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69~75 베드로의 부인(否認) 2017. 10. 22

 

69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예수님이 죽는 자리에까지 함께 가겠다고 다짐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 번이나 부인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부인하여도 자신은 결코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맹세도 부질없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유대사회에서 배신자가 되면 평생토록 수치를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평생 수치를 안고 살아갈지라도 지금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로운 선택인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렇게 부인하게 되는 것도 실상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31~35절을 봅니다. “봉독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다 자신을 버리게 될 것을 스가랴서를 13:7절을 근거로 말씀하셨습니다. 목자를 치면 양의 떼가 흩어진다는 말씀을 하실 때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이 말씀의 뜻을 알아듣고서는 자신들은 목자이신 주님이 고난을 당하셔도 결코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버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베드로는 아직 자신이 어떠한 자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을 69~70절을 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재판을 받는 대제사장의 관저 바깥뜰에 앉았습니다. 추워서 불을 쬐며 둘러앉은 자리입니다. 그때 한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서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신은 예수와 아무른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첫 번째 부인을 하게 된 것은 대단히 권위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한 여종의 말에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을 하였습니다. 그 자리를 피하기 위하여 앞문까지 나갔습니다.

 

71~72절입니다.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합니다. 두 번째 부인은 맹세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함부로 맹세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맹세를 하면서 부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오늘 밤에 세 번이나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베드로가 생각이 났을까요?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잡혀서 수난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고 손으로 얼굴을 치는데도 아무른 대항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서 자기도 잡혀 죽겠다는 생각이 먼저이기에 여종과 사람들 앞에서 맹세하면서 부인을 한 것입니다.

 

73~75절입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두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데 이제는 그 곁에 선 사람들이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사람입니다. 자신이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하는 그 말투에 갈릴리 사투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다급하여지자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기를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저주하며 맹세한다는 것은 자기 저주입니다. 자기 저주의 맹세는 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이 저주의 맹세입니다(삼하3:9,35). 베드로가 얼마나 급하였으면 이런 맹세로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였겠습니까? 이러한 저주의 맹세를 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사람들은 더 이상 추궁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베드로를 어떻게 더 추궁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완벽하게 세 번에 걸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니 곧 닭이 울었습니다.

 

제가 전에 이 말씀을 드릴 때에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때 까지 닭이 울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닭이 울 때에 똑 같이 우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닭은 가끔씩 날이 새지도 않았는데 우는 닭도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닭들도 정신없이 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날이 새어갈 때에 시차는 좀 있지만 동시 다발적으로 닭이 울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베드로가 세 번을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 하신 그 말씀에 닭들도 순종한 것입니다. 천지 만물이 다 예수님을 위하여 지어진바 된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닭 울음소리 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2:60~62절입니다.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세 번 부인 하였을 때에 닭이 곧 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도 예수님의 말씀을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자신이 살기 위하여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 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하는데 닭 울음소리인들 제대로 들렸겠습니까?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는 것과 닭 울음소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61절을 보면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다른 번역을 보면 주님께서 몸을 돌이키시고 베드로를 똑 바로 보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눈길이 어떤 눈길이었을까요?

 

베드로 네 이놈! 네가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그렇게 장담 하고서는 결국 네가 세 번이나 나를 저주 맹세하면서 부인하느냐는 질책의 눈길이었을까요? 아니면 한없는 연민의 눈길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이미 온갖 조롱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시고, 사람들이 눈을 가리고 주먹으로 때리면서 네가 그리스도라면 누가 때렸는지 알아보라는 조롱을 당하신 그 예수님께서 몸을 돌이켜 베드로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저는 한없는 연민의 눈길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눈길을 보는 순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그 말씀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그 말씀이 생각이 났다면 이 순간이라도 달려가서 내가 예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지 못하였기에 거저 문 밖으로 나가서 통곡할 뿐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교인의 카스에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공개된 글이라서 그대로 소개합니다. “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자유, 그동안 참 힘이 들었다. 너무 무거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진리라는 짐을 지고, 내 것이라고 믿고, 내 것 이어야만 했기에 찾고 싶었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거룩한 옷을 입고, 온갖 형태의 행패를 부리며, 내가 좋아하는 노대통령의 말처럼 살아있는 것이 주위사람들에게 짐이 된다는 유서를 남길 수밖에 없었던 심정이 오늘에서야 확 내 가슴을 친다. 운명이다. 누구도 원망할 자격이 없음을, 내 본래의 자리죄인. . 먼지. 아파르. 이런 말을 쓰기에도 부끄러운.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자리로 자유하게 돌아간다. 이것이 나다. 진작 이럴 걸.”

 

제가 이 글을 보면서 진작 그러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데 제일 밑에 그 말이 있습니다. 이 분도 저를 처음 만났을 때에 아주 반가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좋아한다고 해도 저는 당신을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몇 분에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자신은 아니라고 의리를 지킨다고 하였습니다. 이 글을 설교에 인용한다고 말하면서 전화를 했는데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진작 그러지!’ 우리가 무엇을 지킨다고 하는 것들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들통 나는 과정이 힘이 들지만 이제 홀가분해 졌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제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리를 찾고 내 것으로 소유한다는 그런 생각 하지 않고 교회에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진작 그러지! 늘푸른교회에 무엇이 대단한 것이 있다고 찾아온 것입니까? 지난주에 늘푸른교회 5행시 장원을 뽑으라면 제 개인적으로는 3구역입니다. 운을 띄어주시겠습니까? “늘 푸른교회에 오면 좋을 줄 알았습니다. 푸 하하하 하하라. () 혜는커녕. 교 만만 늘었습니다. 회 개할 줄 알았지!” 늘푸른 교회 좋다고 왔는데 웃기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은혜는커녕 교만만 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구역은 대부분 끝에 회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 구역은 회개할 줄 알았지! 로 끝냅니다. 여기에 하나 더 붙이자면 메롱입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내용을 말씀드리면서 두 가지 우리 교인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의 실상이 이러함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늘푸른교회에서 복음이 선포되는 줄 알고 왔는데 거저 일반 교회나 다를 바 없이 목회를 하는 저의 모습에 실망하여 자신이 그동안 돌보지 못하였던 가족이나 사랑하면서 살겠다고 떠났습니다. ‘진작 그러지!’ 제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말씀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 맹세하고 부인하였는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22:31~34절입니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사탄이 시몬을 밀 까부르듯 하려 청구하였다고 합니다. 사탄이 베드로를 체질 하듯이 흔들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청구하였다고 합니다. 사탄이 누구에게 청구하였을까요? 하나님께 청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허락하십니까? 사탄이 아무리 흔들어도 내가 너를 놓지 않으면 너는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사탄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는데도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 맹세하며 부인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효력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시겠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기도효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줍니다. 세 번이나 저주 맹세하면서 부인하여도 예수님의 그 사랑을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사랑을 어디서 확인을 하게 됩니까? 자신이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닭이 울었다고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베드로를 바라보실 때에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이 났습니다. 그 한없는 연민과 긍휼의 눈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찬송가 1342절에서 그 사랑의 눈빛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전에 찬송가에서는 그 동정의 눈빛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후자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없는 연민과 동정과 체휼의 눈길을 베드로는 평생에 잊어버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죽기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한 맹세들조차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는 그 때에 주님의 눈길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그 자리가 인간으로는 끝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다 이루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베드로를 다시 찾아옵니다.

 

요한복음 21:15~18절입니다.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2)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었지만 베드로는 다시 물고기 잡으려고 갔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그렇게 물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처음에 물고기를 잡은 베드로와 제자들을 향하여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셨지만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나서는 자신은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여기고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을 때에 주님께서 오셔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듣고 그물을 던졌더니 물고기가 가득 잡혔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식사 후에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이제 자신이 어떤 자인지를 압니다. 자신은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십자가 앞에서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겨우 대답하는 말이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신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양을 먹일 수 있는 사도의 자격이 언제 주어지는 것입니까?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하고 난 이후에 내 양을 먹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띠를 띠고 다니는 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가는 삶은 살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가는 길이 이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원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한 주님은 나를 잘 되게 하는 주님인줄 알았습니다. 삼년 동안 부모와 가족과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무엇을 얻을 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셔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사도들이 무엇을 전하였을까요? 베드로가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증거 한 것입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바울도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라고 여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는 이단의 괴수이며, 예수를 믿는 무리들을 다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이 같습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배반하였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지만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적인 사랑임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야곱과 에서를 들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어떠함의 조건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한 일방적인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11~13절입니다.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면 함께 왕 노릇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정말로 죽었습니까? 오래 참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주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 절망해야합니다. 나는 날마다 주님을 부인하면서 살아갑니다. 주님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그냥 버려두시면 우리는 다 끝난 자들입니다.

 

그런데 다음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기에 자기를 부인하실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주님을 부인하여도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인하실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구원이며 복음 전하는 사도로 세움을 받은 이유입니다. 이 말 외에 전할 말이 없는 자들이 자기의 죄를 알고 오직 주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왜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런 영원한 용서와 사랑을 그 십자가로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배반하지 않으시는 그 약속의 신실하심을 믿고 사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한 그 순간, 닭이 우는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몸을 돌이켜서 베드로를 보신 그 눈길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도 보여 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