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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2:25-29 방자함과 헌신 2011. 6. 5

 

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26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증거의 두 돌 판이 금송아지 숭배로 인하여 깨어졌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자하게 행동합니다. 이 증거의 돌 판이 어떤 돌 판입니까?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시고 친히 기록하여 주신 증거의 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피로 언약하고서 그 언약의 증거 판을 받아오는 40일의 기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광란의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모세가 들고 온 증거 판을 깨뜨렸는데도 여전히 방자하게 행하여 원수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방자(放恣)함이란 놓을 방(放)자에 방자할 자(恣)자입니다. 방자하다는 말은 제 멋대로 한다는 말입니다. 노아 홍수 때의 표현으로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결혼하는 것이며, 사사기의 표현으로 하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 오늘 식으로 말하면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송아지를 숭배하며 뛰어노는 모습을 말합니다. 조선시대 때 임금의 교지를 받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임금의 명이기에 정승이라도 무릎을 꿇고 어명을 받습니다. 어명이 비록 사약을 내린다고 하여도 임금을 향하여 절하고 사약을 받아야 충성된 신하가 됩니다. 결코 방자한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보다가 텔레비전의 드라마 한 장면이 자꾸 생각이 납니다. 한 두 번 보았는데 반짝 반짝이라는 제목이 붙습니다. 큰 손의 아들과 결혼하고 싶어서 큰 손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처녀가 큰 손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큰 손의 집에 왔습니다. 그때 상복을 입은 모자가 큰 손의 집에 찾아와 자기 남편 살려내라고 합니다. 큰 손이란 사채업자를 말하는데 사채업자가 회사를 집어 삼키기 위하여 부도가 날 지경인데 더 이상 돈을 빌려주지 않아서 사장이 자살하였습니다. 어린 아들과 함께 와서 울고불고 하는데 큰 손이 그 처녀에게 내보내라고 합니다. 말로 해서 안 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주 비싸게 보이는 도자기를 두 개나 거실 바닥에 내려 던져 깨어버립니다. 그러자 여자가 놀라서 울음을 멈추고 아이는 울면서 잘 못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깨어졌는데도 회개하기는커녕 말씀이 깨어지든 말든 나는 내 멋대로 살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악 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고 그저 나에게만 몰두하여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하는 모습이 방자한 모습입니다. 복음을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이렇게 하여도 죄고 저렇게 하여도 죄인데 이런 죄쯤 짓고 살아도 상관이 없지 않느냐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법을 정하여 아주 큰 죄는 그렇지만 사소한 죄는 짓고 살아도 되지요? 이 질문 자체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자 함이 아니라 자기의 쾌락을 위한 것이기에 죄입니다.

 

바울의 복음을 들은 자들 중에 이런 오해를 합니다. 로마서 5:20-21절입니다.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함이라고 합니다. 즉 율법을 통하여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하였는데 이런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자신이 정말 죄인인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속을 받았음을 감사해야 하는데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로마서 6:1-2절입니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바울의 이 복음을 듣고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으니 은혜를 더욱 넘치게 하려면 죄를 더 지어야 하겠네! 이런 식의 빈정거림이 나옵니다. 심지어 복음을 들었다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차피 죄인인데 죄를 더 지어야 은혜가 드러나기에 나는 내 멋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자기는 죄를 안 짓고 살아왔다는 말입니까? 이런 반발이 나오는 사람이 율법 지킨 유대인들의 방자함이라면 복음 듣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들도 역시 방자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로마서 6:15-23절을 봅니다. “봉독”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뿐입니다. 죄의 종과 의의 종입니다. 의의 종은 죄를 죄 되게 하는 율법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습니다. 그렇다고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죄에게 순종하여 죄의 종이 되었는데 이제는 순종으로 의의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순종으로 의의 종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즉 은혜로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고 죄에서 자유를 준 것이 아니라 의의 종으로서 부르신 것입니다. 의를 증거 하기 위한 부르심이지 자신의 방자함을 합리화하라는 부르심이 아닙니다.

 

율법을 들어도 방자하고, 복음을 들어도 방자한 이들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26-28절을 봅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개로 오라고합니다. 그러자 레위자손이 모세에게 나아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고 하면서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문에서 저문 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친구를, 이웃을 죽이라고 합니다. 이 날에 죽은 자가 삼천 명 가량 됩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자기 마음대로 뛰어노는 이들을 도륙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모세는 헌신이라고 합니다. 29절을 봅시다.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들에게 복을 내리신답니다.

 

우리는 헌신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가 늘푸른교회 처음 왔을 때에 여러분의 헌신예배를 통하여 보면 이렇습니다. 일 년에 한번 전도회 별로 헌신예배를 하는데 외부강사를 초청하고, 한복을 입고, 특송을 하며, 오후에도 헌금을 합니다. 헌금으로 강사 사례주고 남은 것은 전도회 수입으로 잡습니다. 남전도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헌신입니까? 이렇게 헌신함으로 자기 아들과 자기 형제가 세상에서 잘 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렸더니 언제부턴가 전도회 사업에 헌신예배가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헌신예배가 사라진 것은 일 년에 한번 헌신이 아니라 날마다 헌신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지요!

 

우리가 헌신이라고 하는 것과 성경의 헌신이라는 차이가 이렇습니다. 성경의 헌신이란 여호와의 질투로 질투하여 자기의 아들과 형제와 이웃까지 도륙하는 것을 헌신이라고 합니다. 이런 헌신을 오늘날 한다면 모두 살인자가 되겠지요! 그러면 어떤 헌신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아내와 자식과 전토를 버리고 심지어 자기의 목숨조차 미워하고서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이런 헌신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나를 위하여 나의 가족을 위하여 살아가는데 이것을 부인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런 헌신 자가 나왔습니다.

 

민수기 25:1-18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인들의 유혹을 받아 우상숭배를 합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염병이 돌았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인 시므리가 미디안 여인 고스비를 데리고 자기 장막으로 들어갑니다.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따라가서 그들을 찔러 죽입니다. 이로 인하여 염병이 그쳤는데 이것은 여호와의 질투로 질투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헌신으로 인하여 염병이 멈추었지만 그때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 됩니다.

 

비느하스는 제사장 아론의 증손자입니다. 이런 레위지파의 헌신이란 여호와의 질투로 질투하여 우상숭배를 막아내는 일을 합니다. 야곱으로부터 레위와 시므온이 할례언약을 이용하여 적을 도륙하였다고 흩어지리라고 하였는데 레위지파는 여기서 헌신함으로 흩어지기는 하지만 제사장으로 각 지파에 흩어집니다. 그러면 레위지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가르치며 이스라엘의 범죄를 인하여 속죄의 피를 흘리는 역할을 합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아무리 헌신을 하여도 자신이 흠이 있기에 온전한 헌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흠이 없는 제사장이 오셔야 하시는데 이 제사장은 레위지파가 아니라 다윗의 지파로 오십니다. 전혀 다른 방식의 제사장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7:27-28절입니다. “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단번에 영원히 온전한 제사장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에서 헌신한 제사장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가족을 칼로 도륙하고 또 속죄의 제사를 위하여 정결한 짐승을 희생하게 한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영원하고 완전하신 대제사장 예수님은 그 칼을 자기 자신에게 겨누신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0:17-18절입니다.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은 자기 양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는 길로 가십니다.

 

대신 저주 받으시는 자리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렇게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의롭게 되거나 의롭게 되려고 마음을 먹지도 않는 상태, 즉 죄인 되어 있고 원수 되어 있을 때 나타난 사랑입니다.

 

로마서 5:8-11절입니다.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한곳만 더 봅니다. 고린도후서 5:14-21절입니다. “봉독”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십니다. 다른 말로하면 끌어당깁니다. 그 사랑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을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합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에게도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 직분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면 우리도 이 화목의 직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참으로 방자하게 살아온 우리들의 죄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물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자들은 율법주의의 방자함도 아니요, 복음을 육체의 기회로 삼은 방자함도 아닙니다. 죄인을 하나님의 의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 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