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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13-15 자유와 종노릇   2012. 1. 29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라디아서는 자유의 헌장이라고 할 정도로 자유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자유, 자유롭게, 자유인이라는 단어까지 포함하여 57번 나오는데 그 중에 짧은 본문이 갈라디아서에서 11번이나 나옵니다. 그 동안 보았던 말씀에서 자유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잠시 살펴봅니다. 먼저 갈라디아서 2:4절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진 자유를 엿보고 종으로 삼기 위하여 들어왔다고 합니다. 복음으로 자유롭게 된 자들을 다시 율법의 종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3:28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합니다. 이것이 참된 복음이 주는 자유의 능력입니다. 4장에서는 자유에 대한 말이 가장 많이 나오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을 말합니다. 이스마엘이 육체를 따라 났고 이삭은 약속으로 나왔습니다. 육체와 약속을 따라 났다는 것이 오늘 말씀과도 연결이 됩니다. 약속으로 받은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5: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봅니다. 바울사도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형제이지요! 이렇게 형제로 부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위하여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자신이 예수님을 선택하여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듯이 갈라디아의 형제들도 그들이 예수님을 선택하여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그들을 택하여 부르신 것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를 위하여 부르셨다고 할 때에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자유가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자유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유라고 하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인 줄 압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고 태어납니다. 처음 사람 아담은 자유가 있었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금지한 선악과를 선택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유를 잘 못 사용한 것이 됩니다. 이 자유에 대한 유혹은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에 넘어간 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타락한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죄와 사망이라는 권세아래 사로잡혀 태어나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자유를 외쳐도 근원적인 해결이 안 됩니다.

 

에베소서 2:1-10절을 봅니다. “봉독” 먼저 1-3절을 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 증세가 무엇인가 하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을 자를 따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란 살과 근육과 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을 말합니다. 이런 인간이 자기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이것을 막으면 자유를 억압한다고 하면서 자유를 외칩니다.

 

그 결과로 파생된 자유들이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아이들은 부모의 바른 소리를 잔소리로 듣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자유를 간섭하는 잔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박하지 못하고 그대로 들어준 것은 혹시 저주를 받을까 봐서, 복을 받지 못할 까 봐서, 지옥 갈까 두려워서, 목사가 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르려고 애를 썼는데 복음을 듣고 보니 괜히 그런 말에 겁을 먹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복을 받고 안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기자 이제 담대해졌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두려워서도 주일을 빼먹거나 헌금을 빼먹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자유라고 하면서 마음대로 합니다.

 

이런 자유를 육체의 기회라고 말하면서 이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결론을 내리면 오늘 본문을 가장 간단하게 설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또다시 다른 육체의 기회를 잡기 위하여 우리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갑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머릿속 계산기는 돌아간다는 칼럼을 보신 적이 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않는 것인가를 자기 법으로 또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항상 자기의 법에 자기가 채점을 하면서 후하게 점수를 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런 모습인가 하면 인간은 한 번도 타락 이전의 경험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타락한 본성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본질상 진노의 자식입니다. 성경의 법을 해석하고 적용해도 자기 마음의 육체를 따른 것입니다.

 

4-10절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는데 오직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이것은 묵시적인 세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이 시간과 공간속에서 우리의 몸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서는 다 경험하지 못하고 약속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자기 백성에게는 반드시 성취가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떼어내셔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만들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미 확증된 묵시를 가지고 역사 속에서 만들어가고 있는데 그 과정을 고난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는 세상에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향하여 세상을 버리고 사는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일에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동안 생각한 자유는 완전히 차압당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위하여 사로잡힌 자가 바로 자유인입니다.

 

이 자유에 대하여 요한복음을 8:31-59절을 봅니다. “봉독” 31절에서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이 진리이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에 예수님의 말씀 안에 살면 진리가 자유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을 믿어야 자유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따라 나선 유대인들조차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33절에서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본 대로 여종의 자식인 이스마엘의 후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를 보고 자유롭게 되리라고 하시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35절입니다. 죄를 짓는 자 마다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죄를 짓지 않는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다 죄의 종이라는 말씀입니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한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종의 아들을 쫓아내라는 말씀이 기억나지요! 그런데 어떻게 자유를 얻느냐는 문제입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키며 할례를 행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여기는 자들이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는데도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의롭다고 여기는 그 모습이 바로 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아들이 자유롭게 하여야 참으로 자유로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너희가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너희 아버지가 마귀라서 그렇다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격분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허물과 죄로 죽었고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사로잡혀 있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자신의 자유를 위하여 산다고 하지만 실상은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예수님께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백성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빌립보서 2:5-절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영광의 주님이 자기를 비워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 참된 자유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반드시 예수님의 이 모습이 그 사람에게 덮쳐져 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부르셨는데 그 자유가 예수님의 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한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종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참된 자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또한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의 완성으로 주어지는 이 자유를 자기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시면 자기 백성들도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빌립보서 2:3절입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이 아니고 내가 남보다 낫다고 여기신다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봅니다. “봉독”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말씀을 보았습니다.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 자유를 가지고 자신의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씀을 에베소서와 요한복음과 빌립보서를 통하여 보았습니다. 무엇이 자유이며 무엇이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완성하시고 자기 백성들에게 이 완성된 은혜를 성령을 통하여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종이 되어 형제를 섬기는 것을 자유로 여기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9:9절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의 출신 자체도 요한복음 8장대로 자유인입니다. 그리고 태어나면서 로마의 시에서 태어났기에 로마의 시민권도 있는 자유인입니다. 그러니 율법으로도 로마법으로도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자유라는 것도 예수님 앞에서는 쓰레기임을 알고 참된 자유는 예수님 때문에 얻었습니다. 이제는 참된 자유인이지만 그런데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얻은 이 자유를 증거 하기 위하여 스스로 종의 자리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자유하게 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베드로전서 2:16절입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처럼 으뜸 되기를 좋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하여 달라고 할 때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신경질 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베드로를 자유하게 하시기 위하여 종의 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 이루심의 혜택을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통하여 부어주시니 이런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유가 있으나 자유를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합니다.

 

죄란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자유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자신의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선언 한 것이 죄임을 알고 하나님의 종의 자리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한번 도 참된 자유를 맛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자유를 사용하시고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함으로 이런 자유를 맛보게 되는 자가 성도입니다.

 

고린도후서 5:14-15절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런 사랑의 강권으로 인한 자유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