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6~20 부르심과 목적 2018. 9. 2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내가 스스로 온 것입니까? 주님의 부르심으로 모인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면 우리는 스스로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으로 온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왔다거나 잘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은 그냥 쉬시기 바랍니다. 오래된 습관이나 사람의 눈치 때문에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에 말씀을 듣기 위하여 오신다면 말릴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지 않으면 왜 내가 교회당으로 이렇게 모여야 하는지 늘 생각하면서 오시든지 쉬시든지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잡히심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오십니다. 지난주에 본 대로 갈릴리로 오신 것도 성령의 능력이라고 합니다(4:14). 또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입니다(9:1~2).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본문 16~17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십니다. 갈릴리 호수인데 바다라고 하는 것은 커서 그런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에게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19~20절입니다.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신 후에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십니다. 그들도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갑니다. 시몬 곧 베드로와 안드레가 형제이고 야고보와 형제가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부르시자 배와 그물과 그 아버지와 품꾼들을 다 버려두고 곧 따라 나섭니다. 다른 복음서는 그 전에 예수님에 대한 정보가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만 마가는 그런 내용들 다 생략하고 예수님의 부르심과 즉각적인 응답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보려고 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나 야고보와 그 형 요한이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제자나 목사나 선교사로 부름 받으려고 한 시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 사명을 가진 적이 없이 대를 이어 가업인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어부들입니다. 자신의 배가 있다면 상당한 재산이 있는 집입니다. 바닷가에 사는 분들은 알겠지만 자기 배가 있다는 것은 그 당시에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심지어 아버지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곧 따라 나선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은 결단과 결심입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입니까?

 

저에게 어떤 분이 문자로 질문이 왔습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병자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오늘도 병자를 고쳐주는 내용으로 설교를 들었다고 하면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답변하기를 베데스다란 자비의 집이라는 뜻인데 자비의 집, 그것도 안식일에 자비도 없고 안식도 없는 유다의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따라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지만 안식이 없는 곳에서 예수님은 안식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려고 안식일에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한복음 5:6~10절입니다.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 이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줄 알았다면 네 제가 낫고 싶습니다. 저를 고쳐주소서! 이렇게 말했을 텐데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기에 물이 움직일 때에 자기를 넣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이 사람이 38년 동안 걸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 자체의 능력입니까?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빛이 있으라고 하시면 빛이 생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일에는 그 말씀으로만 재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자신의 살과 피를 십자가로 나누어주시는 방식으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행하심으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행위를 보고 율법의 의를 가진 자들은 안식일을 어긴다고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요한복음 6:11~18절을 보면 안식일에 병 고침을 받은 후에 자기 침상을 들고 가니 유대인들이 왜 안식일에 짐을 들고 가느냐고 묻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줄 모르기에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고 대답을 합니다. 유대인들이 그가 누구냐고 묻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자리를 피하신 것입니다. 그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만나서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를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 일이 무엇일까요?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자기를 고쳐준 분이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한다고 하여 예수님을 박해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으로 죽이려고 합니다. 이 정도로 예수님을 모릅니다.

 

38년 된 병자의 고침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과 연결하여 보기 위한 것입니다. 평생토록 고기를 잡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곧 배와 그물과 아버지와 품꾼조차 버려두고 곧 예수님을 따라간 것입니다. 유대사회는 제자가 스승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르심은 제자들의 결심과 결단이 아니라 이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의 능력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따라가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누가 서로 높으냐며 경쟁하면서 따라갑니다.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들이 무너지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다들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갑니다. 예수님을 저주맹세하면서 부인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부르신 이들을 원래의 부르심의 목적인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 한 사람은 배신자를 부르십니다. 배신할 자 인줄 알고 부르신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간 사람입니다만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고 제자로 따라가는 것도 역시 전적인 주님의 주님 되심의 능력이며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로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낚는 어부라는 말이 유대인들에게는 심판의 소식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자는 말씀으로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여 교회로 모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온갖 전도방법론이 동원이 됩니다. 우리나라의 제일 많은 취미가 낚시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낚시만 방송하는 프로그램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낚시 기술이 얼마나 다양한지 보통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어부를 택하셔서 사람 낚는 어부를 삼으셨기에 사람을 전도하는 테크닉이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처음 전도사 한 곳이 광안리 바닷가 인애교회입니다. 교인들 중에 배를 가지고 고기를 잡는 가정이 몇 가정이나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사람 사귀는 기술이 없습니다. 손은 억세고 말은 무뚝뚝합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전도하는 일에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낚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예레미야 16:16~17절입니다. “1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 17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기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하나님께서 범죄 한 유다를 심판하시는 도구로 바벨론을 보내시는데 그 바벨론이 유다를 잡아가는 것을 어부가 물고기를 낚아 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짐승을 사냥하는 포수로도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사람을 낚는 다는 말을 좋게 볼 수가 없습니다.

 

에스겔 29:2~5절입니다. “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과 온 애굽으로 얼굴을 향하고 예언하라 3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4 내가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너의 강의 고기가 네 비늘에 붙게 하고 네 비늘에 붙은 강의 모든 고기와 함께 너를 너의 강들 가운데에서 끌어내고 5 너와 너의 강의 모든 고기를 들에 던지리니 네가 지면에 떨어지고 다시는 거두거나 모으지 못할 것은 내가 너를 들짐승과 공중의 새의 먹이로 주었음이라

 

유대 백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러자 유다 백성들이 애굽을 의지하고 애굽으로 피난 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 왕이 나일 강을 자기가 만들었다고 교만을 떨기에 바로 왕을 악어로 비유하여 갈고리로 아가미를 꿰서 끌어내고 강의 물고기들 곧 용사들도 그 비늘에 붙게 하여 들에 던져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들짐승과 새의 먹이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낚시의 이야기는 심판의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러면 왜 애굽을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이어지는 6~16절을 보면 유다가 애굽을 의지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애굽은 갈대 지팡이라고 합니다. 의지하려고 손으로 잡으면 그것이 부러져서 어깨를 찢고 모든 허리가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애굽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애굽을 미약하게 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이 세상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 더 이상 세상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방법이 낚시로 바로 왕과 그 신하들을 광야로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아모스 4:1~2절입니다. “1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아모스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의 심판을 말하면서도 사람을 갈고리로 잡아 끌어가는 것을 낚시로 잡아가는 것으로 말합니다. 실제로 앗수르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갈 때에 갈고리와 낚시로 사람의 코를 꿰어서 잡아갔답니다.

 

하박국 1:13~17절을 보면 하박국 선지자가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의 내용이 악하고 강한 나라들이 약한 나라들을 침략하고 더구나 이스라엘을 침략하는데 그 침략을 낚시와 그물질로 말합니다. 그물로 사람을 잡는 것은 우리도 시대극을 보면 나옵니다. 그런데 갈고리와 낚시 같은 것으로 사람을 물고기를 꿰듯이 잡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합니다. 우리가 살펴본 구약의 모든 낚시의 개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용되거나 이방 나라에 대하여 사용되거나 간에 심판의 소식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소식인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는 것은 복음이 심판의 소식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심판이 없는 복음은 없습니다. 심판이 얼마나 엄중하며 두려운지를 알아야 복음의 복음 됨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고 제자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시는 것은 이 세상이 바다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바다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람을 낚는 어부 입니다. 그러면 물고기로 비유되는 사람은 어떤 형편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가 없는데 어느 날 낚시에 걸려 물 밖으로 끌려가면 물고기 입장에서 보면 저주 받은 모습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렸더니 어떤 청년이 이 세상을 바다와 같다고 한 내용이 성경에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바다에 대하여 검색을 해 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바다에 대하여 304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바다를 인격화 하는 곳과 바다에 무엇이 있는지 몇 곳 보겠습니다.

 

이사야 57:19~21절입니다. “19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20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는 자에게는 평강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평온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에게 평강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고쳐주시지 않으시고 그대로 버려두신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바다로 표현합니다.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다고 합니다. 바다가 잔잔한 것이 아니라 요동을 칩니다. 그러면 온갖 더러운 것이 다 솟구쳐 오르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다는 결국 하나님의 고침을 받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이 세상이 늘 요동치는 바다와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26:20~27:1절입니다. “20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21 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덮지 아니하리라 27:1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는데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을 드러내십니다. 그런 날에 구원 받는 자는 밀실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밀실, 은밀한 곳은 특정한 사람이 말하는 특정한 장소나 교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날에 온 세상의 악을 들추어내십니다. 그 심판의 날에 바다의 용이 죽임을 당한다고 합니다. 용의 별명이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이라고 합니다. 이 용이 사는 곳이 이 세상 전체를 말합니다.

 

유다서 1:12~13절입니다. “12 그들은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3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거짓 선생들을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특징으로 거짓 선생들의 모습을 말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마치 어부가 낚시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구약에서 살펴본 대로 사람을 갈고리와 낚시로 꿰어 가는 것은 심판의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미끼를 던져서 교회로 사람을 많이 모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심판이 왔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전체가 교만과 요란함과 수치의 거품을 뿜어내는 멸망당할 바다라는 것입니다. 경제를 말하고, 통일과 세계 평화를 말해는 사람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리끼는 소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도 복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낚아 내셔서 바다가 없는 곳에 넣어주십니다.

 

요한계시록 21:1절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새 하늘과 새 땅에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습니다. 바다도 다시 있지 않다고 합니다. 바다라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오늘 보았습니다. 교만, 수치, 요동침, , 리워야단, 용으로 표현되는 이 모든 악과 대적들이 완전히 사라진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런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복음의 낚시에 걸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끌려가기에 세상을 떠나는 아픔이 있지만 이 아픔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소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