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17~18 죽어도 기쁜 일 2018. 3. 25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오늘 읽은 짧은 본문에서 기뻐한다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빌립보서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이 기뻐하고 있으니 너희도 기뻐하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너희 믿음과 제물과 섬김 위에 자신을 전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한다고 합니다. 전제(奠祭)란 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29:40,23:13). 그런데 이런 전제는 다른 번제와 곁들여 드리는 제물입니다(28~29). 그렇다면 이 말은 자신이 포도주처럼 부어지는 제물이 되어도 기뻐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어도 기뻐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좋을 만큼 기쁜 일이 있습니까? 우리의 말에 죽는다는 표현이 참 많습니다. 배가 고파서 죽겠다고 합니다. 괴로워서 죽겠다고 합니다. 외로워서 죽겠다고 합니다. 미워서 죽겠다고 합니다. 화가 나서 죽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배가 불러서 죽겠다는 말도 합니다. 기뻐서 죽겠다는 말도 합니다. 좋아서 죽겠다는 말도 합니다. 보고 싶어서 죽겠다는 말도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죽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모두가 자기의 가치판단을 따른 자기중심적인 감정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자기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주인인체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주인 됨이 무너지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나의 이익이나 나의 기분이나 나의 감정을 중심으로 가치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로마서 14:7~11절입니다.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1)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한 성령이 임하여 한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서로 비판하고 판단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어서 무엇을 먹지 못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있다고 하는 자가 먹지 못하는 자를 판단합니다. 이러한 판단을 하는 것이 아직 옛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성령을 받아 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약한 형제를 업신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지 않고 아직도 자기가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엇을 기뻐하는지, 죽어도 좋을 만큼 기쁜 일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새 번역으로 다시 봅니다. “17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의 제사와 예배에 나의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하겠습니다. 18 여러분도 이와 같이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공동번역입니다. “17 여러분이 바치는 믿음의 제사와 제물을 위해서라면 나는 그 위에 내 피라도 쏟아 부을 것이며 그것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18 그러니 여러분도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다른 번역으로 보는 이유는 오늘 본문 17절에서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이라는 표현과 전제라는 표현 때문에 봅니다. 이 표현을 새 번역은 믿음의 제사와 예배’ ‘내 피를 붓는 일로 번역합니다. 공동번역은 믿음의 제사와 제물’ ‘네 피라도 부을 것이라고 합니다. 공동번역은 한국의 개신교와 가톨릭이 함께 번역했다가 지금은 가톨릭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이 번역처럼 아직도 제사를 드리는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개신교는 제사와 예배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제사입니까? 예배입니까? 어떤 분은 예배라는 용어도 잘 사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만 우리가 구약성경을 같이 보고 있기에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 구약의 제사적인 개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강단(講壇)을 제단(祭壇)이라고 합니다. 개신교는 설교하는 자리를 강단이라고 하지만 가톨릭은 미사 드리는 자리를 제단이라고 합니다. 새벽기도를 새벽제단을 쌓는다고 합니다. 구약의 제사를 드리는 곳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완성을 전하는 바울이 왜 제물과 전제라는 제사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히브리서 10:1~18절입니다. 봉독 구약의 제사로는 아무것도 온전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없이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율법으로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율법을 왜 주셨으며 이런 제사제도를 왜 주셨습니까? 이런 것들은 장래 나타날 일들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한 영원한 제사로 자기 백성을 의롭게 하신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습니다. 구약 제사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지 제사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제사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까? 김세윤 교수는 문자적인 제사가 아니라 그림언어라고 합니다. 제사라는 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헌신과 봉사를 하는 것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은 그림언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바울을 위하여 후원을 하면서 동역하는 이런 것들을 제사적인 용어로 사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제사적인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구약의 제사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2절입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1)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많이들은 말씀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각주를 보면 합당한 예배입니다. 우리의 합당한 예배라는 것은 2절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 세대가 어떤 세대입니까? 아담 때나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이라는 곳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아갑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이생의 자랑이 될 것을 추구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세대를 본 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제사 드리듯이 정성을 다하여 드리고 거기다가 일천 번제까지 드리면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곳이 오늘날 교회라는 곳이 되어버린 현실입니다.

 

이런 교회는 세상이기에 이런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 영적인 예배이며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제사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구약의 문자적인 제사가 아닙니다. 새 언약의 백성이 되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지는 3~13절을 보면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서로 봉사하면서 사랑하고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합니다. 열심히 주를 섬기는 모습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난 중에 참고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 손 대접하기를 힘쓰는 이런 일들이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4~21절을 봅니다.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여기에 구약적인 제사의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도의 삶을 바울은 산 제물이라고 하고 영적인 예배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4:17~18절입니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립보 교회에서 바울에게 연보한 것을 바울은 구약적인 언어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다시 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너희 믿음의 제물과 예배가 무엇인지 말씀드리기 위하여 이렇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제물이라고 하여 구약의 제사적인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속죄가 일어난 성도들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27절 상 반절을 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립보 교회가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믿음의 제물과 섬김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말씀들을 보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외부의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박해가 오는 것은 너희에게 구원의 증거가 되지만 그렇게 박해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증거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들을 조금 더 살펴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무슨 교제, 긍휼과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울의 기쁨이 충만하여 지는 것이지만 동시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제물이며 예배이며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본 말씀은 생명의 말씀을 밝힌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생명과 썩지 아니할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썩는 양식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지 아는 사람입니다. 전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할 때에 그는 얼마나 철저하게 제사를 드렸겠습니까? 그런데 그 결과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시려고 바울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사도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복음으로 인하여 기쁘고 이 복음을 전하면서 기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의 제물과 섬김 위에 자신이 포도주처럼 부어지는 제물이 되어도 기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히브리서에서도 살펴보았습니다만 하나님은 율법을 따라 드리는 황소와 짐승의 피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친히 주시는 분이십니다(17:25).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하시고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시기 위하여 대속 물로 오셨습니다(20:28).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섬김을 받은 자들끼리 한 몸이기에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것을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받아주셨다는 것은 용서하시고 사랑하셔서 받아주신 것입니다. 수요일 저녁에도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아벨도 아담의 타락 이후에 태어난 인간이기에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아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받아주신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왜 자기의 것을 받아 주지 않느냐는 분노가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분은 오직 흠도 점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 구원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던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선포하는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어떠함으로 오는 세대에 나타내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말을 바울이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복음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서 너무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의 열매들을 보면서 그 위에 자신이 전제로 부어져도 기쁘다고 합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습니다만 전제(奠祭)라는 것은 단독적인 제물로 드려지기 보다는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릴 때에 곁들여 드려지는 제물입니다. 그러니 지금 바울은 자신이 주도적인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주님께 드려지는 그 일에 자신이 함께 제물로 드려지는 일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죽음을 말합니다. 자신이 죽어도 기쁘다고 합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인하여 감옥에 있다가 앞으로 죽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과 상관없이 복음이 전파되고 믿는 자들이 나오고 그 믿는 자들이 서로 섬기는 일들을 보면서 기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기뻐하면서 살아갑니까? 나이가 들면 늙어집니다. 몸도 약해집니다. 내가 기대한 것도 무너져 내립니다. 성경은 인간을 하루살이 같다고 합니다. 안개와 같고 입김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고 합니다. 이런 인생들이 무엇으로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세상에서 무엇으로 기뻐하겠습니까? 바울사도는 죽어도 좋다는 기쁨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좋다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죽기를 소원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 중에 얼굴과 얼굴로 뵙기를 소원하는 기쁨입니다. 베드로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여도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벧전1:8). 우리가 동일한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됩니다.

 

아가서 8:6~7절입니다. “6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많은 물로 끌 수 없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합니다. 이 사랑을 돈을 주고 바꾸려고 한다면 오히려 멸시를 받을 것입니다. 이 사랑은 세상의 가치로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어 있을 때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기 사랑을 확증하시고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받은 자는 이제 그 사랑하신 분을 위하여 죽어도 기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러한 믿음의 제물과 섬김이 나오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뻐서 나도 여러분의 그 제물과 섬김 곧 믿음의 삶 위에 자신이 전제처럼 부어지더라도 기뻐하겠다고 합니다. 죽음보다 더한 기쁨의 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맛보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