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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3:17-23 주의 영광을 보이소서! 2011. 7. 10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장신구를 떼어내고, 진에서 격리하여 나갔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친구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신을 낮추셨는지를 보여줍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이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 보내시면서 함께 가시지 않으시고 천사를 보내어 가게 하시려면 올려 보내지 말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차라리 광야에서 다 죽는 것이 낫지 하나님 없는 약속의 땅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간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 말도 들어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의 잘 남이 아니라 17절에서 보시면 은총을 입었고 이름으로도 안다고 합니다. 이름으로도 안다는 것은 다 안다는 말입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착각합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삼수를 하여 유치하였는데 대통령과 재벌 회장과 김연아도 가서 치열한 유치경쟁을 하여 평창이 발표되었을 때에 사람들은 영광이라고 합니다. 물론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고 경제적인 효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겠느냐는 말입니다. 교회에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무엇이 영광입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이라면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 네가 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합니다. 20절을 봅니다. ‘나를 보고 살자가 없음이라’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서는 살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 상상속의 하나님을 만나고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러면 모세가 본 하나님의 영광이 어떠합니까? 21-23절입니다. 하나님을 보고서는 살 자가 없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한 반석위에 서라고 합니다. 내 영광이 지나 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리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 손, 등의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을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으니 우리가 알아들을만한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 앞과 뒤가 있고 등과 손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보면 죽게 되는데 하나님의 영광의 끝자락만 보았다고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4: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라고 합니다. 영은 사람이 볼 수가 없습니다. 야고보서 1:17절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빛들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고 합니다. 그림자가 없다면 우리와 같은 형체로 생각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합니다(요6:46).

 

그러므로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여 버린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2:8-9절입니다.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바울사도가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영광의 주가 되심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십니다. 손으로 모세를 덮어버립니다. 그 영광을 보고서는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말씀하시고 그 영광의 선한 것을 모세 앞에 지나가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신을 낮추셨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보았으면 모세도 죽어야 합니다. 일본에서 원전사고로 이 여름에 절전을 하고 수돗물에 방사능 물질이 나와서 고생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자폭탄이 터지는 현장에 있으면 형체도 없이 녹아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면 빛만 번쩍거리는 것을 보겠지요! 빛만 보아도 엄청난 피폭을 받는다고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영광이 핵폭탄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19절을 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하십니다. 첫째는 내가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겠다고 합니다. 전에 성경에서는 선한 형상이라고 합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모든 영광 또는 선한 모습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영광이 지나가는데 이것의 끝자락만 본다는 것이 20-23절에서 보았습니다. 둘째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그 이름이 깁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베푸느니라”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의 선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은혜와 긍휼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인간도 자력적인 행위로서 구원에 이를 자가 없음을 아예 율법에서부터 보여줍니다. 만약 인간의 자력적인 행위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자가 있다면 주의 은혜와 긍휼이 무색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이런 말씀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17:21-26절입니다. “봉독”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명하신 것을 다 이루어내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들이 은혜와 긍휼을 입은 자들인데 이들이 왜 구원을 받는가 하면 창세전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란 우리를 위한 구원이 아니라 창세전의 아들의 영광을 보여주시기 위한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였는데 그 영광의 끝자락만 보여주시고 이름을 선포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이름이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의 일을 예수님께서 완벽하게 이루어내십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일에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버지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는데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자 외에는 단 한 사람도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도록 완벽하게 조치하십니다. 그 조치하시는 방식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은혜와 긍휼을 입은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에 나타났습니까? 요한복음 1:1-18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영광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 영광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 영광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아담의 범죄이후에 모든 인간은 잘못된 영광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알아보는 사람은 자기가 잘나서가 아니라 은혜와 긍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위에 은혜입니다. 18절에서도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더 못 알아먹게 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31-32절입니다.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그가 나간 후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하여 나갔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팔리시고 십자가에 죽는 일을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하고 인자로 인하여 하나님도 영광을 받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영광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말씀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져야 하기에 이것이 영광의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이 영광을 돌림으로 인하여 예수님도 하나님께로부터 영광을 받아서 하늘보좌에 등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방금 요한복음 17장에서 본 창세전의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였을 때에 그 영광의 끝자락만 보았습니다. 그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이 이름으로 보여주시는 데 그 이름이 은혜 주실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주어지기에 이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영광은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온 우주적인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 드러납니다만 이 역사 속에서는 다른 영광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의 영광인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믿지 못할까요? 심지어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도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아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하게 하시고, 우리 남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돈도 잘 벌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교회도 부흥이 되게 하여 주시고, 세상에 좋다는 것들을 다 끌어들여서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데 사람들이 좋다고 아멘하고 따라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린도후서 4:1-18절을 봅니다. “봉독” 1절에서 긍휼을 입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 긍휼을 입은 모습이 어떻습니까? 2절을 보시면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가려지는 자가 있습니다. 이들이 망하는 자인데 긍휼을 입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들에게는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다 이 세상의 신이 주는 가짜 영광에 눈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까? 모세가 들었던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은혜와 긍휼입니다. 은혜와 긍휼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임한 능력입니다. 6절을 봅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 합니다. 천지 창조 때에 빛이 있으라고 하신 그 능력의 말씀으로 우리를 재 창조하셨는데 그 재 창조의 은혜와 긍휼을 받은 자는 무엇을 압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어떠하였습니까? 이사야 53:1-3절입니다.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렇게 고난 받는 종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도 주의 은혜와 긍휼을 입은 자는 세상의 헛된 영광에 마음이 빼앗기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영광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영광입니다. 그 영광이 임한 자는 고린도후서 4:16-18절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봉독”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집니다.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 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