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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에베소서 1:1-2 성도에게 은혜와 평강 2012. 4. 15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오늘로 에베소서의 인사말을 마무리 하려고합니다. 인사말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바울이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으라고 합니다. 오늘은 이 인사말 중에서 성도가 무엇이며, 성도에게 은혜와 평강이 어떻게 주어지며, 그 은혜와 평강이 어떻게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먼저 성도가 무엇인지 보려고 합니다. 성도(聖徒)란 거룩한 무리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성스럽고 위대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에 대한 예문을 두 가지 인용합니다. “여윈 몸에 낡은 누더기만 감고 있는 어머니였지만, 그 흉중에는 언제나 거룩한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어머니의 거룩함을 말합니다. “충무공의 애국심은 지금 보아도 거룩하다” 이순신의 애국심을 거룩하다고 합니다. 이런 개념으로 거룩함을 말하는데 성경의 거룩하다는 말과는 많은 거리가 있는 예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무엇인지 거룩함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찾아보아야 합니다. 먼저 구약에서 성도라고 하는 곳을 봅니다. 출애굽기 19:5-6절입니다.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을 맺으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은 언약을 지켜야 합니다. 언약백성이 되어야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다는 것이 구약의 결론입니다. 결국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거룩한 무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옛 언약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거룩한 무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거룩함을 얻는 길은 오직 대신 희생의 피 뿌림으로만 된다는 것을 구약에서 여러 가지 모형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구약에서 성도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만 시편 50:5절만 봅니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하나님의 성도를 모으라고 합니다. 성도란 제사로 언약한 이라고 합니다.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제사가 피 흘림의 제사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에 없기에 피 흘림의 제사를 통하여 언약한 백성이라는 말은 대신 피 흘리는 언약의 완성 자가 와야만 하나님의 성도가 될 수 있음을 이미 구약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백성이 되려면 늘 어린 양의 피 아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로 인한 거룩함을 버리고 스스로의 행위로 거룩함을 이루려한 그들이 어떻게 실패하였는지를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9절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모든 말씀들을 자기의 손가락 하나에 모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목하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어린 양의 피로 구별되어 나왔습니다. 이 어린 양의 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길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받았다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대신 희생을 믿지 않고 자기 행위를 의지하였기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로마서 9:30-33절입니다.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원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일인데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은 예수님 믿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돌, 걸림돌을 믿는 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만 믿게 됩니다.

 

히브리서 10:1-18절을 봅니다. “봉독” 율법으로 드리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림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따라 드리는 번제와 속죄제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시고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것과 같이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그 한 몸으로 예비 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단번에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이 사실을 은혜로 믿게 된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런 성도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성도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를 성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바울서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말하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누구 안에서 택함을 받았습니까?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함을 받았습니다(엡1:4).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 누구 안에서 주어집니까?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엡1:3). 죄 사함을 어디에서 받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받습니다(엡1:7). 이러한 말씀들을 앞으로 보겠습니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자가 성도입니다.

 

여기서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다고 하는 것은 성도가 신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로 보입니다. 물론 성도가 신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라고 하면서 신실하지 못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장로를 세울 때에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증거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딤전4:7).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에 무엇으로 신실하다고 하겠습니까? 회사에서 업무 처리하는 방식이나 회식할 때의 모습을 통해서도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하여 평가를 합니다. 예수 믿는 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이기적이다. 입만 살아있다. 돈을 더 밝힌다. 천국보다 세상을 더 좋아한다. 이런 말들을 우리가 듣고 있지 않습니까?

 

결혼 시즌에 주일날 친척 결혼식을 하면 어떻게 말합니까? 나는 교회 가니 못 간다는 말로 때웁니까? 오히려 토요일에 미리 찾아가서 좀 넉넉하게 부조하면서 내일 교회가기에 오지 못한다고 하면 그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욕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믿으려면 저렇게 신실하게 믿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계속 말하게 되면 사람의 신실함으로 성도의 기준을 정할 수가 있게 됩니다. 성도란 신실함이 나오는 것이지 자신의 신실함이 더하여야 성도가 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면 성도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신실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피스토이’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대로 신실하다는 말도 되지만 믿는다는 말도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성도란 신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성도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여기서 사람들의 신학적인 배경이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은혜로 믿지만 믿고 나서는 신실하게 살아야 한다. 만약 신실하게 살지 않으면 구원도 취소될 수 있다고 말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알미니안이라고 합니다.

 

새 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 [에베소에 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이라고 따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성도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역시 인간이 주도권을 가진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자들입니다. 이들이 성도입니다.

 

제가 왜 성도라는 이 단어 하나로 이렇게 오래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성도가 되는 것을 마치 자신이 믿어주는 행위로 성도가 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믿어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된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믿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믿는 자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작에서 행위를 말하고 어떤 사람은 나중에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디모데후서 2:11-13절입니다.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여기서 미쁘다는 말이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12절에서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주를 많이 부인하고 삽니까? 아주 사소한 이익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말씀이 13절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 미쁘시다는 말이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새 번역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그분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여 주를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도 주님 앞에 설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지만 주님은 언제나 늘 신실하셔서 자기를 부인하실 수가 없기에 자기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그 자기 언약의 신실하심의 혜택이 주어지는 자가 성도가 됩니다. 이런 자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살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성도에게 무엇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2절의 말씀입니다. 은혜와 평강입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주시는 분의 일방적인 긍휼로 인하여 받게 되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이 은혜에 대하여 에베소서에서만 보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에베소서 1:7절에서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2:8절에서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4:7절에서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십니다. 이 은혜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각자 맡겨진 일을 하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나서도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입니다. 이러한 성도에게 은혜를 기원합니다. 이러한 은혜의 결과는 평강입니다.

 

평강이 무엇인지 사사기 6:17-24절을 봅니다. “봉독” 기드온을 여호와께서 사사로 부르십니다. 그때 기드온이 은혜를 입었다면 그 은혜에 따른 표징을 구합니다. 그래서 제물을 바치니 그 제물을 올려놓은 바위에서 불이 나오고 여호와의 사자가 그 불꽃 가운데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기드온이 이제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으니 죽었다고 합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죽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기드온이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는 평강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만나고서 죽지 않은 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을 평강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면 다 죽게 됩니다. 기드온도, 삼손의 부모도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 줄 압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나는 죄인이니 나에게서 떠나 달라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이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 결과로 평강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평강은 우리가 아는 안락한 삶이 아닙니다. 어떠한 환난과 핍박이 온다고 할지라도 평강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내일 사형을 당하는데도 얼마나 단잠을 잤는지 천사가 와서 깨우는데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옆구리를 쳐서 깨웠다고 합니다. 바울도 복음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는데 찬송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자족하다고 하고 모든 것이 능하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평강이 성도에게 주어집니다. 이 은혜와 평강을 우리도 맛보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