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29~39 해 질 때에 2018. 9. 16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지난주에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귀신이 한 말입니다. 귀신은 자신의 운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인하여 멸망할 것을 압니다. 이러한 귀신들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요즈음 현대인들을 무슨 귀신이야기냐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조차 예수님께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책망을 받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알려주심으로 주는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고 난 후에 받는 책망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신 후에 예수님께서 비로소 자신의 고난과 죽으심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립니다.

 

마태복음 16:23~25절입니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삼년이나 따라다니며 말씀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아직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신다는 말씀에 말리고 나섰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내시는데 베드로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방식으로 성공하는 메시아를 꿈꾼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바로 사람의 생각이며 이러한 사람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는 자가 사탄이며 귀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우리가 스스로 자기를 살리려고 하면서 자기주장을 하는 모든 일들이 이 세상의 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모습입니다.

 

에베소서 2:1~3절입니다.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1)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공중 권세 잡은 자를 성경에서는 용, 옛 뱀, 사탄, 바다의 짐승 땅의 짐승이라고 합니다. 귀신은 이런 사탄의 졸개들입니다. 이들이 사람들을 사로잡은 특징은 이 세상 풍조를 따르게 합니다. 이 세상의 풍조란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행하면서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마다 자기들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취미생활이 있습니다. 이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 중에 하나가 종교입니다. 각자의 취향을 따라 종교 생활하는 것도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기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진짜 주인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자 자신이 주인인줄 알고 살아가는 자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발작을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3:4~8절입니다.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1)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지난 주 오후에 이 말씀을 다시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주 오전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내용을 보았는데 청년회 시간에 상관에 대한 말이 다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가 되셨기에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하시면서 하시는 일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자신의 발을 씻기지 못하게 합니다.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겨 드려야지 어떻게 스승이 제자를 발을 씻기시느냐고 거절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너의 발을 씻겨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상관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로 사용되지만 누가복음 15:24절에서 분깃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둘째 아들이 달라고 하는 단어가 상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내가 너의 발을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이 너에게는 하늘나라의 유업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4:16절에서는 지체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회란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그 한 머리에 붙어있는 지체를 교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은 너는 나의 몸이 아니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상관이 없다는 말은 구원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상관하지 않는 것은 곧 버려둠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9~11절입니다.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베드로가 깜짝 놀라서 발만 아니라 온 몸을 다 씻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어도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도 죽을 때 까지 예수님의 씻기심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도 성화도 십자가에서 넘쳐 나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어거스틴도 칼뱅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는 아니라고 합니다. 다는 아니라고 한 그 한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려고 나가는데 예수님은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하라고 내 버려두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끝까지 상관하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상관하심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시고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상관하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29~3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나와서 곧 제자들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베드로가 장모를 모시고 산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을 듭니다. 이런 치유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열병으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자를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바로 일어나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섬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침을 받기 전에는 자기 몸도 몸 가눈 여인이 고침을 받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바로 섬긴 것입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손이 어떤 손인지를 보여줍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심판과 구원을 오른손이 하신다고 합니다(15:6, 17:7, 18:35).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여인을 손을 잡아서 일으키시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심도 보여줍니다(8:3). 주님의 손이 가면 병든 자가 살아나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손길로 새로운 창조를 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침은 아직도 부분적이며 그림자로서 온전한 고침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길은 자신의 죽으심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을 앞으로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 모습은 주님이 피조물을 섬겨주시는 모습이며 그 섬김을 받은 자가 주님과 제자들을 섬기는 것도 보여줍니다.

 

32~34절입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인 것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해 질 때에입니다. 밝을 때에 오지 않고 왜 해가 저물어 어두워 질 때에 사람들이 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온 것일까요? 안식일에는 일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안식일에 노동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동이 무엇인지 유대인들이 수많은 부칙을 만들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고 합니다. 안식일 날 회당에 왔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을 보고 소문을 낸 것입니다. 그러면 병자나 귀신 들린 자를 예수님께로 데려가야 하는데 안식일 법 때문에 못간 것입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해 질 때부터 토요일 해 질 때까지입니다. 그러니 저물어 해 질 때에 환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거침없이 일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서 안식일에 거침없이 일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의 날짜에 묶여서 예수님께 오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저물어 해가 지니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안식일과 모든 날과 달과 절기와 율법도 예수님 앞에 저물어 지는 것입니다. 해가 저물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께 데려오니 그동안 병으로 귀신 들림으로 잠시도 쉬지 못한 자들이 예수님의 고침을 받고 안식을 맛보게 됩니다. 그림자인 안식일이 저물어지고 참된 안식이 주어지는 현장입니다. 이러한 안식을 베드로의 장모에게도 또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로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나의 자아, 가치관, 자기주장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자기 스스로 예수님께 갈 수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것은 누가 데리고 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원해서 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으로 인도되든지 사람에게 끌려오든지 간에 주님께서 부르시는 자들은 예수님께로 오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나아온 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보고서 오늘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병 고침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은 자들도 다 죽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 예수님은 자신의 말과 사역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세력들을 몰아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의 완성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지기 전 까지는 예수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동네사람들이 소문을 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낸다는 이 말을 못하게 하신 걸까요? 유대인들은 다 메시아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전부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정치적이고 종교적이며 경제적이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메시아는 상상도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잘못된 메시아사상으로 따라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아무 말도 못하게 한 것입니다.

 

35절입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십니다. 저물어 해질 때에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새벽이 왔습니다.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님은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아무리 바쁜 사역이 있어도 조용한 시간을 내어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기도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늘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러 가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따라갑니다.

 

36~39절입니다. 새벽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서 무엇을 말합니까? 같이 조용히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는다고 합니다. 어제 저녁이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니 자연히 온 동네에 소문이 난 것입니다. 그러니 새벽부터 사람들이 시몬의 집 앞으로 몰려왔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어떤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대업을 이루시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자를 만나러 가신 것이 아니라 다른 마을로 가신 것입니다. 거기서도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예수님은 전도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전도는 사람을 모아서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힘을 추구하는 자들로부터 피하여 가십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우리의 힘을 빼는 것입니다. 힘을 빼고 빼서 십자가로 다 이루심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해가 저물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이 역사도 저물어 집니다. 우리도 하루하루 저물어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일하심의 세계 안에 있는 자가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의 문이 닫히기 전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어야 합니다. 이 역사가 저물기 전에 오래 참고 계시는 주님께로 돌이키라는 회개의 선포가 들리고 그래서 돌이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백성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전도가 오늘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