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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16-18 성령을 따라 행하라 2012. 2. 5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지난주에 설교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유와 종노릇이었습니다. 그러면 지난 한 주 동안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며 사셨습니까? 일일이 대답할 수 없으니 제가 몇 가지 예측 하여 말하여 보겠습니다. 첫째, 설교 듣고 예배당 문 여는 순간 찬바람이 휭 몰아치니 제 정신(?)이 들어와서 말씀은 다 잊어버렸다. 둘째, 내가 그렇게 살려고 열심히 노력해 보았지만 되지 않았다. 셋째,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일이 늘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잠시나마 일어났다. 넷째, 늘 사랑으로 종노릇 하였다. 여러분은 몇 번에 체크 하실 수 있습니까? 거의 대부분이 1번이고 아주 소수가 2번이고 거의 없는 것이 3번일 것입니다. 4번은 접근도 되지 않지요!

 

설교시작부터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하는가 하시겠지만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을 우리의 육체의 소욕이 싫어하기에 이런 복잡한 경우가 나오는 것입니다. 지난주 본 갈라디아서 5:13절을 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기 위하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율법적인 접근이 있습니다. 옛 언약의 방식인데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한 것은 하고, 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하지 않으면 된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둘째, 첫째와 같은 방법은 유대인들이 실패하였기에 이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으로서 거듭난 양심과 이성을 따라서 이런 모든 말씀을 순종할 수 있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하지 않기에 거듭난 내가 주체가 되어서 열심히 노력하지만 부족할 때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성령은 가만히 계시다가 도와달라고 할 때만 도와주는 도우미의 역할만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문제인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두 가지 다 결국 어떤 결론으로 나오는가 하면 자기 육체의 자랑으로 나오게 됩니다. 육체의 자랑이란 자기 영광을 말합니다. 16절을 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육체의 욕심이 무엇일까요? 19-21절에 나오는 이런 것들이 육체의 일이지만 육체의 소욕이란 이런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아주 고차원의 내용들로 나타납니다. 참으로 경건해 보이고 신령해 보이지만 그것도 육체의 욕심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육체의 욕심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보아야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과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이 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르고자 하는 결과는 반드시 자기 영광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그렇게 지켰습니다. 그들은 입만 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히 대단한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4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이 말씀 앞뒤를 보시면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보고 지킨다고 하지만 이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이 증거 하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서로 영광을 취하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전적인 죄인이라서 예수님의 전적인 공로가 아니면 나는 지옥 가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믿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자기 영광이 일절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면 사람들의 열심을 촉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로 목회자들의 발상이 그러하겠지요! 그래서 무엇을 추가하는가 하면 이제 예수 믿고 나서 거듭난 사람으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옛날 율법 시대에 못하던 것을 이제 거듭난 우리가 이루어낼 수가 있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육체의 욕심이 되는지를 방금 율법을 지키는 자들의 경우를 통하여 자기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말로서는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무엇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25-26절을 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기 말라고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과 반대되는 개념인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것이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헛된 영광이란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이 서로 자기들의 영광을 취하느라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서 거듭났다고 말은 하지만 거듭난 나 자아를 꾸미고 치장하는 일에 얼마든지 성경을 동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율주의도 나오고, 금욕주의도 나오고, 신비주의도 나오고, 심지어 복음 안다는 것으로 자기 치장하는 또 다른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교회들마다 온갖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들을 추구하지만 과연 그 영광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십자가에 못 박하신 아들에게 무릎을 꿇는 영광입니까? 자기의 이름은 죽은 자가 되고 예수님의 이름만이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만 갖다 부치고 그 속내는 자기의 영광입니까? 유대인들이 잘못된 하나님의 영광 관으로 참된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듯이 오늘날도 인간들이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일들이 허다하게 일어납니다.

 

저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수백 명이 설교를 클릭합니다. 그러면서 지구 각처에서 연락이 옵니다. 불만도 말하고, 상담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 저에 대하여 좋게 말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결국 무엇에 관심이 갑니까? 나의 이름에 영광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터넷 폐쇄해야 합니다. 전에도 예를 들었지만 신혼집에 가서 결혼 앨범을 볼 때에 어느 페이지에 시간이 가장 많이 걸립니까? 신랑신부의 사진이 아니라 단체사진의 구석진 자리에 보일 듯 말듯 한 자기가 잘나왔는지 아닌지 그것 보느라 시간이 제일 많이 걸리는 것입니다.

 

가톨릭 전통인 교회력을 따라 설교를 하게 되면 예수님의 공생애와 맞추어서 절기처럼 지키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 중에 사순절이 있습니다. 사십 일 동안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가톨릭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이방인들을 기독교화 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축제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색을 입힌 것인데 원래 카니발은 라틴어의 카르네 발레(carne vale:고기여, 그만)가 어원입니다. 앞으로 40일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아야 되니 그 전에 집안에 남은 고기를 다 처분하기 위하여 마음껏 고기를 먹고 축제를 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카니발이라고 하면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먹고 마시는 축제가 된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인간이 금욕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눌러놓으면 다른 욕구로 분출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2:20-23절입니다. “봉독” 세상의 초등학문, 사람의 명과 가르침들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23절에서 자의적 숭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여 만들어낸 하나님 숭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스스로 만들어낸 온갖 규칙과 법들입니다. 자의적인 숭배를 하는 것으로 겸손도 사람이 행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몸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금식과 철야와 온갖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데 이것이 겉으로 보기에 육체의 욕심을 없애는 지혜로운 모양 같지만 그러나 육체를 따라는 것을 금하는데 조금도 유익이 없다는 말은 그렇게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금욕을 통하여 육체의 욕심인 자기 영광을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결국 육체의 욕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도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야 한다고 합니다. 출세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세상의 원리인데 이런 세상의 원리가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영광만이 드러나야 하는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서는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결국 사람들의 자기 영광 챙기기로 나가는 것입니다. 찬송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고 합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다고 합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혼자서 아간이 돌 맞아 죽은 그런 골짜기로 가시겠습니까?

 

그러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약의 책이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신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님께 성령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습니다(요3:34). 그 결과 예수님은 한 번도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아버지의 이름과 그 영광만을 위하여 일하신 것입니다. 단 한번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되는지에 대한 간구를 하셨지만 그러나 결국은 내 뜻대로 하지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성령을 부어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행2:33).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요한복음 16:8-15절을 봅니다. “봉독” 죄와 의와 심판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책망을 받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진리의 영이시기에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그 성령은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며 오직 들은 것을 말씀하시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성령이 임하여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는 반드시 누구의 영광을 나타내게 됩니까?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아버지께서 성령을 예수님께 한량없이 부어주셔서 예수님의 뜻대로 사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서 십자가에 죽기 까기 복종하게 하시는 길로 가신 것처럼 오늘 자기 백성들에 성령을 부어주시면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연합되어 함께 죽고 함께 살고 함께 하늘에 앉혀진 묵시적인 존재가 되었기에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제 자기 이름의 영광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 드러내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계속하여 자기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항상 육체의 소욕보다 성령의 소욕이 더 강하고 영원하시기에 자기 백성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자기 영광인 아들의 이름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 과정을 고난 또는 환난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8-9절을 봅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만났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울이지만 그 속에서 자기를 의지하려고 하는 육체의 욕심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환난을 주시는데 어느 정도로 주시는 것입니까?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제 나는 죽었다는 말이 날마다 나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이 다만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따라 행하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에게서, 바울에게서 이런 모습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는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즉 자기의 일체의 가능성과 행위를 의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는 반드시 자기 이름의 영광이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모습입니다.

 

갈라디아서 5:17-18절입니다. “봉독”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충돌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소욕은 예수님을 믿게 만드는 일인데 육체의 소욕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인간이 자기 자원으로만 살아가는 죄악의 근원된 모습이 우리의 살과 뼈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자기의 가능성을 믿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기에 율법 아래 있지 않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