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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1-2 사도(使徒) 2012. 4. 8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지난주에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디에서 알 수가 있습니까? 성경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기에 성경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계시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평생에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자기의 뜻들이 다 있습니다. 목사는 목사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목사의 뜻을 섞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교인들의 뜻이 또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도 성경을 연구합니다. 물론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하면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자기의 뜻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연구하기도 합니다. 제가 노회에 갔다가 어느 목사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느 장로가 구약의 십일조 이야기를 하면서 십일조가 제사장만 먹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함께 먹는 것이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목사가 성경에 도대체 그런 말이 있는가 하였습니다.

 

신명기 14:22-23절입니다. “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성소에서 그 십일조를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어지는 말씀은 토지가 없는 레위인과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고아 과부에게도 돌아가게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만 이 말씀을 어느 장로가 목사에게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로가 왜 이 말씀을 그 목사에게 물었을까요? 대부분의 목사가 마치 구약의 제사장처럼 행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모든 십일조는 제사장에게 바쳐졌기에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목사가 가져가야 한다고 해서 십일조는 전부 목사에게 드린 교회가 있습니다. 십일조 외에 다른 헌금은 교회 유지를 위하여 사용하고 십일조로 교역자들의 생활비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해도 사람들이 아무 말도 못한 것은 목사를 반대하던 교인의 몇 가정에서 자녀가 교통사고로 죽는다든지 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나니 모두 입을 닫게 되고나서 그렇게 하였다고 합니다.

 

오늘날 목사가 제사장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미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더 이상 드릴 제사는 없습니다. 제사가 없는데 무슨 제사장이 필요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자신의 피로 단번에 속죄하시고 그 속죄한 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신 것임을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하여 이미 다 보았습니다(히브리서 10장).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아직 신부를 사제(司祭)라고 합니다. 즉 제사를 맡은 자라는 말입니다. 이런 가톨릭에서 목숨을 걸고 종교개혁을 한 사람들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개신교의 목사가 제사장인양 행세하는 것은 스스로 모순입니다.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사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도는 말 그대로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면 목사는 사도입니까?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성이 있다는 말을 목사들이 합니다.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의 성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면 다 사도성이 있다고 해야 합니다. 마치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신부만 사제가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이 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해서 만민 제사장이라고 말한 것처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새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구분을 하면서 마치 성직자를 신분상의 차이가 나는 것처럼 계급화 해 버렸습니다.

 

신약시대는 신분의 차이가 없습니다. 기능상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우선성으로 인하여 말씀을 전하는 자를 귀하게 여기라고 합니다. 이것은 말씀 자체에 대한 중요성으로 인한 것입니다. 마치 임금님의 교지를 받아서 전하는 사람의 직급이 교지를 받는 사람보다 낮아도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임금님께 무릎을 꿇은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라고 하는 것은 복음을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사도가 그런 내용의 글을 신약 곳곳에서 말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의 말씀을 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임을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마음이 전혀 없었던 사람입니다. 오히려 예수를 이단의 괴수로 보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일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일을 열심히 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사도로 부름을 받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 같은 사도가 이 시대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시대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명받은 사도는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완성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도는 예수님의 생애와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 12명과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사도라고 부름을 받은 자는 성경을 기록한 사도가 있고 성경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언행이 성경이 기록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기록된 사도들만 사도입니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그 계시의 완성으로 이제 사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제자들이라고 하는 자들을 속 사도라고 하고 그 속 사도의 제자들을 교부라고 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과 자신들을 하늘과 땅 차이로 구별을 합니다. 그러면 왜 사도를 성경으로 제한하는 가하면 만약 오늘날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성경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날도 직통 계시를 받는 다는 사람들이 한국에 수 만 명이 넘을 것입니다. 온갖 예언을 한다고 하면서 이상한 주술적인 일들을 행하면서 성령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 일들까지 다 계시라고 한다면 성경은 아마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보다 수십 배는 더 많은 양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의 특징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자들입니다. 에베소서 2:20절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나중에 본문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마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란 성경에 나타난 사도와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이 닦아놓은 터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터가 없다는 말입니다.

 

베드로후서 3:1-2절과 15절을 봅니다. “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여기서도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말하면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썼다고 합니다. 베드로도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사도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이 사도의 사도됨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강조하는 이유는 오늘날 사도는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으로 계시가 종결되었습니다. 더 이상 추가될 계시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성경 안에 다 계시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고 무엇을 보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 과연 성경에 있느냐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없는 내용을 자신이 무슨 특별한 계시를 받은 것처럼 말하고 또 그런 사람에게서 기적이 나타나고 예언을 하는데 그대로 일어난다고 해도 그런 자들의 말을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신사도 운동이라고 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몇 년 전에 밀양지역에서 몇 명의 목사가 이런 운동에 빠졌습니다. 어느 여자가 신사도라고 하면서 기도를 하는데 점쟁이처럼 알아맞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점쟁이지요! 그런데 목사가 정신없이 이 여자의 말을 듣고서 목사의 상전으로 모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시키는 대로 하였습니다. 노회에서 제명이 되어도 그 사도라는 사람의 말을 듣겠다고 하여 제명이 되었습니다. 제명 되고나서야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그들과 단절하고 다시 목사직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목사는 사도가 결코 아닙니다. 박윤선 목사는 갈라디아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의 목사들은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종이 아니고 교회가 세운 교역자들이며(고후 8:23), 사도들의 전도내용(복음)을 그대로 전달할 자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신앙의 교리로 받아들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6절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하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성경에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지 혹은 인간들의 전통에 의해서든지 아무 것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더 첨가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자신이 무슨 계시를 받은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라면 성경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교리에 의하여서도 이단으로 배척되어야 하는데 하도 많은 사람들이 큰 교세와 힘으로 이상한 짓들을 하고 있기에 배척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 배척 못하는 이유는 그런 방식을 자기 목회에 도입하여 목사의 능력과 권위를 보이고 싶고 또 교회도 키우고 싶은 욕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제가 이런 말들을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사도들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사도들은 어떤 모습으로 사역을 하였습니까? 디모데전서 1:12-17절입니다. “봉독” 바울 자신에게 직분을 맡기신 것은 자신이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긍휼을 입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자신의 잘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서 용서 받았다는 것을 보임으로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의 본이 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사도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속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9-14절입니다.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이런 모습이 사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도가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기억하고 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증거 하고 있는 말씀을 봅니다. 고린도전서 11:23-26절입니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새 언약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까지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즉 십자가를 기억하고 전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