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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동영상설교]

에베소서 1:7-10 은혜의 풍성함 2012. 5. 27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지난주에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왜 그 영광스러운 은혜를 거저 주셔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엡2:1). 그리고 시편 49:6-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7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납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만 속할 수 있는데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이라서 아무도 속량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광스러운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평생을 통하여 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풍성함을 알아가는 것이 행복한 길일까요? 고난의 길일까요? 실상은 행복한 길이지만 우리가 이 세상의 신에게 속아서 고난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은 잠시 당하는 가벼운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 가는 길입니다.

 

베드로전서 2:19-21절입니다.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2)아름다우나 2)헬.은혜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길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길이 주님께서 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오는 고난이 은혜의 풍성함을 보여주는 길입니다. 이 은혜의 풍성함이 좋습니까? 우리는 은혜의 풍성함을 이야기하면 거의 전부다 세상 사람들도 좋아하는 것들을 은혜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이 다 은혜입니다. 천지를 만드시고 햇빛과 비를 주시고 심고 거두게 하시며 먹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는 신자나 불신자가 다 함께 받고 있습니다. 신자는 이것을 은혜로 알지만 불신자는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신자가 받은 은혜의 풍성함이 무엇입니까?

 

7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헬라어 원문에서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8절의 넘치게 하사를 함께 붙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넘치는 은혜의 풍성함입니다. 이렇게 넘치는 은혜의 풍성함이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으로 우리의 평생에 감사하고 영원토록 감사해도 부족한 풍성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요나서 4:1-11절을 봅니다. “봉독” 요나가 니느웨 성이 망하지 않고 회개하는 것을 보고 사는 것 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그래도 혹시 성읍이 망하는지 보려고 성읍 동편에 초막을 짓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예비하여 시원하게 해 줍니다. 요나가 기뻐합니다. 그 다음날 박 넝쿨을 벌레가 줄기를 씹게 하여 말라죽게 하시고 뜨거운 동풍을 보냅니다. 너무 뜨거워 죽을 지경이 되자 정신까지 혼미해져 스스로 구하기를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 박 넝쿨로 성 내는 것이 옳으냐고 합니다. 요나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심지도 않고 가꾸지도 아니한 박 넝쿨이 하루 밤 사이에 자라 말라버린 것을 네가 아꼈는데 이 니느웨 성의 수많은 사람들과 짐승들을 내가 아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하나님의 말씀에 요나는 유구무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요나서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주간 동안 무엇 때문에 죽을 정도로 성을 내었습니까? 박 넝쿨보다 더 사소한 일로 인하여 죽고 싶다고 발악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못살겠다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의 풍성함을 어디다 팔아먹은 것입니까? 이단은 두 세 달 만에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잘못된 신념을 목숨처럼 여기고 따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수십 년 믿어도 어떻게 은혜의 풍성함을 모르고 살아갑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의 풍성합니다. 그런데 그의 피로 인하여 구속을 받은 이 죄 사함의 은혜가 그렇게 사소한 일들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은혜를 받지 못하였든지 아니면 은혜를 받았지만 아직도 세상의 가치관이 빠져나가지 못하여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후자는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깨달으면 되지만 전자는 풍성한 은혜를 말해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

 

은혜의 풍성한 속량이 얼마나 귀한지 베드로전서 1:18-19절을 봅니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세상은 돈이면 다 통합니다. 그러나 은과 금으로 구속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보배입니다. 이 은혜의 풍성함이란 단지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량으로 인하여 얼마나 엄청난 하늘의 신령한 복이 주어졌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8:18-30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속량 받은 은혜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입게 합니다. 그 아들의 형상은 영화로운 것입니다. 그 영광이 나타나기 까지는 성도가 고난을 당합니다. 이 고난은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여 영원한 아들의 영광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는 이미 하늘에서 완성이 된 것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자는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아들의 영광을 입을 날을 사모하며 간절히 그날이 오기를 소망하면서 땅에서는 탄식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자들은 이 세상의 신에게 속아서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줄 알고 눈에 보이는 것만 평생을 추구하다가 이 세상이 불 탈 때에 함께 타는 것입니다. 지금 지옥의 소리라는 음성 파일을 만들어 인터넷에 유포시킨 것으로 말이 많습니다. 목사와 여 전도사가 지옥의 소리를 보고서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말하면서 유명 인사들을 언급하여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지옥은 성경이 분명하게 증거 하는 바이지만 그 사람이 직접 보았다는 지옥은 엉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성경이 아닌 지옥과 천국 이야기를 하시거든 전설의 고향에서 말하는 지옥과 극락을 꿈에서 상상으로 보았구나 하면서 넘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로 인하여 사탄이 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옥이 없다는 것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돌리게 합니다. 지옥의 소리라는 것을 취재하여 보도한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여전도사의 음성을 분석하면서 정말 고통을 받는다면 그런 목소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해산의 고통 중에 부르짖는 소리를 녹음한 것과 비교하면서 지옥의 소리라는 것은 고통을 꾸민 소리라고 합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지옥의 고통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 꾸며서 만든 소리입니다. 그리고 지옥은 지구의 핵 속에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성경에 없는 것이니 믿으면 안 됩니다. 이런 것을 취재하면서 그 보도의 결론은 지옥이 없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성경에서 지옥이 어떤 곳인지 말씀하시는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마가복음 9:43-49절입니다.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지옥이 얼마나 두려운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는데 사람이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범죄 하게 하는 손과 발을 찍어내고 범죄 하게 하는 눈을 뽑아서라도 지옥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죄를 지은 손과 발을 찍어 낸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중에 누가 눈을 뽑은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의 눈이 안목의 정욕으로 살아가는데 말입니다. 눈 하나도 뽑아내지 않고 지옥에는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눈을 뽑아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탐심을 무슨 수로 막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과 자랑과 이 세상의 자랑거리를 추구하다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입니다.

 

지옥에 관한 말씀을 몇 곳만 더 봅니다. 유다서 3-7절입니다. “봉독”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기 몸을 드리심으로 영원한 구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만드는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 넘치는 은혜의 풍성함을 이야기하는데 이런 은혜를 자기 육체의 기회로 삼아서 방탕 하는 자들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로서 옛적부터 심판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결국은 자기 지위와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어 두신 곳에 함께 가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는 거울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 넘치는 은혜의 풍성함을 받은 것이 얼마나 엄청난 복인지 아시겠습니까? 이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다면 우리 평생에 어떤 고난이 온다고 할지라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이 온 세상에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천국도 지옥도 없는 사람처럼 그저 이 세상에서 나 하나 편하고자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조금이라도 손해가 오면 견디지 못하고, 조금만 자존심 상해도 교회도 오지 않는 모습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1:1-10절을 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믿음이 자라고 서로 사랑함이 풍성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믿음과 사랑이 풍성한데 박해와 환난을 당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사랑이 풍성하면 환난도 없고 박해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으로 세상에서 박해와 환난을 받습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를 싫어하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가 됩니다. 그 은혜로 인하여 환난을 당하는 자는 하나님의 안식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당하게 하는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언제 그렇게 됩니까? 주 예수께서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기도합니다. 11-12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자기 피로 속량하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그 영광의 주를 더욱 깊이 알아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