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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출애굽기 32:30-35 생명책 2011. 6. 19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 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34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35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2주전에 동읍교회 헌신예배에 갔다가 그 교회 주보에서 설교원고를 보았습니다. 목사님의 고향에서 청와대와 국립 박물관을 관광한다고 해서 신청하여 갔다고 합니다. 청와대보다 박물관을 보고 싶어서 신청을 하였는데 가는 날이 박물관 휴관일이나 보지도 못하고 청와대만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행 중에 한 사람은 청와대에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시어른이 신청하였다가 사정이 있어서 못 가게 되자 며느리가 대신 왔는데 며느리의 이름이 없으니 출입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버스 안에서만 놀다가 왔답니다.

 

청와대가 이러하다면 천국은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여러 번 천국 문 앞에서 거절당하는 자들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많은 능력을 행하여도 그 날에 주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노라고 하시는 자들이 있습니다. 열 처녀가 함께 신랑오기를 기다렸는데 기름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잠시 기름을 채워오는 그 순간에 신랑은 집에 들어가고 문이 닫혀버립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나는 너희를 도저히 모른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천국은 완전히 주인 마음대로입니다. 사람의 노력이나 정성을 봐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시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이름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책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기도하려고 여호와께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모세가 기도한다고 해서 속죄가 되느냐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말하고 올라갑니다. 30절을 보시면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고 합니다.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일렀다. 너희가 이토록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을지 나 이제 야훼께 올라 가 보아야겠다.”

 

모세가 속죄를 보장 하지 못하기에 ‘혹’이라고 합니다. 용서 해주시지 않는 것이 당연한데 혹시나 용서하여 주시면 그것이 얼마나 큰 긍휼이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용서를 말합니다. 예수님 이름만 들먹이면 그저 용서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나 알고 용서를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용서를 말할 때에 내가 행하지 못한 몇 가지들을 가지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것도 목사가 가르쳐 주는 몇 가지 또는 자기가 스스로 정한 몇 가지를 가지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가 속죄를 구하려고 올라가는 내용은 어떤 죄입니까? 언약의 하나님을 배반하고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황금송아지는 오늘날의 황금만능사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왜 사람들이 황금을 숭배합니까? 세상의 난리 소문이 일어나니 더욱 금값이 오릅니다. 이런 불안한 세상에서 금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살기 위한 자구책입니다. 이런 모습은 선악과를 유혹을 받았을 때에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그 유혹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창조주에 의존되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코 스스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혹의 결과로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고, 즉 스스로 존재하려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에스겔 29:3절입니다.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이런 모습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을 자기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금송아지 숭배사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구원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려고 출애굽을 시켰는데 이들은 오히려 여호와를 버리고 금송아지를 섬긴다는 것은 다시 자기들이 주가 되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신이 나를 위하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어 내라는 말입니다. 31절을 봅니다.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를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으니 큰 죄를 범하였다고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금신은 만든 것은 결국 자기를 스스로 지키기 위함입니다.

 

이 당시에 모세만이 죄가 무엇인지 아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중보자로 나섭니다. 32절입니다. 금송아지를 섬긴 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되지만 그러나 이제 용서하여 달라고 합니다. 용서하여 주시지 않으시려면 자기 이름도 주께서 기록한 책에서 지워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생명을 건 기도입니다. 모세는 주께서 기록한 책을 보았고 그 책에 자기 이름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백성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심판하시려면 자기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합니다. 즉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세의 이 간구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33절입니다. 누구든지 범죄 하면 그를 내 책에서 지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 백성을 인도하여 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앞설 것이니 가라고 하시면서 내가 보응한 날에는 보응할 것인데 이는 아론이 만든 그 금송아지를 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도 생명책에 이름이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를 그 책에서 지우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인생이 없습니다.

 

로마서 3:22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5: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모세가 생명을 건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답변은 죄를 범하는 자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죄를 짓지 아니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기도와 비슷한 기도를 바울이 합니다.

 

로마서9:1-3절입니다.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모세는 주의 책에서 지워지는 한이 있어도 자기 백성을 용서하여 달라고 하는데 바울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자기 동족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모세와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어지는 로마서 9장 4절 이하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약속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 졌느냐고 합니다. 아니랍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 난 자라야 네 씨라고 불리리라고 합니다.

 

로마서 9:6-13절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합니다. 야곱에게서 난 자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라고 불리라고 하였다는 말에서 언약의 자손이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시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이것은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하십니다. 오직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만이 세워지게 하시기 위합니다. 이것이 생명책의 취지입니다.

 

이런 말씀에 대하여 반발이 일어나는 자는 생명책에 그 이름이 없는 자라고 보아야 합니다. 지금 바울이 모세의 말씀을 가지고 그 이유를 증거 합니다. 로마서 9:14-16절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고 묻고서 스스로 답합니다.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이 되고 안 되고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거의 대부분 이런 반응이 나옵니다.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고 안 되고는 내 뜻이 아니라면 나는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나옵니다. 이름이 기록이 되어 있다면 노력 안 해도 구원받을 것이고 이름이 없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탈락이 될 것인데 무얼 하려고 이런 고생을 하느냐며 돌아서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자기를 위하여 살아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생명책에 지워지고 기록이 되지 못하는 자들이 어떤 모습인지 말씀을 통하여 봅니다. 시편 69:26-28절입니다. “26 무릇 그들이 주께서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하게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27 그들의 죄악에 죄악을 더하사 주의 공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28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다윗이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할 때에 다윗을 핍박한 자들을 향한 저주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말씀이기에 예수님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셔서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여 달라는 내용이 됩니다.

 

시69:9절을 봅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히 하실 때에 제자들이 기억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책의 이름의 여부는 예수님께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다니엘 12:1-3절입니다. “봉독” 끝 날에 관한 말씀입니다. 끝 날에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재림의 날입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부끄럽다고 버린 돌을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4-10절입니다. “봉독” 사람에게는 버린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님께 붙는 자가 성전이며 이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이들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이것이 어둠에서 불려나와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자이며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긍휼을 입은 자들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생명책에 관한 말씀이 빌립보서에서 한번 나오고 요한계시록에서 많이 나옵니다. 먼저 빌립보서 4:3절입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이렇게 행한다고 생명책에 기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책에 기록이 된 자들은 이런 모습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3:5, 13:8, 17:8, 20:12, 20:15절입니다. 결국 생명책에 기록이 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흰 옷을 입히고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시며 그 이름을 하나님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생명책의 이름이 일직 죽인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입니다. 모세와 바울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보고서 자기의 이름을 지워서라도 다른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였지만 그들의 목숨으로는 한 명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의 능력으로만 구원되는 백성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