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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17-21 믿음 안에서 사는 것 2011. 11. 6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지난주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여기서의 믿음이란 내가 주체가 되어 믿어주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언약을 신실하게 다 이루어 내신 것을 은혜로 믿게 되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누구도 자신의 믿음이 자신의 행위나 공로인양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가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삽니까?

 

지난주에 바울사도가 베드로를 책망한 이유는 베드로와 그 일행들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의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로 인하여 외식한 일로 책망하였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데 다시 율법적인 행위로 돌아가는 베드로를 향하여 공개적으로 책망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적인 행위로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 복음을 허물게 되는 것이라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주장에 대하여 율법주의자들이 반박을 합니다.

 

이런 반박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주의 전통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이 복음 전하는 곳 마다 따라다니며 핍박을 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요즈음 신학자들의 용어를 빌리면 신율주의자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믿음으로 얻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살아갈 때에 율법은 생활의 규범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제사법과 유대인의 시민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도덕법이라고 하는 십계명은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분류하지 않지만 신학자들이 그렇게 합니다. 이런 것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봅니다.

 

17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고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고 합니다. 이런 반문은 어떤 공격이 있었기에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으로 인하여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이방인과의 식사를 하는 것은 죄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율법에서 하라고 하는 할례를 행하지 않는 것도 죄가 아니냐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공격이 있습니다.

 

이러한 공격에 대하여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는 예수님이 죄를 짓게 하느냐고 반대질문을 하면서 18절에서 만약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다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다 받아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완성이 되었습니다. 율법의 요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주장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 율법의 요구를 주장한다면 내가 범법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1-9절을 봅니다. “봉독” 8장까지 연결하여 보아야 합니다만 오늘 본문의 이해를 위하여 이 부분만 봅니다. 법을 아는 자들이란 유대 율법에 전통한 자들을 말하지만 세상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가 되지만 남편이 죽었다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낫기에 다른 남자에게 가더라도 음녀가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음을 당한 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전에 율법을 지키며 살 때가 육신에 있을 때라고 합니다. 이때는 율법의 기능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율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며 우리는 죄 가운데 가두는 역할을 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에 육신에 있을 때에 법을 깨닫지 못하였을 때에 자신이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산 자로서 율법을 지켜서 더욱 의인이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율법을 깨닫고 나니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이란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은 자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몽학선생인데 오히려 율법을 지킨다고 여긴 그 때에 예수님을 핍박하였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19절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2:20절과 연결이 됩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어떻게 내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 것입니까? 이것을 묵시와 역사라고 합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 속에 갇혀 삽니다. 이런 우리를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시고 시공을 초월하시는 묵시적인 인물인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이 자신과 함께 못 박혔다고 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세상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들이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그 인간들은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막고 있으니 그들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함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끊어져 있기에 나올 것이라고는 자기들의 제한된 자원으로 살 수 밖에 없기에 오직 눈에 보이는 것에만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복음을 듣고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맺은 아들과의 언약대로 그 십자가의 피로 재 창조하셔야만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은혜의 선물이기에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이며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죽었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 엄연히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지각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내가 만져지고 느껴지고 생각하고 여기는 것을 우리는 살아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살아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꿈은 아닙니까? 그래서 모든 것을 의심해 보겠다고 나선 사람이 데카르트라는 철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결론을 내리기를 모든 것을 다 의심하지만 의심하고 있는 나는 의심할 수가 없다는 이것을 진리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습니다만 그렇게 의심하며 생각하는 그 존재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라는 사실은 결코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것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이며 나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말입니다. 나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내가 소원하고 욕망하며 살아가는 모든 것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 안에서는 계속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살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살기 보다는 여전히 내가 주인이 되어 나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나오는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갈등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어 있기에 이런 갈등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고 금욕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너를 죽은 자로 간주하고 다루어 가겠다는 예수님의 의지입니다. 좀 유치한 예를 들겠습니다. 아주 말썽꾸러기들이 모인 교실이 있습니다. 어느 선생님의 말씀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의 전설과 같은 무서운 선생님이 계십니다. 이 선생님이 떴다고 하면 아이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합니다. 이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면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오늘 너희는 죽었다고 복창해라’입니다. 그러면 이 선생님이 이 아이들을 진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조용하게 공부하도록 만들고야 말겠다는 선생님의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언제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난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말립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죽은 자로 다루어 가겠다는 예수님의 의지요 예수님의 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나는 아직 육체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렇게 육체 가운데 살아가지만 이제는 나를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제 방금 베드로의 경우를 말씀드린 대로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젊어서는 자기가 스스로 띠를 띠고 다녔지만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를 띠우고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가리라고 요한복음 21:1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는 어떻게 믿음 안에서 살았습니까? 갈라디아서 6:14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믿음 안에서 사는 모습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살아왔고 하나님을 위한 열정은 그 어떤 자들보다 더 특별하였지만 그 모든 것을 이제 배설물로 여기고 해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가장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이런 수준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우리를 다루어 가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나는 세상이 좋다고 달려가는데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질투하시기에 그 쪽으로 가지 못하게 막으십니다. 막는데도 자꾸 졸라대면 세상으로 가도록 허락도 해 주십니다. 마치 둘째 아들처럼 유산도 챙겨주셔서 창기와 다 말아먹고 거지가 되어 죄인 인줄 알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자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이들이 아직도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교회란 모두가 잃어버렸다가 찾아냄을 당한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감히 자기 자랑이 나온다는 말입니까?

 

성경 한곳 만 봅니다. 야고보서 4:4-6절입니다. “봉독” 간음하는 여자는 여자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한 말씀입니다.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과 벗이 되려고 하니 하나님의 질투가 나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질투하십니까? 우리 안에 계신 그 영을 질투하시도록 그리워하시기에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은혜가 나로 하여금 세상에 대하여 절망하게 하시고 최종적으로는 세상 자체도 불살라 버리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을 주님께서 확인시켜 주심을 당하며 사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도 아주 조금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자랑하는 나로 인하여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확인시키십니다. 죄에 대하여, 자아에 대하여, 자존심에 대하여, 이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죽은 자 임을 날마다 확인시켜 나가시는 과정이 믿음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게 되고 또한 믿음 안에 사는 것이 우리의 행위대로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