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13~17 죄인을 부르러 오심 2018. 10. 7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2)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3)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죄를 알지 못하는 자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권세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어떠한지를 기록된 성경을 성령에 의하여 알게 되면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다는 말씀이 최고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죄를 모르면 죄의 결과인 죽음과 죽음보다 비참한 삶의 현실을 자기 힘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스스로 손에 창을 들고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자아(自我)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죄를 모르기에 이런 세상에서 남을 이기고 자기 혼자 살아남으려고 합니다. 그런 모습중의 하나가 신에게 정성을 바침으로 자신이 더욱 강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죽어서라도 더 나은 세상에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도 결국은 자신의 존재를 진리를 여기면서 자신을 더욱더 확장하고 영속화 하려는 죄의 모습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근원적인 죄를 알 수 없기에 이런 죄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여 주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대상이 어떤 사람들인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바닷가로 나가십니다. 가버나움에서 바닷가로 가셨다는 것은 갈릴리 호수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나섭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라는 소문이 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을 고치고 싶어서 따라 나선 이도 있었고, 기적을 보려고 따라나선 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이런 자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시기보다는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말씀을 가르치신 것은 천국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가르치실 뿐 아니라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제자를 부르시는 모습에서도 천국복음을 전하십니다.

 

14절입니다.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호수로 가는 길에 세관이 있습니다. 이 세관에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이 로마를 위하여 세금을 거두는 일을 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 일본을 위하여 일한 자들과 같습니다. 제국의 권세를 힘입어 동족의 세금을 거두는 자를 좋게 볼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온갖 이방인들과 접촉해야하는 직업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적으로도 정결규례를 지키지 못하니 죄인 취급을 받습니다. 이런 레위를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러자 레위는 즉석에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의 능력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우리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합니다. 레위는 자기 집에서 잔치를 엽니다.

 

15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세리의 집에 같은 세리들이 모인 것입니다. 또 죄인들이 모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볼 때는 이들이 모두 죄인들입니다. 무릇 유대인으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이런 자들과 어울리거나 식사를 하면 부정하게 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이러한 자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죄인들을 부르시고 식사를 함께 하시는 것은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왕의 식탁에 참여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겉모습만 보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16~17절입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하면서 비난을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 데 있다고 하시면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하지 않으시고 자비를 원한다는 말씀을 배우라고 합니다.

 

호세아 6:4~7절입니다.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주께로 돌아가는 것은 주님의 인애, 언약적인 사랑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을 원하지 않고 제사만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란 죄를 사하는 긍휼을 바라봐야 하는데 그 긍휼은 잊어버리고 제사를 드림으로 의무를 다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는 말씀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실상이 이러함에도 죄를 모르기에 주께로 돌아가 주의 인애를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이후로 죽어가면서도 죽는 이유도 모릅니다.

 

로마서 5:12~14절입니다.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3)모형이라

 

율법은 모세가 하나님께 받습니다. 율법만 받은 것이 아니라 천지창조와 선악과와 생명나무와 타락과 추방의 모든 내용들도 모세가 하나님께 계시를 받아서 전함으로 인간이 왜 죽게 되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아담 안에서 모두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고 죄를 사하여 주시는 분이심을 지난주에 본 중풍병자를 통하여 보여주시고 오늘은 세리인 레위를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이어지는 15~16절입니다.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 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아담 안에서는 심판과 정죄를 받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보여주시는 장면이 오늘 세리를 불러서 제자를 삼는 사건을 통하여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평소에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영 못 마땅한 것입니다. 병을 고치고 말씀을 전하시는 것을 보면 선지자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서 비난을 하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듯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비난은 방금 인용한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자를 다 잡아 죽이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습니다. 그 정도로 율법에 열심이었던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율법의 의를 세우려고 한 것이 십자가의 원수였음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자랑할 수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됩니다.

 

사무엘하 9:6~8절입니다. “6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8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되었다면 사울 집안의 씨를 말려야 반역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을 세웠기 때문에 요나단의 아들을 찾아서 왕의 식탁에 앉히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전쟁 중에 유모가 안고 도망가다가 떨어뜨려서 발을 절게 된 장애인입니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왕께서 죽은 개와 같은 나를 돌아보시느냐고 합니다. 다윗이 원수처럼 멸하여도 마땅하지만 오히려 왕의 식탁에 앉게 한 것은 왕의 가족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의 혜택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병자들과 죄인들을 불러서 왕의 식탁에 초대한 것입니다.

 

사람이 잔치를 하면 어떤 사람들이 오는가를 보면 그 잔치를 연 사람의 수준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잔치를 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올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부자가 잔치를 하면 그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도 비슷한 사람들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잔치에 모인 자들이 병든 자들과 죄인들과 세리들과 창기들이 모였습니다. 누가 봐도 멸시받을 만한 잔치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자신이 죽은 개와 같고 죄인인줄 아는 자들에게는 이 잔치야 말로 인애를 베푸시는 왕의 잔치임을 압니다.

 

고린도전서 1:26~29절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바울사도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도를 전합니다. 그 십자가의 도를 받아서 모인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나아가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떳떳하게 나가고 싶은 것입니다. 많은 선물보따리를 들고 가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들도 남의 집에 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갖추고 인사를 하라는 의미도 되지만 빈손으로 가면 멸시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존심들을 하나님 앞에서도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는 자신들이 잘난 사람이라고 여기거나 잘나고 싶은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고 합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의인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는 이유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멀리 다녀왔습니다.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만나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가정교회 1세대들은 오직 성경 하나를 들고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혼자서 수십 곳의 가정교회를 돌보면서 자기의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제는 가정교회 지도자들의 2세들이 대를 이어 돌보지만 경제의 성장과 함께 유혹들이 계속됩니다. 세상에 내세울만한 신학교의 졸업장이나 외국 유학이나 교회성장 프로그램에 눈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멀어진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1세대 지도자들은 근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자들에 의하여 말씀이 증거 되고 있습니다. 그 얼굴에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무한 영광을 함께 찬송했습니다.

 

이어지는 30~31절을 봅니다.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우리가 죄인이든 세리이든 창기이든 주님께서 부르시면 우리는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난 증거이며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부름을 받은 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이 복된 소식이 됩니다.

 

디모데전서 1:15~17절입니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기에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죄인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이런 자들은 더욱 의와 희락과 평강의 그 나라를 사모하게 됩니다. 이 은혜와 소망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용서 받은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