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8:16~20 항상 함께 있으리라 2017.12.17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2)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시작한 날이 201461일 이었습니다. 36개월에 걸쳐서 마태복음을 보았습니다. 오늘이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하면 뭐 남은 게 있습니까?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이 우리 영의 양식이라면 먹고 소화가 되어 영적인 살이 되고 피가 되었으면 된 것입니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다 흘러내리듯이 보여도 자랍니다. 콩나물은 자라는 것이 보이는데 자라기는커녕 오히려 더 못한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9:9~13절입니다.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마태라는 세리를 부르십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와 함께 식사를 하시는 자리에 다른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합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너희 선생이 어찌 부정한 자들과 음식을 먹느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을 부르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을 호세아서를 인용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을 데려와서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멜을 데리고 와서 자식을 낳았는데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짓게 합니다. 이스라엘을 흩어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시 아들을 낳았는데 로루하마라고 짓게 합니다.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세 번째 아들은 로암미라고 짓게 합니다. 내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식들을 낳은 고멜조차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갑니다. 호세아가 값을 주고 데리고 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의 결론부분이 예수님이 인용하신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 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6,7장의 산상수훈을 통하여 장로들의 유전으로 해석된 율법을 지킨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그렇게 들었지만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통하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속 모습이 다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게 산상수훈을 통하여 주의 백성이라면 우리의 속이 다 드러나기에 자신이 전적으로 부정한 자임을 알게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레위기에의 정결규례의 의하면 나병을 진단할 때에 온 전신이 나병이 발하면 정하다고 제사장이 선포를 합니다(13:13). 이것은 해석이 안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산상수훈 후에 제일 먼저 치료받는 사람이 나병환자임을 볼 때에 해석이 되었습니다. 이 두 곳의 말씀만이라도 기억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입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렀습니다. 지난주에 본 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기 전에도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말씀을 하셨고 부활 후에는 천사도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자는 말씀을 전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갈릴리에 가야 하는지는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처음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하여 가시는데 제자들은 높아지고 성공하려고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실패합니다. 이런 제자들을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완전한 절망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17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서 경배를 합니다만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합니다. 이들은 너무 놀라서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인지 의아해 한 것입니다. 마치 도마와 같이 부활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에게 자신을 확인시켜주셨습니다. 그러한 내용들을 마태복음은 생략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18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아와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 왕으로 소개합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는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와서는 이스라엘에 왕이 태어났다고 헤롯 궁에 찾아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의 왕으로 출발을 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왕을 배척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기간동안 천국복음을 전하시고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합니다. 많은 무리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환영하였지만 산헤드린 공회는 이미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예수를 죽이기는 하되 민란을 우려하여 유월절에는 죽이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륫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김으로 급속하게 일이 진행되어 유월절 전날에 잡히시고 처형당하십니다. 죽이는 자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넘겨지시는 분이 죽으시는 날짜도 결정하시고 그 십자가에서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다 이루시는 죽음임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천사들도 몰랐습니다. 당연히 마귀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예수님께 일임이 된 것입니다. 그의 인자되심과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것입니다. 물론 그의 죽으심 이전에도 이미 인자됨을 인하여 하나님은 예수님께 생명을 줄자에게 생명을 주고 심판할 자를 심판할 권세를 주셨습니다(5:21,27). 이러한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권세를 예수님이 가지시게 된 것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이 되었습니다.

 

다니엘 7:13~14,17절입니다. “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 네 큰 짐승은 세상에 일어날 네 왕이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네 짐승의 환상을 본 것입니다. 이것은 다니엘서 2장에서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잊어버린 내용을 다니엘이 알고 해석해주는 것과 반복이 됩니다. 거대한 신상의 머리는 금, 그 밑은 은, 그 밑은 동, 그 밑은 철과 진흙으로 된 신상이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은 뜨인 돌에 박살이 나고 그 뜨인 돌은 태산을 이루는 꿈이었습니다. 그 신상이나 네 짐승이 다 네 나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메데 바사, 알렉산더, 로마의 제국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국가를 사나운 짐승으로 봅니다. 세상의 국가들이 짐승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힘이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집어 삼킵니다. 그래서 세상은 지옥 같고 결국은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큰 신상의 끝과 네 짐승의 끝은 같은 때를 말합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등장을 합니다. 로마제국시대에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오신 것입니다. 그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지만 힘으로 세상을 이기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세상을 이기신 것입니다. 인자 같은 이라고 다니엘이 예언한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하십니다. 구약의 문자대로 예수님이 그 인자라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세상의 힘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메시아 왕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율법의 조문으로 성경을 본 것입니다. 모세의 수건이 가려져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시고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비로소 인자됨의 뜻을 압니다.

 

본문 19~20절입니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십자가 앞에서 실패한 제자들에게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이 사명을 받는 자들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의 사명을 받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어떻게 복음을 전하게 되겠습니까?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의 능력을 가지고 지배하고 다스리고 군림하는 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희생하신 그 길로 가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자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가지고 한국에서는 제자훈련이라는 말로 교회 성장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제자훈련이 서울 사랑의 교회 고 옥한흠 목사의 평신도를 깨운다는 책과 수많은 성경교재들입니다. 제가 부목사로 사역한 곳에서도 구역 공부 교재로 제자훈련원에서 나오는 다락방교제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앞 다투어 이 교재로 공부를 하고 제자훈련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 위하여 이렇게 하였을까요? 아니면 우리도 제자훈련하면 사랑의 교회처럼 부흥한다고 했겠습니까?

 

제자훈련을 목숨 걸고 실천한 옥 목사가 은퇴하고 현재의 오 목사가 담임으로 오고 나서 좀 삐걱거렸습니다. 그럴 즈음에 은퇴 목사가 모든 교역자를 모아놓고 훈계한 내용을 어느 권사가 녹음하여 올려놓은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목사 정도 되면 구역교안을 대충 봐도 구역장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굉장히 혼을 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미 아는 교안이라도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면 성령의 역사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였는데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그것이 이상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도 내 하기 나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만든 제자훈련의 한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고 가르쳐 지키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다시 19~20절을 봅니다. 모든 민족으로 제자로 삼으라고 합니다. 유대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서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8절을 보면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의지입니다. 우리가 제자가 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태복음의 이 말씀도 예수님의 의지이며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십니다. 이 말씀이 왜 예수님의 의지로 이루어내시는 것인지는 사도행전에 보면 잘 나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났지만 그들은 흩어질 줄 몰랐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인하여 큰 핍박이 일어나자 하는 수 없이 흩어집니다. 유다로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니 사마리아 사람들도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서 확인을 합니다. 어떻게 개같이 여기는 사마리아인들이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느냐고 하여 간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지 못한다고 하였지만 주께서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밀어붙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방인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니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제자들이 순종하여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시기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제자들을 통하여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도 복음이 증거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이 일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이 된 자들은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성령의 일임을 증거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제자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시는 결과로 제자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으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으로 제자 훈련하여 교회 성장시키겠다고 나온다면 이미 예수님의 뜻과 다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제자훈련을 시킵니다. 교회도 제자훈련을 시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삼년 동안 합숙훈련하면서 제자훈련 시킨 제자들이 십자가 앞에서 한 명도 남지 않고 다 배신하고 도망갔습니다. 지금도 한국교회에 온갖 교회 성장 프로그램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 프로그램들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어냅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회 성장을 만들어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제자들이 어떻게 제자를 삼고 가르칩니까? 성령이 임하고 나니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복음을 전합니다. 얼마나 반대와 핍박이 심하였겠습니까? 그런데도 회개하고 믿는 자들이 나왔습니다. 이들이 제자가 되고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제자 훈련 프로그램이 아니라 주의 성령이 임하여 복음의 선포로 인하여 제자가 되고 이 제자는 또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님께서 친히 이루십니다.

 

그 근거가 20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보라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이 말씀입니다.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예수님이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한다는 이 말씀은 사도들만이 아니라 사도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일하심으로 되는 것이며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도 예수님의 일하시고 함께 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반드시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자기를 부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신 그 희생과 죽음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 제자들이 가는 길입니다.

 

기독신문에 장차남 목사의 목회성찰이라는 책의 소개가 나왔습니다. 저자의 말입니다. “목회의 기본은 희생인데, 나는 발전과 성취를 택했다. 내가 목회를 하던 시대에 한국교회가 크게 부흥한 것에 자긍심이 있다. 그러나 발전과 성취를 추구했던 한계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침체를 불러왔다는 자책감을 갖고 있다비교적 바른 목회를 했다는 평을 받고 총회장도 지낸 사람이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의 침체란 발전과 성취를 택한 것이라는 자책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잘 살아보자는 새마을 운동을 할 때에 교회도 덩달아 세상의 시류를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부흥회를 다 했습니다. 제가 청년 때에 부산의 초량교회에서 부흥회하는 곳에 일이 있어 갔다가 참석을 했습니다. 마지막 날인데 신과 거래하는 현장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1억 이상 할 사람 손들라고 하면서 헌금 작성서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교회만 성장하면 된다는 식의 번영신학, 은사주의가 본질을 벗어나도 묵인할 뿐 아니라 오히려 추구하면서 온 한국교회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대체적으로 교회 성장만 하면 다 허용이 되었기에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목회자의 야망의 종이 되었고 목자라는 자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맞습니까? 인간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든지 다른 복음을 듣든지 언제가 자기 좋은 쪽으로 취사선택하면서 살아갑니다. 종교시장에서 자기 원하는 것만 주워 담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말하는 곳에서도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취향 따라 골라 담아 갑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제자를 삼아 가르치고 지키는 것으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 분이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심으로만 제자가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성령을 통하여 그 다 이루심을 우리 안에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주셔서 우리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자신의 몸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제자도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빌립보서 2:5~8절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2)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3)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마음을 품으라는 사도의 이 말씀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며 이 말씀을 주님께서 이루어내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제자란 예수님께서 지금도 자기의 말씀을 이루어내신 결과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자신이 지키신다는 것이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이루어내셔서 자기 제자를 만들어 가십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약속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