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14~30 달란트 비유 2017. 8. 6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열 처녀 비유만이 아니라 오늘 보는 달란트 비유도 우리는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잘 안다고 해서 그 뜻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들어온 달란트 비유는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많은 상을 받자는 식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상급차등 론까지 나오는 것이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와 같은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말씀을 드리면 상급차등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상이 무엇입니까?

 

21절과 23절을 보면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으로 맡기겠다고 하시면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아서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두 달란트 받아서 두 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그 칭찬이 꼭 같습니다. 그것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 상입니다. 이 세상의 경제적인 원리를 따른 것이 결코 아닙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도 한 시간 일한 사람과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의 품삯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상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 상입니다. 그래서 칼뱅도 영생을 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천국을 지체되고 기다리는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그 이유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임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9:11절입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달란트 비유와 내용이 좀 다르지만 평행구절로 볼 수 있는 내용이 므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므나 비유나 열 처녀 비유나 오늘 보는 달란트 비유로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자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시기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기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당장에 임금으로 등극하는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9:12~13절입니다. “12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오려고 먼 나라로 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열 명의 종들에게 은화 열 므나를 주면서 내가 돌아올 때 까지 장사 하라고 합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도 신랑이 늦게 오기에 열 처녀가 다 졸며 잤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갑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유들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다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당장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수천 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4장을 보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이중적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나라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령이 임한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였는지 임하지 않았는지 본인은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된 자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기 마련입니다.

 

한국에 외국의 대사관들이 있습니다. 외국의 대사관들은 한국에 있을지라도 본국의 지시를 받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성령이 임하였다면 분명히 이 세상의 방식과 다른 통치를 받게 됩니다. 그 통치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일차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자들은 마지막 그 날에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은 자들은 마지막 그 날에 부활은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심판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린 것은 일차적으로 성령이 임하기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기까지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성령이 임하게 되자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였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라고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임하여 복음을 믿는 자들은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에 미리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제 본문 14절을 봅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에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다고 합니다. 조금 전에 누가복음 19장의 앞부분도 보았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때에는 유대인들은 누구나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배경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설교 때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헤롯왕이 죽을 때에 세 아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세 지역으로 나누어 다스리게 합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은 헤롯 아켈라오라는 아들에게 맡깁니다. 그런데 로마 황제의 인정을 받아야 정식으로 왕이 될 수 있기에 로마에 왕위를 추인받기 위하여 떠납니다. 조선시대 때에 이 나라의 왕도 중국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의 왕이 되는 것이 싫어서 로마 황제에게 서신을 보낸 것입니다. 이 당시에 로마에 가서 로비를 하고 황제의 추인을 받으려면 상당한 기간이 걸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헤롯 아켈라오가 왕위를 받아 온다고 믿는 사람들은 왕이 시키는 일을 잘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몰래 황제에게 서신을 보냈기에 아켈라오가 왕이 되지 못하면 그 왕이 맡긴 일에 충성할 이유가 없습니다. 괜히 충성하다가 다른 왕이 임명이 되면 충성한 사람은 미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이런 비유를 봅시다.

 

본문 15~18절입니다.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깁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두 사람은 바로 가서 장사하여 주신 것만큼 남겼지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둔 것입니다. 이 당시에 보물을 잘 감추어 두는 방법이기도 하였습니다. 므나 비유나 달란트 비유에서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지금 임금이 보이지 않아도 임금이 반드시 오실 것을 믿는 것과 그렇지 않는 차이입니다.

 

19절입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주인이 오랜 후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자들은 종말의 영이 임하였기에 정신을 차리고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원에 가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박한 종말을 생각하면서 일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자들을 향하여 바울사도는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살후3:10). 데살로니가 후서 2장에서 주의 날이 임박하였다고 해서 흔들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도 임박한 종말론으로 인하여 혼동들이 있었습니다.

 

20~23절입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을 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 더 가지고 와서 주인에게 아룁니다. 다섯 달란트 남겼다고 합니다. 두 달란트고 그렇게 보고합니다. 주인은 두 사람에게 동일하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겠다고 하시면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합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 종이 받는 상입니다. 종은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하는 자가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들에게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상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로 성경을 보려고 합니다. 내가 종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괜찮은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삽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기에 예수님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하였다면 그것으로 보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시간과 물질을 드리면 그만큼 보상이 따라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아직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종이라는 말씀은 노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노예가 무슨 자기 것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종이 이렇게 충성하여도 종이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다 가져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종이 주인의 일에 참여된 것 자체가 영광인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나 같은 종에게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께서 일을 다 맡겨주셨습니까? 이런 감격이 있습니까? 이런 감격은 정말로 용서 받은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습입니다. 긍휼을 입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미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이며 현세적으로 천국의 자녀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나중에 예수님이 오실 때에 내가 상을 많이 받아야지 하는 그런 경쟁심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지금 주인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이 자체가 상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섬김의 나라이기에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할 수 있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와 그 상에 참여한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24~30절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을 아주 무서운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내가 알았다고 합니다. 주인을 잘 못 알았습니다. 주인이 일을 맡긴 것은 일의 능률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마음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이 종은 주인을 오해한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주인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의 오심을 기쁨으로 기다리며 소망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행위의 여부에 따라 상과 벌을 생각하는 율법주의적인 시각입니다. 이런 자는 주인의 즐거움에 지금도 참여하지 못하고 나중에도 참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받은 자에게 주라고 합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지만 없는 자는 그 있는 것조차 빼앗길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마태복음 13:10~13절에도 나옵니다.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천국의 비밀을 아는 자만 알아듣게 하시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너희와 저희를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깨닫는 자들은 받아 넉넉하게 되지만 깨닫지 못하는 자는 그 있다고 생각한 것도 빼앗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가지고 자신들만이 바르게 비유를 풀이한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직접적인 비유만을 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비유로 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결국이 자기 단체의 교주를 증거 하는 비유풀이로 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성경대로 말하는 것 같고 기존의 교회들의 잘못 된 것들을 말하니 귀가 솔깃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듣고 따라가다 보면 결국 자기들의 총회장이라고 하는 사람만이 성경을 바르게 풀 수 있는 하나님의 종이기에 그 사람의 말을 들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이 다른 것이 이단(異端)입니다. 그러면 이 달란트 비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주인이 지금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멀리 갔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왕권을 가지시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자는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지난 주 열 처녀 비유에서처럼 이미 그 빙폐(聘幣)물을 받은 것입니다. 빙폐물이란 유대인이 결혼할 때에 남자가 처녀를 아내로 데려가기 위해 처녀의 아버지에게 주는 예물이나 돈을 말합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신부 삼기 위하여 빙폐 물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제 종이 아니라 그 사랑을 입은 자로서 다시 오실 신랑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두려움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읽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서도 나옵니다. 모세의 수건이 가려져 있다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달란트 비유를 읽을 때도 우리에게 모세의 수건이 가려져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율법적인 의무를 다 이행하느냐에 따라 상의 차이가 있다는 식으로 읽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비유에서 최종적인 결론은 영원히 갈라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갈라짐의 근거가 주인에 대하여 어떻게 알고 믿느냐는 것으로 갈라집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갈라지기 전에 오늘 우리의 모습을 이 말씀에 비추어 돌아보기를 소원합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 맞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를 들락거렸지만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님을 아시고 회개하고 정말 예수님을 나의 주와 그리스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이 역사 속에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그 기쁨을 맛보며 누리게 됩니다. 이것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일을 더 많이 하여 상을 많이 받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내가 더 낮아지고 더 많은 사람을 위하여 섬기며 희생하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이런 자들은 그 있는 은혜위에 더 풍성한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는 자는 받아 더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다고 생각한 것조차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은혜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는 것도 은혜입니다(2:11). 이러한 은혜를 입은 자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고 삽니다(4:16). 이뿐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성도에게 주실 은혜도 있습니다(벧전1:13). 그러므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 은혜이기에 구원도 은혜이며 지금 사는 것도 은혜이며 그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도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란트 비유를 은혜로 보지 않고 율법적인 행위에 따라 상급차등 론으로 읽는 사람이라면 아직도 모세의 수건이 가려진 시각으로 잃고 있는 것입니다.

 

디도서 2:11~14절입니다.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면 어떻게 살아가게 됩니까?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더 이상의 외형적이거나 민족적인 차별이 아니라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구원을 주시는 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임한 것은 이제부터 우리를 양육하시는 것입니다. 경건하지 않는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견함으로 이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바라보며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신 것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는 자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베드로전서 1:13~16절입니다.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곧 재림하실 때에 우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고 합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보증금이 주어진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두려움으로 살게 됩니다. 나그네라고 하여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자들이 아니라 분명한 본향을 향하여 가는 나그네입니다.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아갑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모습이 달란트 비유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로 살아가는 동안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것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베풀어주실 그 은혜, 그 놀라운 영광에 참여하는 그 은혜를 바라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육체의 시각으로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계심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성도는 분명히 알고 믿게 됩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와서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갈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 세상천지가 주의 손길과 눈길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헤아리시는 분이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주의 허락이 없으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시각으로 나의 삶을 보시고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범사가 주님 앞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며 두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이 빨리 오시든지 늦게 오시든지 언제나 주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이며 약속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깨어있으라고 하지 않아도 그 날을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