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출애굽기 30:11-16 생명의 속전(贖錢) 2011. 4. 17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들을 계수할 때에 자기의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것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 13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14 계수 중에 드는 모든 자 곧 스무 살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15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16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

 

오늘부터 한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한 주간이라도 특별한 행사를 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특별 새벽기도회도 하고, 금식을 하기도 하고, 문화금식도 합니다. 문화금식이란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 등을 한 주간 보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보다 그들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신앙상담에 어느 분이 정사예배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도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못 정(釘)자에 죽을 사(死)자를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못 박혀 죽으심을 기념하며 고난주간 금요일 저녁에 촛불을 들고 특별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제가 답변하기를 예수님의 고난을 일회용 행사로 마치려고 한다면 문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제삿날처럼 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그림자입니다. 이제 실체가 완성이 된 시대에는 예수님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하면 고린도전서 11:25-26절입니다.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성찬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일 년에 몇 번만 성찬식을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몇 번만 기억하면 된다는 말입니까? 그 말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때는 날마다 모였습니다. 날마다 떡을 뗐습니다. 식사와 성찬이 구별이 없을 정도로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날마다 성찬식을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가톨릭은 미사 때 마다 성찬식을 합니다. 그런데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효력, 그 살과 피의 효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 다시 오실 때 까지 우리의 모든 예배 때 마다 모든 삶의 현장에서도 예수님의 죽으심이 증거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생명의 속전을 내라고 합니다.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돈을 내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 때는 돈을 은의 무게로 사용하였기에 반 세겔을 내라고 합니다. 반 세겔이 오늘 시세로 얼마인지 모르지만 반 세겔이 이십 게라라고 하는데 이십 게라는 12그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한 사람당 6그램의 은을 속전으로 드립니다. 이번 주 은 시세가 3.75그램에 6,518원인데 6그램이면 약 만 원 정도 됩니다. 그런데 이 정도 금액으로 어떻게 생명을 속하여 낼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시편 49:6-8절입니다. “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7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이 말씀에 보면 사람이 돈으로 생명의 속전을 바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나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돈으로 생명을 속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생명의 속전을 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미 생명의 속전이 지불되었다는 것을 확인시키시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애굽에서 나올 때에 어린 양의 피로 대속을 받아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대신에 누가 희생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장자를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장자만이 아니라 짐승의 처음 태어난 수컷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출13:13). 사람이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말은 성전봉사를 위하여 바쳐집니다. 나중에 장자대신에 레위지파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장자를 대신합니다(민3:12).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장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출4:22).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수하여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는 다 반 세겔의 생명의 속전을 내게 하는데 이 속전은 부자라고 많이 내고 가난하다고 적게 내는 것이 아닙니다. 15절입니다. 사람의 목숨 값이 세상에서는 달리 취급받습니다.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입거나 사망을 당하면 그 사람의 직업과 부에 따라 차등적으로 보상금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번에 노회에 가니 임시목사의 호칭문제가 나왔습니다. 조직교회가 아니면 목사의 호칭이 임시목사인데 어느 사람이 사고가 나서 임시목사라고 적었더니 임시직이라고 해서 보험회사에서 아주 작은 보상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는 부자냐 가난하냐에 따라 목숨 값이 다르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똑 같은 생명의 속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속전은 어디에 쓰입니까? 16절입니다. 회막 봉사에 쓰도록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반 세겔이 생명을 속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생명의 속전을 동일하게 내도록 하는 것은 모든 백성이 똑 같은 생명의 속함의 혜택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미성년자와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포함이 됩니다. 이것이 대표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반 세겔이 성전봉사에 사용하는데 일 년에 한번 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반 세겔로 성전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면 제사장들이 아침과 저녁에 상번제와 분향을 합니다. 이런 제사와 분향을 통하여 자신들의 생명은 대신 희생으로 속함으로 받고 산다는 것을 늘 기억하게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 반 세겔이 제대로 드려졌을까요? 드려진 때도 있고 드려지지 않은 때도 있지만 제대로 드려지지 아니한 때가 훨씬 많습니다. 성전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면 반 세겔이 드려진 것이지만 성전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반 세겔이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다른 십일조와 헌물을 따로 드립니다. 그런데 성전 봉사에 쓰일 반 세겔이 제대로 드려지지 않음으로 성전이 퇴락하고 율법 책도 성전 창고의 먼지 속에 묻혀버린 때가 있었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때에 우상숭배가 얼마나 심하였는지 성전 마당에 일월성신을 위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니 성전은 제대로 돌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므낫세의 죄로 인하여 남 유다가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멸망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므낫세의 손자 요시야를 통하여 신앙의 부흥을 일으키십니다. 열왕기 하 22:3-6절입니다. “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성전에 보내며 이르되 4 너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올라가서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 드린 은 곧 문 지킨 자가 수납한 은을 계산하여 5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넘겨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작업자에게 주어 성전에 부서진 것을 수리하게 하되 6 곧 목수와 건축자와 미장이에게 주게 하고 또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서 그 성전을 수리하게 하라”

 

성전에 드린 은으로 성전을 수리하게 합니다. 수리 중에 율법 책을 발견합니다. 그 율법의 저주가 그대로 임할 것이라는 선지자의 말을 듣고서 회개하며 대대적인 개혁을 합니다. 온갖 우상을 다 부수어버리고 다른 왕들이 손을 대지 못한 산당들마저 다 부수어버립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유월절을 지키는데 요시야만큼 유월절을 지킨 왕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개혁에도 불구하고 므낫세가 저지른 그 범죄를 만회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결국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하며 멸망이 되고 성전조차 불타 버립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의 속전을 제대로 드리지 않아 성전의 기능이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70년 만에 돌아옵니다.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성전의 재건입니다. 그러나 기초만 놓고서 또 약 15년이나 지체하고 나서 성전을 재건하는데 그 성전이 스룹바벨성전입니다. 성전을 재건하게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무엇으로 살아가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들이 포로에서 돌아와서는 스스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한 운동들이 일어납니다. 그 운동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전하고 가르치는 관리직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생활 속에 실천하려는 평신도운동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런 운동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기에 성전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였습니다. 이때의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증축을 계속하여 아주 화려하고 멋있는 건물이 되었습니다. 온갖 율법에 따른 제물을 성전에 바칩니다. 당연히 성전을 위한 생명의 속전인 반 세겔도 내야 합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성전에 속한 사람들이 온갖 이권을 챙기는 도적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7:24-27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시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은 왜 내지 않느냐고 합니다. 베드로가 낸다고 하고서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물은 이유는 예수님의 율법 해석과 적용이 그들의 상식과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않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 주시면서 내 아버지가 일하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성전보다 크시다고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이 어떻게 말할지를 보고자 물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세상의 임금의 아들이 세를 내느냐고 합니다. 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어떻게 성전 세를 내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로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성전 세를 내라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낚시 하여 처음 잡히는 물고기의 입을 열어보면 한 세겔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돈으로 베드로와 예수님의 성전 세를 내라고 하십니다. 이 기적을 통하여 천하의 주인이 예수님임을 베드로만 알게 하십니다. 바다의 물고기가 동전을 물고 있다는 것을 아시는 것도 예수님이시고 그 물고기가 어느 어부의 주머니에서 떨어지는 한 세겔을 물어야 하는 것도 다 예수님이 천하의 주인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아직 자신의 메시아임을 십자가 지기까지 숨기십니다.

 

생명의 속전을 통하여 자신들의 생명이 성전에서 드려지는 희생을 통하여 속함을 받는 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오히려 이런 생명의 속전이 드려지는 성전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3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처형하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건물로 된 성전에서 드려지는 희생의 제사가 자기 자신임을 자기 몸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대속이 예수님의 살과 피에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임하자 알았습니다.

 

요한복음 2:13-22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자신이 성전이 되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의 속함을 받는 것은 어떤 희생물을 바치거나 생명의 속전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이제 모든 것이 주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값을 주고 샀기에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의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롬8:15, 갈3:26). 아들은 외인처럼 세를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무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전서 1:13-25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생명의 속전을 지불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속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고 합니다. 지금 받은 은혜가 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생명의 속함을 받은 것은 이제 장차 나타날 참된 생명 안에 누릴 삶이 있습니다. 그 참된 생명을 우리가 부분적으로 맛을 보고 청동거울을 보듯이 지금은 희미하게 맛을 봅니다. 이런 자들은 없어질 금이나 은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 있기에 이런 사람은 지금 형제를 사랑하며 영원한 복음을 받고 전하며 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