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12~16 부르심의 상 2018. 5. 13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3)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지난주 결론으로 본 12절 말씀을 오늘 본문과 함께 연결하여 봅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께 잡힌바 되기 전에는 자신이 가는 그 길이 진리의 길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인 줄 알고 달려갔습니다.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길이며 사망의 길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길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앞장선 것입니다. 그런 자가 스스로 예수 믿는 길로 돌아설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런 자를 사로잡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영원하신 팔이 그를 잡아서 돌려세우신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를 잡은 그 분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본문 13~14절입니다. 봉독바울이 달려가는 그 목표를 잡은 줄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잡으려고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일 곧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행하여 달려간다고 합니다. 그 푯대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달려가서 잡으려고 하는 것을 푯대라고 하고 부르심의 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미 12절에서 보았습니다만 예수님께 사로잡힌 것을 잡기 위하여 달려가기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게 잡혔다면 자신도 이미 그리스도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 길로 달려간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12절의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말씀과 연결하여 열심히 달려가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이미 빌립보서 1: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사망의 길로 달려가는 자신을 부르신 그 부름의 길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에 대하여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9:15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예수님께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러자 눈이 멀어버립니다. 삼일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위하여 기도하여 그로 하여금 보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울을 부르신 이유도 말씀해 주십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그릇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핍박하는 자를 자신의 사도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이 부르심의 길로 가게 됩니다.

 

로마서 1:1~7절입니다. “봉독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복음을 위한 것입니다. 이 복음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이 미리 약속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이방인 중에 믿어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나의 것이라는 것이 다 그리스도에게 차압되는 부르심입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는 자들은 바울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주의 것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9절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여기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교제하는 일에 바울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 분을 알고 사귀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맛보고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은 우리도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고전1:1,2). 지금까지의 부르심만 보아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부름 받은 것 자체가 상을 받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25절입니다. “22 유대인은 2)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십자가의 도는 거리끼고 미련한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저주 받아 죽는 죽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지혜를 구하며 논리와 인과율을 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로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세상에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않으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부르심을 받은 자는 세상의 그 어떤 조건으로 부르시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세상으로 보면 못난 자들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7~19절입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면 하나님을 알고 마음의 문이 밝아져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이 소망은 눈에 보이는 썩어질 것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2절입니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하나님께서 부르신 이유는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이 사로잡힌바 된 그것을 사로잡기 위하여 달려간다는 말씀을 봅니다. 바울을 부르신 이유는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부르셨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주께 부르심을 입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이며(1:6)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고전1:9).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를 알고 믿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시고(고전1:18~25),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부름입니까!

 

디모데후서 1:9~10절입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구원입니다. 이 구원이란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이렇게 부르신 것은 결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무엇을 추구하게 됩니까?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의 부르심을 입지 않고 내가 스스로 주를 부르기 위하여 나왔다면 그 사람은 썩을 것과 생명도 아닌 것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이 역사 속에서 부르심을 입게 되면 지금까지 찾아본 내용들을 알고 믿고 감사하며 또 그것들을 추구하면서 달려갈 것입니다. 부르심의 내용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3:1절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은 누구를 깊이 생각하게 됩니까?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면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부르심이 내용들을 보면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얻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에 참여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는 그런 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그 십자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빌립보서 3:7~12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에 유익하다고 하는 것을 모두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예수님께 붙잡히고 나서 예수님을 알고 보니 예수님을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자기의 행위로 나온 율법의 의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좋은지 그것을 알기 위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한량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평생에 달려가도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1:1~4절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영광과 덕으로서 부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신 것은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알아갑니다. 이렇게 부르시고 부르신 방향을 따라 달려가면 어떻게 됩니까?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4). 지금까지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니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들을 말합니다. 이것을 위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본문 13~14절을 다시 봅니다. 예수님께 사로잡혔지만 나를 사로잡으신 그 예수님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한 일들은 다 잊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율법의 의로 열심히 달려간 것도 잊어버리고, 자신이 부르심을 받고 무엇을 했다고 하는 것들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기 위하여 달려간다고 합니다. 그 앞에 있는 것이란 푯대이며 이 푯대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들이 다 부르심에 속한 상입니다. 그런데 궁극적인 상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입니다(3:8).

 

이사야 43:15~18절을 봅니다. “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말씀과 연결하여 보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 내용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왕이신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나올 때에 바다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길과 강을 내시듯이 바벨론에서 인도하여 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흑암의 권세에서 끄집어 내셔서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며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들이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65:17). 이런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5:17).

 

본문 15~16절입니다. 온전히 이룬 자란 이미 자신은 다 이루었다고 하는 자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은사가 나타나니 자신들은 대단한 자인 줄 알고 교만하게 되는 일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또 다르게는 영지주의자들처럼 자신은 이미 진리가 되었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복음을 들었다는 자들 중에 자신이 이미 영적인 지식을 가졌기에 진리가 되었다고 하면서 성경도 예수도 필요 없다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면 너희가 달리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이 알려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가라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의 상이 무엇인지 오늘 찾아본 내용만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주님의 부르심 그 자체가 상입니다. 그리고 그 상에 참여되는 것을 여러 가지로 말씀하는데 복음을 전하는 것,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 하는 것,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임을 알게 하시는 것, 소망을 알게 하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심,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우리에게 주심과 같은 이런 내용들이 주님의 부르심 안에 들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우리를 부르신 주님이 우리의 상입니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과 나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얻었다면 다 얻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부르심으로 그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려간 바울처럼 오늘도 복음으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은 이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