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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동영상설교]

에베소서 1:3-6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 2012. 5. 13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이 신령한 복에 대하여 지금 계속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내용은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런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왜 주셨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6절을 봅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복을 받았다고 하면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든지 땅의 복이든지 무엇이든지 복이라고 하면 환장하는 우리들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런 복을 받으면 내가 행복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동화의 결론이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더래요.’ 이것이 결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행복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찬송을 받으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에 하나님께 선물보따리를 바리바리 싸들고 가는 것인 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에 사단이 심어놓은 견고한 진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 할 때에 이 내용을 보았습니다. 사단의 견고한 진이란 사단이 선악과 이후의 인간들에게 교묘하게 심어둔 선악체계와 인과율의 생각들을 심어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견고한 진인지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그래도, 그렇지만, 하면서 거저 주시는 은혜를 거절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 자만 거저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됩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이란 내가 무엇을 행하는 것으로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은 영광스러운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시는 것은 인간의 손때가 전혀 묻지 않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영광으로 찬송을 받으십니다.

 

이 한 말씀을 위하여 우리는 성경 전체를 다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만 이야기하여도 우리의 평생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는 거주 주시는 은혜의 영광에 대하여 별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복 받았다는 인과율적인 간증들만 쏟아집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곳입니다. 찬송가 258장은 보혈에 관한 찬송입니다. 5절을 보시면 “이 후에 천국 올라가 더 좋은 노래로 날 구속하신 은혜를 늘 찬송 하겠네”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 하늘나라에서도 찬송합니다. 이 은혜를 지금 찬송하지 못하는데 천국에 갈 수는 있겠습니까!

 

거저 주시는 은혜가 가득한 곳이 지상에서 모델로 보여준 곳이 있습니다. 창세기 2:1-3절입니다.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아담이 눈을 뜬 순간은 모든 것이 다 완성되어 있는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자신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살아갈 자리는 하나님의 완성인 안식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원래 피조물의 자리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사탄이 하와를 유혹합니다. 그 유혹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선악과를 따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 유혹이 얼마나 간교하게 말씀을 비틀고 왜곡하는지 유혹이 진리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하와가 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함께 먹었습니다. 이 타락은 거저 주시는 은혜를 거절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존자로 살아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에 의존되어야 있어야 하는 것이 모든 피조물의 원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창조주로부터 독립선언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정녕 죽음의 길입니다.

 

창세기 3:22-24절입니다. “봉독” 이제부터 거저 주시는 은혜를 거절하고 스스로 선악과를 선택하여 하나님처럼 살려고 한 인생의 비참함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23절에서 그의 근원인 땅을 갈게 하십니다. 이로 인하여 아담의 후손들은 흙속에서 태어나 흙에 난 것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인생은 수고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게 되었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이 더하여졌습니다. 의인 아벨의 피를 흘린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와서 소산을 제대로 거둘 수 없게 되었기에 천년을 가까이 살았지만 그 결론은 한 결 같이 죽었더라는 것이 창세기 5장의 아담의 후손들의 족보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거저 주시는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노아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창세기 5:28-29절입니다.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1)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1)안위함” 노아가 보여준 안위, 위로, 한숨 돌리게 한다는 이 이름의 뜻이 어떻게 드러납니까?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노아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입은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에 몰두하였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창6:8) 참된 안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방주를 준비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4:37-39절입니다.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오늘날도 은혜를 입은 자만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듯이 예수님을 믿고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살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 다시 오실 때에 영원히 불에 탈 것들에 함몰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지금도 쉼이 없지만 영원한 안식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 땅에서 노아처럼 안위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 안식은 사람의 노동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되는 것임을 율법에 담아 두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뜻은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에서는 창조를 기억하여 지키라고 하시고 신명기 5장의 십계명에서는 구원을 기억하여 지키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조와 구원이 모두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임을 보이기 위하여 인간은 일하지 않고 쉬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것이 거저 주시는 은혜를 버린 아담의 후손들의 실상입니다.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이스라엘의 모습이 어떠하였습니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였습니다. 자기 스스로 판 웅덩이는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지킴을 자신들의 의로 여기는 것이 우상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온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있기에 스스로 살기 위하여 그것도 단지 목숨을 잠시 연장할 뿐인데 이것을 위하여 엄청난 자원을 쏟아 부어 의학을 발달시키고 있지만 더욱 비참한 현실만 양산될 뿐입니다. 앞으로 점점 고령화 사회가 되어 가면 어떻게 될지 짐작이 됩니다. 사람들은 또 이것을 두려워하여 노후를 걱정하여 온갖 노후 대비를 다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터진 웅덩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노아 시대와 지금이 같습니다. 갈라디아서 6:7-8절입니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노아 시대 때 사람들이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자신들을 살리는 유일한 길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노아는 방주를 예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자는 성령을 따라 심고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둔다는 말씀입니다.

 

그 안식을 어떻게 거저 주시는지 누가복음 13:10-17절을 봅니다. “봉독” 18년을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이 예수님께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향하여 죄 사함의 선포와 안수로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지킨다는 회당장이 분노가 일어나서 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느냐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소나 나귀도 안식일에 풀어서 물을 먹이는데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회당장은 아무 말도 못하고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온 무리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였습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거저 주시는 은혜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행위와 자기 가치를 포기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사단의 일임에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언약은 신실하셔서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반드시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내십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윗이 받은 복을 목동에서 왕이 된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또는 성전을 지을 마음이 있었고 성전을 위하여 많은 것을 드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 본인은 그런 것을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역대상 29:14-16절입니다. “봉독” 다윗 왕과 백성들이 즐거이 드린 것은 주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 주께서 즐거이 드릴 마음을 주셨답니다. 그런 마음을 주신 분이 무엇을 알게 하신 것입니까? 주께서 모든 것을 주셨기에 주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께 드렸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것만이 거저 받은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일한 것도 없이 받았습니다.

 

로마서 4:6-8절입니다.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이 왕이 되는 것도 거저 주시는 은혜였습니다. 성전을 위하여 준비한 것도 거저 주신 은혜였습니다. 이 모든 거저 주시는 것보다 더욱 큰 복은 일한 것이 없이 용서 받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7절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성도란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천지 창조의 모든 혜택을 거저 받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죄 사함과 구원을 다 값없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가진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자랑한다는 것은 거저 주시는 은혜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알고 받는 사람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1-8절입니다. “봉독”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신다고 합니다. 이것을 믿는 자가 이기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불과 유황 불 못에 들어가는 둘째 사망에 해당되는 자들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특징을 뒤에서 목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22:17절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값없이 거저 주시지 않으시면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세전에 택함을 입은 자는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