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출애굽기 28:30 우림과 둠밈 2011. 3. 13

 

30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하라 아론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

 

지난주에 가장 큰 뉴스가 일본 지진이었습니다. 이런 뉴스를 보시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성경대로 된다고 보았습니다. 성경에서 지진에 대하여 구약과 신약에서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한 곳의 말씀만 보고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6:12-17절입니다. “봉독” 여섯째 인을 떼시는데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해가 검어지고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사라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집니다. 이런 일들이 묵시문학적인 표현으로만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런 사건을 보면서 이 세상은 결코 영원히 안전한 곳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곳도 지하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면 돌과 쇠도 펄펄 끓는 마그마 층이 있습니다. 그 위에 커다란 판자 걸쳐놓고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이 거대한 판들이 서로 부딪히면 지진이 일어납니다. 이럴 때에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운지 일본의 지진에서 그 모습을 봅니다. 성경에서는 얼마나 두려운지 임금이나 왕족이나 장군이나 부자들이나 강한 자들이나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서 산과 바위가 자기에게 떨어지기를 원합니다.

 

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질 때에 사람들은 자기에게 덮쳐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전한 공터 같은 곳으로 나가서 대피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로 두려운지 산과 바위가 자기에게 떨어져서 가려지기를 원하는 그런 두려움이 도대체 어떤 두려움입니까? 16절에 보시면 보좌에 계신 이의 얼굴과 어린 양의 진노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노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진노하십니까? 그 이유는 바로 앞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이 땅에 의인들의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를 증거 한 이들을 죽인 자들이 예언된 메시아가 왔을 때에 그 메시아를 죽였습니다. 그 메시아를 증거 하는 자들을 또 죽이는 것이 이 땅의 역사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이 사실을 영원히 감추어두고 싶은 흑암의 세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보시면 태초에 말씀이 있으셨고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며 이 말씀으로 천지가 창조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빛이며 사람들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이 세상이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어느 누구도 이 빛 앞에 스스로 나아올 자가 없습니다. 빛 보다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함에도 빛으로 나아오는 자들이 있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됩니다.

 

지난 금요일에 다른 교회 권사님이 어느 자매를 데리고 왔습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알고 싶다고 해서 오셨는데 자매가 말하기를 주변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 중에 사기꾼도 있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빛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빛이 좀 많이 있고 어떤 사람은 좀 적게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권사님과 다른 일로 이야기하는 중에 역시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빛과 진리 종교에 대하여 바르게 알고 싶다고 하여 오셨는데 그때 한 이야기가 방금 말한 요한복음의 빛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살면 그것이 어두움에 갇혀 있습니다.

 

히브리서 11:3절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압니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은 나타난 것으로 즉 보이는 것으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이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심판하셔야 합니까? 그것은 모든 악과 어두움을 영원히 추방하시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빛의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한 조치입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십니까?

 

오늘 본문 30절을 봅니다. 우림과 둠밈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빛과 완전이라는 말입니다. 제사장의 흉패 안에 넣어두는 것입니다. 흉패는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제사장의 가슴에 붙이는 것으로 열두 보석에 열두 지파의 이름을 도장 새기듯이 새겨서 매달고 있는 그 흉패에 우림과 둠밈도 넣어둡니다. 우림과 둠밈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가 하면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에 사용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이 어두움과 불완전에 쌓여 있기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무슨 결정이 필요할 때에 빛과 완전의 뜻을 가진 우림과 둠밈으로 결정을 합니다.

 

에스라 2:61-63절입니다. “61 제사장 중에는 하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의 한 사람을 아내로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을 따른 자라 62 이 사람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하므로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63 방백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 중에 제사장인지 아닌지 그 족보가 모호할 때에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오기 전에 제사장만 먹는 지성물을 먹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또 나오지 않습니다.

 

이를 통하여 보면 우림과 둠밈의 판결 법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에 하나님의 뜻의 가부를 물은 것으로 봅니다. 다른 말로는 제비뽑기로 볼 수 있습니다. 제비뽑기는 대부분 가부를 물을 때에 사용하였기에 우림과 둠밈의 판결 법으로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결정에 다 우림과 둠밈을 사용한 제비뽑기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속옷을 가지기 위하여 로마의 병정들이 제비를 뽑았다는 것을 보면 가부의 결정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어두움과 불완전에 사로 잡혀있기에 그렇습니다. 어떤 분이 질문하기를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 예언기도를 받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의 답변은 한마디로 그런 것에 관심도 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점치러 가는 사람들이 점집에 가는 이유는 장래의 두려움으로 인하여 갑니다. 그런 예언기도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아직도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기에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그런 두려움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히브리서 2:14-15절입니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사람들이 점을 치려고 가거나 누구에게 기도를 받아서 장래 일을 알려고 하는 이유가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의 세력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 마귀를 멸하시기 위하여 혈육에 속한 자들의 모양으로 오셨고 우리와 동일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유혹을 물리치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승리의 혜택을 오늘날 믿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런 믿음의 선물을 받은 자는 장래 일에 대하여 두렵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기에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다닌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점을 치려고 가는 사람들처럼 예언기도를 받아서 장래를 대비하겠다는 것은 아직도 어두움과 완전함에 나아오지 못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우림과 둠밈이란 빛과 완전이지만 그것이 사용된 적이 거의 없고 선지자들이 밝히 말씀으로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싫어하였습니다. 물론 제비뽑기의 형식으로 몇 번이 나옵니다만 그 제비뽑기가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였는지 다른 방법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빛과 완전함이 드러난 새 언약의 시대에도 아직 제비뽑기 식으로 살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림과 둠밈에 사용된 히브리어 글자가 히브리어의 처음 글자인 알렙과 마지막 글자인 타우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학자는 우림과 둠밈이 헬라어의 알파와 오메가, 즉 처음과 나중(계1:8)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가 있다고 봅니다.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처음과 나중이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빛이시며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빛과 완전하신 계시를 이 말씀을 통하여 다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른 빛이나 완전을 찾아서 이상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후서 1:19-21절입니다.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하신 모습을 친히 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체험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성경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기에 샛별이 마음에 떠오르기 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다고 합니다. 샛별 즉 새벽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계22:16). 그러므로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히 드러나면 그것이 샛별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는지 우리 교단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교단 총회장을 뽑는데 얼마나 부정과 탈법을 사용하는지 엄청난 돈 선거를 합니다. 그래서 제비뽑기를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부 총회장을 뽑을 때에 다수의 후보를 내고서는 제비를 뽑아 결정하면 돈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비뽑기 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돈 선거가 멈추자 다른 사람들이 다시 직선제를 하자고 합니다. 제비뽑기를 하여 무능한 자가 총회장이 되면 교단이 힘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새 언약 시대에는 제비뽑기가 없다고 합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가룟 유다 대신에 제자를 뽑을 때에 제비뽑아 결정하였지만 성령이 임하고서는 한 번도 제비뽑지 않았습니다. 새 언약을 이야기하면서 또 능력 있는 자를 직선으로 뽑자고 하다면 그조차 어두움과 불완전이 가득함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무슨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합니까? 마음의 평안을 주시는 방향으로, 환경적으로,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여러분의 가부의 결정을 어디에 두느냐를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부의 결정은 대부분 자기의 이익과 자존심에 걸려있습니다. 이익을 포기하고 자존심을 포기하면 되는데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서 자꾸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고민도 하고 이리저리 묻기도 하지만 시원한 답이 없습니다. 우림과 둠밈 같은 기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구가 있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제비를 잘 못 뽑았다고 합니다. 동전을 던져서 결정을 하는 것도 트릭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믿지 못하겠다고 나옵니다. 구약에도 이런 방법보다 선지자들이 직접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빛 과 완전한 길을 인도하였지만 이미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그 인도를 받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은 아주 분명하고 확실한 예언이 기록된 말씀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빛을 보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것은 나의 욕심이 가로막혀 말씀이 보이지 않으니 어둡습니다.

 

예수님이 빛이요 완전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물으시려면 예수님을 보면 되고 예수님의 영이 임한 사도들의 증거를 보면 됩니다. 그 증거를 보면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분명하고 선명합니다. 조금도 어두움이 없고 불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그 말씀 중에 하나인 빌립보서 2:1-11절입니다. “봉독” 이번 주 구역예배 내용입니다. 미리 맛보기만 봅니다.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만 품으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그 내용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빛과 완전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는 이 말씀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임하여 빛과 완전함에 거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