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1~2 은혜와 평강 2018. 1. 7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오늘부터 빌립보서를 보겠습니다. 먼저 빌립보교회가 세워진 배경을 보겠습니다. 빌립보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 2세의 이름을 따서 세워진 도시입니다. 알렉산더의 헬라제국이 무너지고 로마제국이 되면서 이 도시는 로마의 퇴역 군인들이 거주하는 도시가 됩니다. 로마 본토의 특권을 그대로 행사할 수 있는 도시였기에 이 도시는 로마의 황제를 주라고 부르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이런 곳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들어가게 됩니다.

 

사도행전 16:4~5절입니다. “4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바울사도가 이방인 지역에 복음을 전함으로 예루살렘에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는데 아무른 율법적인 조건이 없어도 되느냐는 논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사도들이 결론을 내리기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이 특히 꺼리는 몇 가지만 주의하게 합니다. 바울사도가 이 소식을 전하니 여러 교회가 믿음이 굳건해지고 성도가 늘어갔습니다.

 

이어지는 6~10절입니다.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사도가 아시아 지금의 터키지역의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를 썼지만 성령, 곧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를 않습니다. 전도하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허락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8절의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이 예수님의 자기 의지로 이루시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무시아를 지나 바닷가인 드로아로 갔는데 밤에 환상이 보입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합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고서 마게도냐로 가기를 힘쓴 것은 하나님께서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어지는 11~15절입니다. “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1)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2)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바울이 이방인 지역에 복음을 전하려고 가면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배척받으면 그곳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빌립보 지역은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유대인 성인남자 열 명이 되면 회당을 지을 수 있습니다. 마게도니야 지역에 환상을 보고 왔다면 전도의 문이 잘 열려야할 텐데 수일동안 아무른 접촉점도 없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안식일에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강가로 나가니 그곳에 모인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방 여자들로 유대교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가 바울의 복음을 듣게 되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왜 복음을 들어야 합니까?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 같은 사람도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는데 왜 베드로의 복음을 들어야 합니까? 주 예수의 이름이 구원의 이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보면 바울이 마게도니아의 빌립보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주께서 가게 하시지만 그 복음을 듣고 믿는 것도 주님께서 허락하여 주심이 아주 분명합니다. 루디아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서는 바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청합니다. 아마 바울이 민폐를 끼친다고 거절한 모양입니다. 그러자 루디아가 하는 말이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강권하여 머물게 합니다. 어느 정도로 강권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집에 유하지 않으면 자기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루디아의 집이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가 됩니다.

 

사도행전 16:16~19절을 봅니다. “봉독 빌립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루디아의 집이 복음의 전초기지(前哨基地)가 됩니다. 그곳에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이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줍니다. 귀신 들려 점을 쳐서 주인에게 이익을 준다는 것은 어디에 투자를 해야 할지 자문을 준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 여종이 바울의 일행을 따라 다니며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합니다. 이러면 많은 사람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믿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귀신이 바른 말을 해도 그런 방식으로 복음이 전하여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귀신을 쫓아냅니다. 그러자 이 여종의 점괘가 나오지 않으니 여종의 주인이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입니다.

 

이어지는 20~24절입니다. 여 종의 주인이 그 수익의 소망이 끊어짐으로 바울일행을 잡아서 시장으로 끌고 가고 상관들 앞에서 데리고 가서 고소하기를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한다고 합니다.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합니다. 복음은 가는 곳 마다 이런 대접을 받습니다. 자신의 수익의 소망이 끊어지는데 환영하겠습니까?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간음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환영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무리가 고발하니 그 관리들이 이들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를 치게 한 후에 옥에 가두고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고 합니다. 그 다음날 정식 재판을 하든지 할 생각이었겠지요!

 

25~40절입니다. “봉독 너무 유명한 말씀이라서 대부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빌립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혀서 기도하고 찬송하니 죄수들도 듣습니다. 밤중에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쇠고랑에 묶인 것도 다 풀려버립니다. 간수가 자다가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간줄 알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합니다. 죄인을 놓치면 사형이기에 그렇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그 사람을 말립니다. 간수가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서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느냐고 합니다.

 

31절을 함께 읽어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주의 말씀을 듣고 그 집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습니다.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씻기고 함께 먹고 마시며 잔치가 일어납니다. 마게도니아 지역에 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그 환상이 주님의 허락임을 알고 왔더니 결국 루디아의 가정과 이 간수의 가정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빌립보 교인들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풀어주라고 합니다. 바울이 로마인임을 밝히자 그 상관이 두려워하면서 권하기를 그 성에서 떠나달라고 청합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데살로니가 지역으로 갑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본 이유는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한 기간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 교회와 바울사도와의 관계는 계속하여 좋은 관계로 유지가 됩니다.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는 여러 문제 들이 발생을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간 후에 다른 복음 전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바울이 사도권이 있느니 없느니 함으로 그런 문제를 바로 잡고자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만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복음 전하는 사역에 늘 함께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4:15~18절입니다. 봉독 이렇게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사역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면 지금 바울사도는 어디에서 이 빌립보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까? 로마의 감옥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바울 서신 중에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빌립보 교회에 복음을 전한 것은 2차 전도여행 때입니다. 바울이 삼차 전도여행을 마치면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자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함으로 로마 군대의 호위를 받아서 결국 로마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옥에 갇힌 것을 염려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며 빌립보 교회의 몇 가지 문제들도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1절을 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편지 발신인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라고 합니다. 이 당시의 종이라는 단어는 노예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는 자신을 사도라고 합니다. 바울의 사도권이 인정되어야 풀리는 문제들이 있기에 그렇게 하였지만 빌립보서는 그저 자신을 종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해도 아무른 상관이 없는 교회가 빌립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바울과 빌립보 교회가 친밀합니다.

 

그리고 아들과 같이 여기는 디모데를(고전 4:17) 동일하게 발신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동역자(16:21)라고도 하고 형제(고후1:1)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음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빌립보 교회에 잘난 체 하는 두 여자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4:2절을 보면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이들이 같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다툰 모양입니다. 서로 주의 일을 잘 하겠다고 하다가 일어난 모양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권면하기를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바울사도는 이 단어를 얼마나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 바울서신을 보면 그리스도 안48, ‘그리스도 예수 안34, ‘주 안50회로 전체 132회가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기에 우리가 다 한 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교회에서 여러 가지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아직 우리의 육적 자아들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빌립보서 2장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감독들과 집사들이라고 합니다. 제일 먼저 언급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성도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거룩한 무리라고 한문으로 표현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구별하여 내신 자를 성도라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하여 낸 백성들을 성도라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산 백성들을 성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성도만 가는 곳입니다. 교회의 어떤 직분의 자격으로 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를 먼저 말하면서 감독들과 집사들이라고 복수로 말합니다. 이들은 교회의 어떤 실무적인 일을 맡은 사람들이지 신분적으로 높거나 차원이 다른 자들이 결코 아닙니다. 직분은 성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에베소서 4:11~12절입니다.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바로 앞의 말씀을 보면 만물의 주가 되시는 분이 사로잡힌 우리들을 사로잡아 내시고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 선물이 각양 직분들인데 이런 직분을 주신 이유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입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며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이란 자기 이름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를 섬기는 일을 위하여 주신 직분입니다.

 

사도행전 20:28~32절입니다.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3)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사도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헤어지면서 부탁한 감독의 일입니다. 교회의 감독들이란 무엇을 볼 봐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기 피,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는 것입니다. 교회의 장로와 목사가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이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같은 바울의 복음을 들은 자들 중에서도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이 나올 것이며 또 외부에서도 이리가 올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는 이유는 이 말씀이 우리를 든든히 세우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절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절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같은 발신자로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에 인사하기를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말씀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할 때에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말을 하는 자들이 이단들이기에 그들을 다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동등 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인사의 내용은 은혜와 평강입니다. 빌립보 교회에 처음 복음이 전해진 내용을 사도행전 16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로마인들이 감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전한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가 그들의 주로 믿고 그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빌립보 도시에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라는 자가 부활하셨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복음을 믿는 자들이 얼마나 핍박이 심하였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어려움이 처한 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그 복음을 전하다고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와 평강을 전하면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감옥에서 기뻐하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안에도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평강이란 히브리어로 살롬입니다. 샬롬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일 때 살롬입니다. 기드온이 여호와를 만났을 때에 죽지 않았다고 해서 쌓은 단 이름이 여호와 살롬입니다(6:24). 여호와 하나님을 죄인이 만나면 죽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았으니 평강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살롬인 평강이 헬라어로는 에이레네입니다. 단지 헬라어의 의미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구약적인 살롬의 상태를 알아야 평강의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결코 인간의 행위와 정성으로는 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관계가 회복이 됩니다.

 

로마서 5:8~11절입니다.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바울사도가 가는 곳마다 무슨 복음을 전하였을까요? 바로 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들을 위하여 하나님 편에서 화목제물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화목제물을 마련한 것이 아닙니다. 그 화목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 된 관계를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이 복음을 빌립보에 전하였고 이 복음을 들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지금 그들의 삶이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간에 이 복음으로 인하여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2018년이라는 새해를 맞았습니다. 우리가 한 번도 걸어 가보지 않은 날을 걸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온갖 일들이 다 일어날 것입니다. 질병, 사고, 환난, 핍박, 죽음도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이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이 복음으로 인하여 은혜와 평강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