 다들 자기들이 보고 싶은 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전 마당만 밟고 간다는 이 뜻이 무엇입니까? 목사가 헌신과 충성을 강조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열심히 헌신 충성하는 것이 보이지 않아서 교회를 옮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성전 마당만 밟고 간다는 즉 성막 뜰만 밟고 간다는 그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사야 1:11절을 봅니다. “봉독” 무수한 제물을 가지고 옵니다. 숫양의 살진 번제와 짐승의 기름에 배가 불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기를 드셔서 배가 불렀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수많은 제물들로 번제물로 흘려진 피에 질렸다는 것입니다. 또 절기는 얼마나 잘 지키는지 13절을 봅니다. 분향하고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입니다. 요즈음 말로하면 모이기 잘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합니다. 이런 사람을 보고 성전 마당만 밟는다고 하는 목사가 있겠습니까? 모이지도 않고, 헌금도 하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 자들에게 성전 마당만 밟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잘 모이고 제물을 잘 바치는 자들을 향하여 왜 성전의 마당만 밟는다고 하십니까? 15-17절을 봅니다.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합니다. 그 피란 선행과 정의를 행하지 않습니다.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지 않고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을 학대하면서도 성전에서 열심을 내는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이것은 사회정의를 실현하라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너희가 애굽의 종살이 할 때에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받아 나왔다는 것은 잊었다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사랑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셨는데 지금 그들의 사상이 이방의 사상이 되었습니다. 신에서 제물 바치고 정성 바쳐서 복을 받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이 아니라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면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것이라고 미가 선지자가 선포합니다(미6:8). 도둑질 하고 살인하고 간음하면서도 제물을 바치는 이유는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렘7:9-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헛되이 제물을 드리지 못하도록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말4:10).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전을 목숨처럼 여겼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그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이 도발적인 말씀으로 인하여 고발을 당합니다. 십자가에 처형시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을 헐어버리고 3일 만에 짓겠다고 하신 대로 이제 성전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으로 인하여 그에게 붙은 자가 성전이 됩니다. 이렇게 성전이 된 자는 어떤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이사야 6:1-7절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합니다. 그 영광 앞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자신의 부정함을 보게 됩니다. 그때 천사가 제단의 핀 숯, 바로 놋 제단이요 번제 단에 제물을 태우기 위하여 피워진 그 숯불을 입술에 대면서 내 죄가 사하여 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란 자신이 문둥병자와 같이 부정한 자 임을 알고 그 제단의 숯불에 입술이 지져지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사야가 환상 중에 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바로 우리 부정함 때문에 심판 당하신 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분의 대신 심판 받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전 마당만 밝고 가지 않는 자가 누구입니까? 갈라디아서 3:1-14절입니다. “봉독” 1절을 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대신 저주 받으신 예수님이 눈앞에 밝히 보이시면 그것이 예배의 현장이 됩니다.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으로 유혹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행하자는 유혹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십자가의 공로를 제대로 아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