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9:1-5 할렐루야 2010. 1. 31

 

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3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4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세상이 무너진 현장을 보면서 할렐루야라고 한다면 이것은 인간적으로 너무 냉정하거나 가혹한 것이 아닙니까? 아이티의 무너진 현장을 보면서 할렐루야라고 한다면 정신이상자로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아이티 정도가 아니라 전 세계가 다 무너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할렐루야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만 세 번이나 나옵니다.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무너진 것을 보고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우리가 전도 받을 때에 들은 말씀이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얼마나 하나님다우십니까?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자기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는 신자든 불신자든 좋아하여 한때 전화벨 소리 다운받기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을 보는 것은 인간 중심적으로 인간을 좋게 하기 위하여 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어져 나오는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17-21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이 독생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한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지만 그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기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이라는 말은 정죄와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빛이 세상에 왔지만 자기 행위가 악하기에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정죄를 당하는 것입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기에 빛으로 오지도 않고 그 빛을 꺼버리고 추방하여 버린 것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은 사람들이 어둠을 더 사랑한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그 십자가로 나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좀 복잡해 진 느낌이 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면 누구나 다 믿게 하셔야 하면 그게 더 사랑일 텐데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자기의 능력으로 믿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드러낸 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행하시지 않으면 사람들은 모두가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본성상 어둠을 더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정죄를 당하고 심판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분을 믿지 않기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믿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싫다고 배척하여온 세상이기에 이 세상이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7장에서 18장은 이런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바벨론의 멸망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바벨론이 무너져 내릴 때에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편은 슬피 울며 통곡하는 자들이 있고 한 편은 즐거워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슬퍼하며 통곡하는 자들은 바벨론과 무역함으로 함께 부귀와 사치를 누리던 세력들입니다. 이들이 믿던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통곡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무너질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다시 확인해 봅니다. 계시록 18:20절입니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의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고 합니다.

 

비록 땅에 발 딛고 살지만 그 소속이 하늘에 속한 성도들이라면 이 세상이 심판을 당하고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자신이 아직도 세상과 하나님 사이가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구분을 하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원수란 진멸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원수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일본 강점기 시대 때 양식을 수탈당하고 놋그릇 놋수저마저 공출당할 때에 반항하다가 총칼에 죽은 사람의 가족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아니면 지금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수요일 마다 데모하는 정신대 할머니들이 우리의 할머니라면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져서 멸망하는 것을 보고 어떠하였겠습니까? 기뻐서 춤을 덩실덩실 추었을 것입니다. 잘 망했다고 얼마나 기뻐하였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친일매국노가 된 사람들은 슬피 울며 가슴을 치며 일본의 패망을 통곡하였을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시대가 지나고 해방과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군이 점령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남한은 미군정이 시작되고 지금까지 미군이 주둔하여 있는 나라입니다. 미국을 마치 하나님마냥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군에 의하여 무참하게 폭행당한 우리의 누이들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미국이 무너졌다는 소리가 기쁜 소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우리들도 누구를 해친 사람이 되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서는 한마음으로 싫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를 봅시다. 그때는 로마라는 대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평소에 십일조나 성전세만 내면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을 옳으냐? 그러냐고 합니다. 옳다고 하면 유대인을 위하는 자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르다고 하면 로마의 반역자로 몰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 3의 답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답변은 그들로 하여금 빌미를 주지 않는 답변이기도 하시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로마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땅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 땅에서는 사람들마다 자기들의 나라에 대한 신념이 종교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파스칼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이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행할 때 일수록 기쁨에 넘쳐 철저하게 악을 행한다.” 종교적인 신념을 가지고 행하는 것은 자기들은 기쁨에 넘치는 행위인데 그것이 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 말입니다. 친일이든 반일이든, 친미이든 반미이든, 친 이스라엘이든 친 로마이든 간에 모든 단체들은 자기들이 소속된 곳을 진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 누구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서로 진리라고 으르렁 거리며 싸우든 자들이 갑자기 공동의 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자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어 합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죽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23:7절입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사도행전 4:27-28절입니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헤롯과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이 ‘합세’하여-한글개역성경에서는 ‘합동’이라고 함-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결단코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인류애로는 이런 말씀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여야만 이런 시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장은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 하다가 핍박받을 때에 한 말입니다. 시편 2편에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서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한다는 말씀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지금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런 하소연이 하늘에 상달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9-11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의 하소연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면서 잠시 쉬라고 합니다. 아직 순교의 수가 차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요한계시록 18장에서 그 원수를 갚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18:24절에 이 세상인 바벨론이 망하는 이유가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자들의 피가 그 성중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멸망을 당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교회라고 모여 있는데 과연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모인 것입니까? 과연 나의 나라와 나의 의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의를 구하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까? 십자가마을 겨울 수련회에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이 교인에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목사가 예수님! 지금 한번 나타나셔서 보여주세요! 그러면 예수님이 짠하고 나타나면 얼마나 동업이 잘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인데 그런 예수님 쳐다보고 사느니 우리끼리 한번 교회를 잘 꾸려보자는 생각으로 모인 곳을 교회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난데없이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이 지금 살아서 일하고 계시는 것을 생생하게 믿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이 생생함보다 더 확실하게 예수님이 살아서 지금 일하고 계시는 것을 보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만사가 빈틈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에서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 자체가 무너진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19:1절에서 ‘이 일 후 에’ 즉 바벨론 멸망 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떤 큰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까? 첫째 할렐루야의 찬송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 찬송의 소리는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과 같은 것입니다. 그 내용은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다는 것입니다.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신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서론으로 말씀드린 그 내용들이 이 찬송의 내용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두 번째로 할렐루야가 들립니다. 그러자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갑니다. 이 연기란 심판을 당한 바벨론이 불타는 연기입니다. 그런데 이 불이 꺼지지 않고 세세토록 올라간다는 것은 바로 지옥의 형벌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옥의 불이란 한번 타고 꺼지는 불이 아니라 세세토록 불이 타는 것이기에 세세토록 연기가 올라가는 것입니다. 심판하시는 분의 심판이 참되고 의롭기에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세 번째 할렐루야는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찬송합니다. 아멘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아멘이란 진실로 그러합니다하는 뜻입니다. 구원과 영광과 능력과 심판이 모두 하나님께 있다는 것의 찬양에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보좌에서 음성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입니까? 그를 경외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모든 일에 할렐루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에도 할렐루야이며 심판에도 할렐루야입니다. 이런 찬송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만 가능한 찬송입니다. 이 찬송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