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동영상설교]

출애굽기 33:1-6 장신구를 떼어 내라 2011. 6. 26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2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4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로 언약을 맺고서는 40일도 되지 못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섬긴 것은 언약을 정면으로 반역하였습니다. 이것은 피로 언약을 체결하였기에 어긴 쪽이 죽임을 당하여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언약의 돌 판을 깨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깨어졌습니다.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용하면 모두가 진멸당하여 마땅합니다. 그 진멸을 우선적으로 멈추기 위하여 돌 판을 깨뜨려버립니다. 그러나 돌 판이 깨어진다고 언약이 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돌 판을 다시 만들어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혹시 속죄가 될까 하고서 다시 여호와 앞에 나아갑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고 합니다. 출애굽을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백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아니라고 손을 떼시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약속의 땅으로는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자를 앞서 보내셔서 가나안 족속을 쫒아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르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사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겠다고 합니다. 천사만 함께 보내고 하나님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 함께 가시지 않으시려고 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서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한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거역하는 백성들과 함께 동행 하시면 그 거룩함의 속성상 거룩하지 못한 자들이 진멸을 당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백성들이 어떻게 하는지 4절을 봅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은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님이 좋습니까? 예수님께서 주신다는 선물이 좋습니까? 마치 어린 아이가 외출하여 집에 들어오는 부모의 얼굴을 보기보다 부모의 손을 보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좋아하는 모습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헌신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잘 되고, 천국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보상과 황금보석으로 꾸민 넓은 집을 바라보고 헌신한다면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천국에서도 상급의 차등을 이야기하면서 세상에서 경쟁하는 방식을 교회에 도입하여 교회가 성장하였다고 그런 프로그램을 또 팔아먹고 있는 현실을 봅니다.

 

그런데 비록 금송아지를 섬기고 배신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겠다고 하시자 슬퍼하며 한 사람도 단장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는 약속의 땅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유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한 신랑이 신부에게 집과 생활비와 모든 것을 제공하겠다고 하면서 신랑이 함께 가지 않으면 그런 결혼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신랑을 사랑하지 않고 바람피울 여자라면 좋아하겠지만 지금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슬퍼하면서 한 사람도 단장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단장을 하지 않은 것은 백성들이 스스로 단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세가 장신구를 제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였기 때문으로 봅니다. 기록의 순서로는 여호와의 명령이 나중에 나오지만 말씀이 기록된 순서대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의 결론을 먼저 말하고서 기록은 나중에 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이런 곳이 많음을 전에 김영대 목사의 창세기 강해를 통하여서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5-6절을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장신구를 떼어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장신구를 떼어낸 것이 호렙산에서부터 장신구를 떼어 내었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장신구, 전에 성경에서는 단장품을 떼어내라고 합니다. 장신구나 단장품은 자신을 치장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언제부터 자신을 치장하기 시작하였을까요? 에덴동산에서는 자신을 치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대로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스스로 단장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대로가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 먹고부터 사람들은 자신을 가리고 치장하기 시작합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듯이 인생은 그때부터 자신을 가리는 역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문명의 발달입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이 저주를 받아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성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자기 가리는 일이 문명으로 연결되고 바벨탑을 쌓게 됩니다. 우리의 흩어짐을 면하고 우리의 이름을 내자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모든 문명에 다 나타납니다. 이런 것들이 장신구로도 나타납니다.

 

밀림 오지에 사는 사람들도 자신들을 단장합니다. 저희교회 게시판에 미국에 사시는 분이 재미있는 동영상을 올려놓았는데 밀림 오지에 사는 사람이 문명인을 만나는 내용입니다. 그들의 차림새는 신석기 시대의 모습입니다. 돌도끼를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들이 거울을 보고 놀라는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 신석기시대의 사람들도 자기들을 단장하며 다닙니다. 머리를 장식하고 소의 코뚜레처럼 사람의 코를 뚫어 장식품을 달고 다닙니다. 그러므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자기를 단장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장신구를 떼어내어야 합니다. 자기를 단장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를 단장하는 것은 온갖 이방의 신을 섬기는 자들의 영향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도망 나와 벧엘로 올라가야 하는데 세겜에 머물게 됩니다. 그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합니다. 레위와 시므온이 할례를 행하면 결혼하게 하겠다고 하고서는 할례를 받고 고통 중에 있을 때에 세겜 족의 남자들을 죽임으로 사방에서 공격의 위협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게 하시는데 단장품을 제하고 올라갑니다.

 

창세기 35:1-5절입니다.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역시 장식품들을 떼고 나서 벧엘로 올라가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십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온갖 장식품으로 자신을 단장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3:13-26절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께서 심판을 하시는데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심문하십니다. 남의 포도원을 삼키고 가난한 자들을 탈취한 것을 가지고 시온의 딸들이 장식을 합니다.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아기작거려 걸으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냅니다. 그 장식한 것들은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 고리와 팔목 고리와 얼굴 가리개와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반지와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 주머니와 손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런 것을 심판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심판 당함을 보고도 오늘 우리들도 자신을 장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경견한 여인은 무엇으로 자신을 단장합니까? 디모데전서 2:9-10절입니다.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3:3절입니다. “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솔로몬의 사랑을 받았던 술람미 여인을 보십시오! 단장은커녕 오빠들이 놀러간다고 여동생에서 양떼를 맡겨버립니다. 그 양떼를 돌본다고 피부가 게달의 장막 같은 술람미, 단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인입니다. 예루살렘의 그 수많은 여인들, 무려 천명의 여인들이 고운 옷과 아름다운 보석으로 장식을 하였지만 솔로몬은 아무른 장식도 없는 술람미만 사랑하였다는 말입니다. 아하수에르 왕의 왕비로 간택된 에스더를 보십시오! 다른 왕비 후보들은 온갖 것을 더 구하여 자신을 장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왕궁에서 기초적인 것을 제공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왕비로 간택이 되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남자들은 안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단장을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성도란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이 다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러면 신부가 무엇으로 단장하여야 합니까? 신랑이 입혀주시는 의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범죄 한 이후의 인생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단장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온갖 장식품으로 여호와께 나아가려고 합니다. 율법을 주었더니 율법으로 자신을 단장하려고 합니다. 율법으로 자신을 많이 단장할수록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복음을 안다는 것으로 또 자신을 단장합니다. 내가 아는 복음이 진짜라고 합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을 방해하면 그것은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고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진짜라고 합니다. 이것은 복음조차 자신의 단장품이 되어버린 현실을 보게 됩니다. 율법을 주었더니 율법으로 단장한 자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처럼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겨 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4:12-13절입니다. “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의 은밀한 것 까지 다 드러나서 벌거벗겨져야 합니다. 모든 자기의 치장물들이 다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게 벌거벗겨 질 때에 우리는 주님의 벌거벗음으로 우리를 가려주심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나올 때는 자신을 단장하고 오시면 안 됩니다. 복음성가 가사가 그런 내용이 있지요!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고 말입니다. 빈손 들고 와야 십자가를 붙듭니다. 그런데 우리의 윤리와 도덕, 양심, 종교적인 치장물들로 단장한 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겠습니까? 심지어 복음을 가지고서도 자기들의 단장이 아름답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까마귀가 다른 새들의 날개를 풀로 붙인 것과 다름이 없는 모습입니다. 태풍이 온다고 하는데 성령의 바람이 폭풍처럼 불어서 늙은 창녀가 두껍게 화장한 것과 같은 구역질나는 단장들이 다 드러나서 저나 여러분이나 죄 없이 부끄러움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일한 것이 없이 그 죄의 가림을 받은 자들의 복을 맛보기 바랍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들의 장신구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