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4:45~51 청지기 2017. 7. 23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3)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이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그 날과 그 때를 미래적인 시간으로 계산하여 날짜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 날과 그 때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시간을 예측하거나 특정한 징조들을 보면서 재림을 맞이하겠다는 생각은 성령이 임하기 전의 제자들의 생각과 같은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이후에도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언제인지를 물었습니다(1:6).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오심 곧 메시아의 초림이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이나 선지자나 시편에서 메시아 오심을 문자적으로 보면 혈육의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볼 수가 있는 곳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하기 전 육적 이스라엘의 한계이며 제자들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질문하자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에 말씀하신 내용을 다시 말씀하십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에 있으니 너희가 알바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 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1:8). 여기서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의지입니다. 성경의 모든 명령은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이런 일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임하게 되자 사도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를 알라는 말씀입니다. 회개란 율법지킴으로 의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양심의 행위로도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율법의 의이든 양심의 의이든 이런 것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죄가 어떠함을 먼저 아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자기들의 혈과 육으로 이루어내는 율법적인 나라를 생각하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다들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자신들이 어떤 죄인인지를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오늘 본문 45~47절을 봅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이 맡긴 그 집안을 잘 돌보면서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자가 누구냐고 하십니다. 여기서 종이란 노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볼 때에 노예라는 생각보다는 교회의 직분을 먼저 생각합니다. 교회의 직분 자는 상당한 기간 교회를 다닌 사람이며 교회에 어느 정도 공헌이 있어야 직분자로 세웁니다. 임시직인 서리집사도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기준은 주일성수와 십일조 정도는 해야 합니다. 이런 직분 자를 대상으로 일 년에 한두 번 세미나를 합니다. 흔히 청지기 세미나로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청지기 역할을 잘 해야 상을 받지만 그렇지 못하면 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종이라는 단어는 노예입니다. 이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노예란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있습니다. 시키는 일을 마땅히 해야 합니다. 만약에 종이 게으름을 부리거나 시킨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매를 듭니다. 이런 매를 맞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은 깨어있으라는 말씀을 주인이 종에게 집안의 일을 맡긴 것으로 말씀합니다. 주인이 어디 멀리 떠나면서 종에게 집안의 일을 맡긴 것입니다. 이 종이 주인이 시킨 대로 그 집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일을 잘 하고 있으면 주인이 돌아올 때에 그 종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입니다. 그런 자들이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48~51절입니다.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과 반대되는 악한 종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은 주인이 언제오시든지 상관없이 맡겨진 청지기의 일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악한 종은 주인이 늦게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동료들을 때리고 술친구와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는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주인이 이르는 것입니다. 그때 주인이 그 종을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할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제가 전도를 해보면 사람들은 아직 좀 있다가 믿겠다고 합니다. 지금은 바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죽기 직전에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아직도 건강하게 오래 살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 세상에 즐길 것이 많은데 일요일마다 교회당에 가서 종교 생활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제가 말씀드립니다. 어떤 부자가 수확이 많아서 창고까지 늘려서 자기를 위하여 쌓아두고는 내 영혼아 평안이 먹고 즐기자고 한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면 이 쌓아둔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고 전도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인색하고 자기에 대하여 부요한 자의 모습이 이런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모습으로 산다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지난 금요일 관리소장이 강대상 뒤 베란다에 풀이 많이 자랐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가보니 빗물 내려가는 하수구에 먼지가 쌓였고 그곳에 풀씨가 날아와서 수풀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풀을 뽑는데 비둘기 알껍데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살펴보니 비둘기 알 하나는 수정이 안 되어 깨어졌고 한 마리는 배가 부풀어서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겨우 한 마리가 솜털만 난 채로 꼼지락 거려서 풀을 깔아서 두고 나왔더니 나중에 비둘기가 와서 보호하는 것을 봤습니다. 비둘기가 자기가 살고 있는 그 풀들이 날아갈 줄을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주님 오심을 정말로 생각하면서 살아갑니까?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이것은 아직 청지기가 아닙니다. 종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에 도움을 주는 신을 필요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일에 도움이 안 되는 신은 필요 없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모습이 죄 아래 있는 인생들이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믿고 산다는 것이 나는 종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은 주여! 주여! 라고 하지만 내가 주인이 되어 있는 채로 부른다면 이것이 외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1절을 다시 봅니다. 깨어 있지 않는 악한 종을 어떻게 벌하십니까? 엄히 때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엄히 때린다는 단어의 각주를 보면 쪼개버린다는 표현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이 살려온 아각 왕을 찍어 쪼개어버린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표현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이 당하는 내용 중에 칼로 죽임을 당하는 그런 말이 엄히 때린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할 것인데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악한 종이란 술을 마시고 동료를 때리고 양식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는 모습만이 아니라 겉으로는 가장 거룩한 척 하지만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믿지 않는 자들도 말합니다.

 

어떤 목사가 신학교 공금 30억 횡령과 사문서 위조로 징역 46개월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억울하다고 항소를 하였습니다. 항소심에서 재판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 가운데는 참 목사와 거짓 목사가 있는데, 피고인은 목사의 도리를 지키지 아니한 거짓 삯꾼 목사가 아닌가 의심된다. 성직자는 일반인보다 도덕성이 높아야 한다. 그런데 피고인은 주일날까지 도박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카지노 워커힐에서 51억을 땄지만, 93억을 잃었다. 강원 랜드에서 77억을 쓴 증거도 있다. 탕진한 돈은 성도의 피 묻은 돈이었다. 신의 돈을 도둑질한 것과 같다. 수시로 말을 바꾸는 등 반성은 전혀 없었다. 인간의 법정에서는 이걸로 끝나지만, 앞으로 양심과 신의 법정에서도 심판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피고인에게 징역 49개월을 선고한다."

 

판사가 목사에게 신의 법정에서도 심판을 받을 날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목사도 하나님의 영광을 입에 달고 살았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목사이지만 그 속은 도둑놈입니다. 이런 모습이 외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이런 목사는 거짓 목사라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이런 목사는 자신이 종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교단과 신학교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말로는 주를 믿는다고 하지만 정말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맞습니까? 나의 시간, 나의 물질, 나의 몸이 누구 것입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행위만이 아니라 마음의 동기까지 살펴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는 행위로 드러난 것만이 죄가 아니라 그 마음의 생각도 행위와 똑 같은 죄가 됩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남을 정죄하기를 잘 합니까?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남의 눈에 티를 보는 자는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자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어떤 사람도 정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를 압니다. 이런 자들은 남을 보고 비판하거나 판단하기 전에 자기를 먼저 봅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자인지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청지기라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7:1~4절입니다.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실족에 대한 말씀을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합니다. 일곱 번이란 완전한 용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에게 불가능하기에 사도들이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5~10절입니다.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1)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용서에 대한 말씀을 듣고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며 그렇게 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문자대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말씀하시는 비유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했을 때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이어지는 말씀에서 나옵니다. 어떤 종이 시키는 대로 다 하고 나서 무익한 종이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하는 것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청지기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없다면 믿음이 없기에 외식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은 쪼개어지는 것일 뿐 아니라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오늘 본문과 평행구절인 누가복음 12:35~40절을 봅니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여기서는 깨어 있는 종을 주인이 돌아와서 대접하여 주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이 비유가 우리에게 하시는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지 묻습니다.

 

이어지는 41~48절입니다.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예수님의 대답은 사도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기다린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정말로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립니까? 휴거 소동과 시한부 종말론 자들 때문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염려하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목사들의 염려 속에 정말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기를 소원하여 이런 말을 하는지 아니면 교인들이 세상보다 교회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 말을 하는지는 주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우리가 읽은 두 곳의 말씀대로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청지기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금요일 어떤 분의 전화 상담이 왔습니다. 복음의 교제를 하는 중에 자신은 흔히 말하는 종교적이라는 교회생활을 할 때에도 눈에 보이는 세상은 잠간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하늘의 소망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십자가의 복음을 들어도 이 믿음은 그대로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학습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은혜로 주어진 믿음으로 된 것인지 의심스럽다는 상담을 작년에 했습니다. 제가 답변하기를 그런 고민이 든다는 것 자체가 주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 다시 상담을 하는데 복음의 교제를 하는 사람이 지금 그런 소망으로 사는 것이 깨어져야 한다며 그런 것도 욕심이라고 하더랍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성령이 임하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루살렘의 종말만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을 아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들은 이미 세상의 종말을 아는 자들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이 됩니다.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다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성령이 임하였다고 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자신들이 이미 진리가 되었다고 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런 자들은 지금 성령이 임하여 내가 천국으로 살고 있다는 것만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청지기로 살아갑니까? 자신이 주인으로 살아갑니까? 자신은 이미 진리가 되었기에 예수를 죽이라고 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을 보았습니다.

 

로마서 8:23~25절입니다.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들이 속으로 탄식하면서 양자 될 것 곧 몸의 속량을 기다립니다. 성령이 우리에 임한 것은 보증이며 담보물입니다(고후1:22). 이런 자들은 보이는 소망을 소망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세삼의 비전이나 꿈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런 일들이야 열심히 노력하여 살라고 하지 않아도 정말로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자들이라면 보지 못하는 약속을 참고 기다립니다. 이런 자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당연히 청지기로 살아가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1~5절입니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우리의 몸이 무너질 장막입니다. 성령이 보증으로 임하였다면 우리의 장막과 같은 이 몸의 약함과 늙어짐이 서글픈 것이 아니라 소망이 분명해 지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몸이 무너지면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영광 중에 계신 그 신령한 몸을 말합니다. 그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이 성령이 임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죽을 이 몸이 생명에게 삼켜지는 것이 성도의 죽음입니다. 이것을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을 담보물로 제공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담보가 되셨기에 이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이런 성경의 말씀을 보아도 눈에 보이는 세상과 눈에 보이는 이 몸만을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자존심과 자기의 영광을 챙기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청지기에 대한 내용을 보아도, 내가 더 열심히 청지기처럼 살아서 주인이 오시는 그 날에 내가 더 많은 상을 받고, 내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청지기 생활을 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6~10절입니다.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성령의 보증이 임한 자는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한 것을 재림으로 말하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즉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쓴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청지기의 삶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며 각각 선안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상급의 차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여 청지기로 살았는지 성령이 임하지도 않았는데 외식하면서 살았든지 하는 그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14~15절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1)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오늘 이런 말씀들이 성도에게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의 강권하심입니다. 강권이라는 단어의 각주를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끄신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를 청지기로 살게 하시는 것은 그 사랑의 이끄심입니다. 그 사랑의 이끄심이 우리에게 나타나면 나의 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고 주의 것으로 여기며 살게 됩니다. 이 사랑의 이끄심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