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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동영상설교]

갈라디아서 6:17-18 예수의 흔적 2012. 3. 18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약 6개월에 걸쳐서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전체를 마무리를 하면서 오늘 본문을 보려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것은 갈라디아 교회에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왔습니다. 바울의 복음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을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라고 전하였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란 나의 믿어주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하여 우리는 아무른 값을 지불하지 않고 오직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갈라디아서 1:6-10절을 봅니다. “봉독”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났다고 합니다. 이것을 바울은 이상하다고 합니다. 어떻게 은혜를 떠나서 행위로 돌아가는 일에 그렇게 빨리 따르느냐는 말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와서 이들을 유혹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속히 바울의 복음을 떠나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10절에서 보면 다른 복음에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사람의 자기 행위로 인한 자기 가치 챙기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런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살해한 죄인으로 드러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 드러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복음을 듣고 믿은 갈라디아 사람들 마음에 무언가 허전한 것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다 하시면 나는 꼭두각시라는 말이냐는 불만들이 있었기에 사람의 가치를 말하는 다른 복음을 듣고 속히 그들을 따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늘푸른교회에 적용을 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행위의 가치를 인정하고 여러분의 행위에 따라 세상의 복도 받고 하늘의 복도 받는다고 하였다면 여러분의 행위가 오늘 이 모양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면, 아니 우리의 행위가 어떻다고 그럽니까? 우리는 힘껏 잘하고 있는데요! 이런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보면 우리는 놀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에서 교회에 쏟는 에너지의 절반도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버릇이 되어서 조그마한 헌신의 이야기만 나와도 인상부터 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 늘푸른교회에 다른 사람이 와서 축복과 저주라는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여러분은 아마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께서 사람의 가치를 이렇게 무시하지는 않으실 거야! 하는 마음으로 좋아할 것입니다. 지금 저희교회 오신 분들 가운데 이 문제로 고민하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십년을 넘게 열심히 종교적인 충성을 하신 분들에게 복음은 정말 낯설게 다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열심이 예수님과 멀어질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이 됩니다. 바울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10:1-4절입니다.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올바른 지식이 없이 열심만 가지고 달려간 결과가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바울서신 전체를 아우르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런 복음을 가장 핍박한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몰랐기에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자기 의를 세우는 열심에 바울은 더욱 열심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기 위하여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때부터 바울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16-22절을 봅니다. “봉독”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도 유혹을 받았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모세 이야기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430년 뒤의 모세가 율법을 받은 것은 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인지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는 역할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계시될 믿음의 때 까지 가두어 두셨다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는 것을 가지고 다시 말합니다. 한 아들은 여종에게서 났고 한 아들은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습니다. 이 여자들을 두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예루살렘과 같은 곳입니다. 이들은 함께 종노릇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옛 언약인 율법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세우신 새 언약입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으로 따라 난 자를 핍박하였듯이 모세시대도 바울시대도 오늘시대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시 할례를 받는다고 하면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율법 전체를 행하지 못하기에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으로 인하여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의의 소망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없습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만 중요합니다.

 

5장에서 역시 중요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자유를 얻은 자들이 그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서 자유를 외치면서 자기 육체의 기회로 삼아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마치 복음으로 자유를 얻은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지 않고, 서로 짐을 지기 싫어하면서 나는 복음으로 자유하였다면서 자기 육체의 만족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어떤 감독자나 지시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자기 스스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삽니다. 자기 스스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산다고 하였습니다만 이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자기 스스로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사람 안에는 성령의 인도가 반드시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판단할 수가 없고 본인과 주님만이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로만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가 아니라도 성령의 인도와 같은 겉모양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똑 같은 헌신과 봉사라고 하더라도 육체의 일일수도 있고 성령의 열매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사람은 겉으로 판단하지만 주님은 그 중심을 보십니다.

 

6장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5장에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을 말씀하였습니다. 육체의 일은 결국 자기 자랑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자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내가 어떤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지만 그러나 이렇게 수고한 것은 내가 아니요 오직 하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이렇게 되었다고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의 복음을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합니다. 그래서 바울을 괴롭게 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합니다.

 

오늘본문 갈라디아서 6:17절입니다. “봉독”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함으로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받았는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마지막에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할례라는 흔적을 가지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바울 역시 그런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대교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그런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하여 바울의 몸에 예수의 흔적이 남겨졌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흔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라는 말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흔적이라고 하였습니다만 낙인이라고 해도 됩니다. 낙인(烙印)은 자기 소유를 표시하기 위하여 문양을 새긴 쇠도장을 불에 달구어 짐승이나 노예의 몸에 화인(火印)을 찍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부정적인 용어로 많이 쓰입니다. 학교나 회사에서 찍힌다는 표현을 씁니다. 낙인효과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교회에서도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세상의 이야기로 재미있어 할 때에 눈치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하면 찍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흔적이 있습니까? 낙인이 찍히기 싫어서 아닌 것을 알면서도 동조하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1:1-11절입니다. “봉독” 고난이 넘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위로와 소망도 넘쳐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자기를 위한 고난은 고난이 아니라 생고생입니다. 이런 생고생을 감수하는 것은 장래의 소망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결국은 썩어질 소망일뿐입니다. 마치 어리석은 부자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자를 향하여 오늘밤에 네 생명을 도로 찾으면 누구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고생하고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11:16-27절을 봅니다. “봉독” 거짓 선생들은 고린도교인들을 종으로 삼고 잡아먹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며 뺨을 치는데도 용납합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어떻게 합니까? 엄청난 환난과 고난을 당합니다.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무엇이 자기 몸에 남게 됩니까? 예수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흔적이 남게 되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처가 없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돌에 맞아서 죽은 자와 같이 되어서 내다 버려지기 까지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흔적들이 바울의 몸에 새겨진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몸에는 무슨 흔적이 있습니까? 세 가지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이 좋아서 세상의 쾌락을 쫒아가다가 고생한 흔적들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거의 없겠지만 예수님을 위한 흔적이 있을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다가 징계로 받은 흔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1:2-9절을 봅니다. “봉독”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오늘 우리교회가 이 모양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소와 나귀도 주인과 그 주인의 구유를 아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얻어 터졌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라고 합니다. 이 모습이 우리교회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하지 않아도 우리의 몸은 늙고 병들어 죽어갈 것입니다. 이 몸을 무엇을 위하여 쓰시겠습니까? 올해 연세가 백세가 넘은 방지일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녹스는 것이 두렵지 닳아 없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몸에 무슨 흔적이 남겨지기를 원하십니까?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라면 짐승의 표가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고난의 흔적이 새겨지고야 말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