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17~19 십자가의 원수 2018. 5. 20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립보서 3:7~9절을 보면 바울사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들으면 자신은 하나님의 언약과 늘 반대로 가는 것을 확인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대로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려고 예배당을 나간답니다. 그런데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일이 힘이 듭니다. 성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힘이 드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최선을 다하여 살다보면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썩어질 것과 배설물로 보이지 않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내가 버림받는 길로 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버림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죄인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현장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런 것을 배설물로 여긴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 삼으려고 한 것을 배설물로 여긴 것입니다. 이마에 땀을 흘릴 정도로 열심히 살아야하는 것은 아담의 타락이후에 모든 인간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땀 흘리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을 불한당(不汗黨)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답 글이 왔기에 다시 제가 대답하기를 사람이 죽을 때 까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믿는 자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또 한분의 이야기입니다. 하루에 육체노동을 11시간 하는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몸을 쓰는 일이라 그런지 좀 버겁지만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믿음 소망 사랑이 생각되어지니 기쁘다고 합니다. 제가 답변을 하기를 감사와 기쁨으로 주께 하듯이 일하시면 된다고 전했습니다. 제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 안에도 이런 질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기 위하여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골로새서 3:18~4:1절을 봅니다. “봉독 아내는 남편에서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는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주 안에서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며, 아비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종들은 육신의 상전에서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이 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알기에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상전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라고 합니다.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있음을 알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한 마디로 말씀을 드리면 모든 일을 주께 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특히 종들에 관한 말씀을 보시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주께 하듯이 하라고 합니다. 이 당시의 종이란 노예입니다. 종은 짐승과 같은 대접을 받는데 말하는 짐승정도로 취급을 받습니다. 이들의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도 노예가 있었습니다. 도망가면 추노꾼들이 잡아옵니다. 이런 종들은 주인이 보면 일을 하는척하고 주인이 보지 않으면 대충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는 종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모든 일을 주께 하듯이 하라고 합니다.

 

여기에 나온 모든 인간관계는 장차 나타날 그 나라에서는 없어질 관계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과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은 세상을 뒤집어엎는 혁명을 말하거나 사회제도의 개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복음을 듣고 이렇게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 안에서 종과 노예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어집니다. 그 당시에 이 보다 더한 혁명적인 사건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셔서 다스리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사는 것이 현실 도피적 이거나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주께 하듯이 합니다.

 

본문 17절을 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형제라고 부르면서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이미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본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고 합니다. 바울사도는 어떻게 자기를 본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이라고 생각한 것을 해로 여기고 그리스도에게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그런 모습을 본 받으라고 합니다. 바울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그 모습을 본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고전11:1).

 

본문 18절입니다. 바울사도가 여러 번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누구입니까? 빌립보 교회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들은 빌립보서 3:2~3절에서 본 대로 개들이며, 행악하는 자들이며, 율법을 따라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들리심으로 영생을 주시고(3:15) 참된 지식을 알게 하시고(8:28) 자신에게로 모으시는 것이(12:32) 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원수란 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들은 그 마침이 멸망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십자가는 자기 부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기 부인을 한다면 그것은 불교이며 금욕주의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은 예수님께서 홀로 지신 그 십자가에,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아서 이끌어 가시는 것이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이 아닌 자기 의지와 결단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율법주의로 나가거나 금욕주의로 나가거나 신비주의로 나가거나 믿음 만능주의로 나가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섬기는 것은 결국 자기들의 배를 섬기는 것입니다. 배라고 하면 욕망을 말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자기 욕망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 이후에 모든 인간들의 신은 자기의 욕망입니다. 이러한 타락한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면 율법으로 자기를 치장합니다. 율법이 없는 자들은 자신의 도덕이나 양심으로 치장합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영광은 부끄러운 것이며 땅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 욕망을 따라 땅에 속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의 설교에서 일부 인용을 합니다. “바울이 어떤 이들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하는지 주목하십시오. 선한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십자가만 나를 구원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친구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 무엇을 덧붙이거나 덜어내는 사람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유대교인들과 도덕주의자들을 정죄하는 최종적인 근거입니다.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전부 십자가의 원수이며 십자가의 영광을 훼손하는 자들입니다.”

 

이 뒷부분의 내용은 누가 봐도 도덕적으로 잘못된 삶을 살면서 십자가를 말하고 십자가를 전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면서 그들도 십자가의 원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목사도 성화를 상당히 강조합니다. 그런데 성화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로 되어버리면 다시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화도 그리스도 일로 은총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상업적인 거래의 교환이나 법정적인 개념으로 예수님과 우리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자신을 나누어주시고 우리를 짊어지셨기에 우리를 그가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끌리는 자는 세상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희생적인 모습이 나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자들의 고백은 자신이 죽기까지 충성하여도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고전15:10).

 

계속하여 십자가의 원수가 무언지 갈라디아서 2:19~21절을 봅니다.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길이 우리의 행위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나의 어떤 행위로도 주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어떤 분이 질문을 했습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예수 안 믿어도 착하게 살면 천국 간다는 말과 조용기 목사가 불교대학의 특강에서 구원이 예수님 외에도 있다고 한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물어볼 것도 없이 다른 복음입니다.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떨 때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도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도 내가 믿어주는 행위로 나오거나 믿음만능주의로 나가면 그것도 다른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한 우물에서 단물과 쓴물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3:1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덧붙이거나 빼는 것이 다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입니다.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1)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며 그 완성으로 인하여 의의 선물을 성령을 통하여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믿음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되었다는 것은 은혜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로 부족하다고 하면서 무언가 더 보태야 된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온 것을 보고 바울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인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버리고 속히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어떻게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가 하는 생각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을 잘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다윗이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4:1~8절입니다. “1 그런즉 1)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이것이 아브라함과 다윗이 받은 복입니다.

 

히브리서 10:26~29절입니다.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진리의 지식은 복음입니다. 복음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다는 것은 복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정말로 받은 자가 버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복음을 받은 후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일차독자는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자들에 대하여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버리는 것은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들이 받을 벌이라는 말씀입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법을 십자가로 제거하시고 지워버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버림으로 완성하신(2:14,15)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어떤 심판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아 버리고 우리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들이 받을 벌이 얼마나 더 중할지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그 피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언약의 피가 됩니다. 이것을 증거 하는 분이 은혜의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복음을 듣고 믿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이 됩니다. 이런 자들은 그 십자가 앞에서 모든 행위를 멈추게 됩니다. 이러한 자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의롭다고 한 행위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해로 여기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붙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