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2017. 5. 7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지난주에 선지자의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꾸미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의 후손임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서 주기철 목사의 면직과 복직에 대하여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면직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서 복직을 시키고 감사예배를 드린 노회가 몇 곳이나 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우리는 그 시대에 있었다면 주기철 목사를 면직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총신 신대원 박용규 교수가 이 부분 연구를 하다가 그 당시 노회 회의록을 보니 목사 면직이아니라 당회장 면직이라고 하면서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회의록을 봅니다. 19391219일 남문외교회당에서 개최된 제37회 평양노회 임시노회 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안건 결의: 입석자 : 평양서 송본(松本) 고등주임, 평양, 대동, 선교 3서의 고등계 형사대, 전 평서 고등계 주임 현 평원 서장 청수천(淸水川) 경부 1. 주기철 목사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한 이유로 교회헌법 권징조례 19조에 의하여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키다. 2. 이인식 목사를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임명하다.”

이러한 결정을 잘못된 것이라고 통합이나 합동에서 원인무효라고 하면서 복직시키고 감사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브니엘 신학교의 최덕성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죽은 자를 치리회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면서 로마가톨릭교회는 순교자, 복자 등 갈릴레오를 치리회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밝혔다. 그는 주기철을 면직시킨 노회는 평양에 있었지 서울이나 남한에 있지 않았습니다. 장로교회 노회는 원칙적으로 지역중심이다. 서울 또는 남한의 동평양 노회가 무엇을 근거로 1944년에 사라진 평양의 평양노회를 계승할 수 있는가라면서 당시의 결의 취소는 레토릭한 의미에서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목사의 권리를 복권하는 결정을 함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최 박사는 특히 예장통합측은 10여 년 전에 주기철 복권을 2(동서울노회, 평양노회)이나 했다. 독노회라는 교단도 복권을 시켰다. 그런데 합동측 총회나 노회가 또 복권을 시키나면서 "주기철을 상품화 하려는 시도와 장자의식-갑질 의식은 모두 자책골이다. 공동체적 책임이라는 차원에서 반성과 회개와 진실한 역사 기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주기철 목사의 면직을 복직하고 감사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상품화한다는 비판입니다.

 

지난주의 말씀이나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선지자의 무덤과 비석을 만들어 세우면서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조상의 양을 채운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도 동일한 핍박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순교자의 유적지를 꾸미는 일을 지금도 총회나 노회들이 앞 다투어 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자는 의미라면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상품화 하면서 자신들이 속한 단체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일에 사용한다면 이것 또한 예수님의 책망을 들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선배들이 신사참배를 한 것을 회개할 뿐 아니라 지금 우리의 탐심도 회개하여야 합니다. 신사참배만 우상숭배가 아니라 탐심도 동일한 우상숭배입니다(3:5).

 

오늘 본문 36절을 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탄식하십니다.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인격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말씀하시는 것이며 좁게는 현재 그 예루살렘과 성전을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셨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신 이유는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고 한 일이 몇 번이더냐고 하십니다.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은다는 말씀을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봄에 병아리를 부화시킨 어미 닭은 병아리를 보호하면서 먹이를 찾아서 먹게 합니다. 병아리가 조금씩 커지면 엄마 품에서 점점 멀리 떨어져서 놀기도 하고 먹이를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제 혼자 집에 있을 때에 이런 어미 닭과 병아리를 보다가 휘파람 소리를 냅니다. 마치 독수리가 날아오는 것과 같은 소리로 들렸는지 어미 닭은 양 날개를 펼치며 구구소리를 냅니다. 그러면 마당 구석에서 놀던 병아리들이 얼마나 빨리 어미 품속으로 달려오는지 손살 같습니다. 너무 빨리 달려오다가 넘어지기도 하면서 어미 품속으로 달려 들어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미닭이 병아리를 모음같이 선지자를 보내셨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하고 죽였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불러도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부르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역대하 36:14~16절입니다. “14 모든 제사장들의 우두머리들과 백성도 크게 범죄 하여 이방 모든 가증한 일을 따라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거룩하게 두신 그의 전을 더럽게 하였으며 15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의 사신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16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역대하는 유대인의 구약분류에 의하면 구약의 마지막 성경입니다. 구약의 마지막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멸망하게 되는 이유가 이 말씀에 있습니다. 시드기야 왕 때에 주어진 말씀이지만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가 이러하였습니다. 모든 제사장들과 우두머리들과 백성도 크게 범죄 하였습니다. 성전을 우상으로 가득하게 하여 더럽힙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심으로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셨지만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기에 성전이 있는 남 유다의 예루살렘이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하시기에 그렇게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 그 약속의 땅은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안식이 이루어진 후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습니다.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왔기에 자기반성이 일어납니다. 나라가 망한 이유를 율법과 통하여 돌아보니 자신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어겼기에 이렇게 되었다는 자기반성으로 인하여 율법을 모든 생활가운데서도 철저하게 지키자고 일어난 운동이 바리새운동입니다. 그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장로들의 전통과 유전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철저하게 율법을 지킨다는 자들이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이듯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자기반성이 일어나 철저하게 율법을 지킴에도 불구하고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에서 증거 한 그리스도가 오셨는데 왜 핍박하고 죽이는 것입니까? 수련회에서 말씀드린 대로 율법을 통하여 자기 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 율법으로 자신을 치장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율법적인 기능이 양심입니다. 아무리 양심을 곱게 쓰고 바르게 한다고 하여도 그 양심 고운 것으로는 자신의 근원적인 죄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도 양심으로도 인간이 스스로 의에 이를 수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본문 38절입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 집이란 예루살렘과 성전과 이스라엘 전체를 다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루살렘의 성전이기도 합니다. 성전의 무너짐은 예루살렘의 무너짐이며 예루살렘의 무너짐이란 이스라엘 전체의 무너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탄식하십니다. 그렇게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어도 그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이미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아직도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의 집이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어지는 24장의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멸망으로 연결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분노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예수님의 입을 막아 버리는 길은 죽이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에 결국 예수님을 죽입니다.

 

본문 39절을 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유대인들은 메시야 관은 지상에서 왕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그들과 늘 함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자신이 자꾸 떠나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근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을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지금 구원하여 달라는 호산나를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만에 이 군중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여 거짓 증인을 찾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증인들이 있었지만 서로 맞지를 않았는데 성전을 헐러버리라고 하였다는 말에는 분명한 두 증인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처형할 좋은 죄목을 찾은 것입니다. 성전을 헐고 삼일 만에 짓는다고 한 것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는 죄목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에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메시아 왕국이 지상에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래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환영하였지만 그런 기대가 무너지자 결국 며칠 만에 돌변하여 예수님을 죽이라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죽임을 당하십니다.

 

누가복음 13:31~35절입니다.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고 여기서 떠나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호의적이지 않는데 이런 정보를 준 것은 예루살렘에서 시끄럽게 하지 말고 시골에나 가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다고 하십니다. 예루살렘! 그 영광의 성전이 있는 곳! 제사장이 있고 제사가 드려지고 율법이 선포되는 곳! 이곳이 우상숭배의 진원지가 되었기에 이것을 책망하는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다 죽임이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탄식하면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찬송하리라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 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영원히 함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떠나신다는 말씀이나 보지 못한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보게 되는 것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할 할 때까지입니다. 이 때는 초림이 아니라 재림 때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지금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믿지 않으면 마지막 그 날에 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너희의 심판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6:12~15절입니다.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예수님이 떠나시면 더 유익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성령을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보고 들은 것을 증거 하였듯이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것을 알리십니다.

 

이어지는 16~18절입니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 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예수님께서 조금 있으면 떠나실 것이기에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고 조금 있으면 본다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성령이 임하심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면 늘 함께 있을 줄 알았습니다.

 

19~22절입니다.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친히 설명하여 주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곡하고 애통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죽음을 세상은 기뻐할 것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세상은 기쁨이고 제자들에게는 근심이지만 그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합니다. 여자의 해산의 때가 되면 고통으로 인하여 근심하지만 아기를 낳으면 그 아기의 태어남으로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않기에 둘째도 셋째도 낳는 것이지요! 그처럼 지금은 근심하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것이니 그때에는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십자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근심과 기쁨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보고 처음에 근심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고 성령을 보내주시면 제자들은 기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을 기뻐하는 세상은 이제 근심이 아니라 심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제자들은 고난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임하심을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지상이 계실 때에 보혜사이셨습니다. 파라클레이토스는 곁에서 함께 하여 주시는 은혜로운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는 그리스도의 영이시기에 성도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고난 가운데도 제자들은 기뻐합니다. 세상은 제자들의 이런 기쁨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내일 죽을 자가 쿨쿨 잘 수 있고, 기뻐하며 찬송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이 역사 속에서 고난과 함께 기뻐하지만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고난이 끝나고 영원한 기쁨만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난 중에도 기뻐하며 소망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이 세상에 속하여 예수의 죽음을 기뻐한 그 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재림할 때까지 보지를 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에 세상의 것만 믿고 삽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눈으로는 더 이상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모든 자들이 다 예수님을 뵙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4~7절입니다.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해방시킨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제사장이 됩니다.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제사장이 핍박당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모습처럼 고난 가운데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빼앗아갈 수가 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뵙게 됩니다. 성도에게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양하면서 맞이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찌른 자 곧 그를 믿지 않는 자들은 주님의 재림의 날에 주님을 뵙게 되지만 그들은 영원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날에 주님을 뵙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서 영원한 심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재림의 날에는 모든 자가 다 부활을 하지만 하나는 생명의 부활로 하나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1:3~12절입니다.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지금까지 말씀의 해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리심으로 인하여 죄에서 해방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자랑합니다. 이들은 이 역사 속에서 고난을 받습니다. 이런 성도가 핍박을 받는 이유는 이 세상이 이러한 복음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재림하시는 그 날에 복음으로 인하여 환난 당한 자는 영광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자에게 환난을 준 자들은 환난으로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아니한 자는 주의 얼굴과 그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자리에 서 있습니까? 예수님의 탄식소리가 들리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 피로 우리를 죄에게 해방시켜 주시는 그 기쁨을 맛보기를 원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더욱 밝히 보이는 자들이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