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1:4~35 탐욕의 무덤 2020. 7. 12

    

31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3)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32 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4)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33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34 그 곳 이름을 5)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35 백성이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행진하여 하세롯에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지난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다가 불에 살라짐을 보았습니다. 오늘도 원망입니다. 원망의 이유는 고기를 먹고 싶다는 원망입니다. 출애굽한지 한 달 만에 양식이 떨어지자 원망합니다.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이 원망을 한 후에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저녁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을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16:8). 그래서 아침에 이슬과 함께 만나가 내리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가 같다고 합니다. 이 만나를 거두어 먹기 시작한지 약 일 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런데 아직 고기를 먹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고기를 먹지 못하였다고 또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4~10절입니다. “봉독 섞여 있는 다른 인종이 먼저 탐욕을 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면서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서 먹게 할 것이냐고 합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값없이 먹은 것이 아닙니다. 노예의 품값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노예에게 이런 것을 제공하는 것은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값없이 먹었다고 합니다. 정말로 값없이 주시는 양식은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인데 이제 만나가 질렸다고 하면서 불평을 합니다. 이런 불평의 전염은 더욱 빠르게 확산되어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이 울고 있음을 모세가 들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런 모습을 보고 진노하십니다. 모세도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음의 원망을 듣고 하나님께 하소연 합니다.

 

11~15절입니다. “봉독 내가 낳은 자들도 아닌데 왜 나에게 이런 짐을 지우느냐고 합니다. 모세의 하소연을 한마디로 하면 지금 당장 죽여 달라고 합니다. 이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16~17절을 봅니다.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 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17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모세에게 임한 영을 칠십 명의 지도자에게도 임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기를 줄 것이니 여호와 앞에 소집하라고 합니다.

 

18~22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고기를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한 달 동안 먹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양떼와 소떼를 잡은 들 족하겠으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겠느냐고 합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의 손이 짧으냐고 하시면서 네가 내 말이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고 합니다.

 

24~29절입니다. “24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알리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26 그 기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영에 머물고 장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영이 임하였으므로 진영에서 예언한지라 27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전하여 이르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나이다 하매 28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의 영이 모세에게 임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표현은 위에 임하였다고 합니다. 구약의 기능적 성령의 임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임한 영이 칠십 명에게 임하니 그들도 예언을 합니다. 예언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기능적 임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에 소집되지 않은 두 사람이 장막에 있다가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을 합니다. 한 소년이 이 모습을 보고 모세에게 보고합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고 하면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서 주셔서 다 선지자 되기 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부어주실 것을 내다 본 겁니다.

 

30~35절입니다. “봉독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진중에 모세와 백성의 지도자들이 돌아왔습니다. 바람이 메추라기 떼를 바다에서 몰아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종일 종야와 다음날 낮까지 잠도 자지 않고 잡았습니다. 적게 모든 자도 열 호멜이라고 합니다. 한 호멜이 22리터라고 각주가 있습니다. 한 말이 18.6리터이니 적게 모은 자도 열 말을 넘게 모은 겁니다. 고기를 오래 보관하려고 진영 사면에 펴 두었다고 합니다. 그 고기를 요리하여 이 사이에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진노하셔서 심히 큰 재앙으로 백성들을 치십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재앙이 무슨 재앙인지 나오지 않지만 지난주에 본 다베라의 사건이 이곳의 사건이라면 불로 심판이 임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 죽은 자들이 많았기에 그곳을 탐욕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고기 먹고 싶다고 하는 일이 죽일 일입니까? 죽일 일은 아니라서 고기를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탐욕이었습니다. 일박이일 잠도 안 자고 메추라기를 잡습니다. 어떤 분은 아침과 저녁의 소제를 드리는 것을 하지 않아서 재앙이 임하였다고도 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지금 눈앞에 고기가 돌아다니는데 매일 아침과 저녁의 예배가 중요하겠습니까? 오래 전에 이 메추라기가 오만 원 권 현금이라면 우리도 그러지 않았겠느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고기를 주셔도 탐욕이 나왔습니다. 만나를 주실 때에도 더 많이 거두어 와서 남겨두었더니 그 다음날 썩어서 벌레가 생긴 겁니다. 또는 안식일에 거두러 간 자도 있었습니다. 이런 훈련을 40년 동안 시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성령이 임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기를 소원한다고 합니다.

 

요엘서 2:28~32절입니다.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5)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모세의 예언가 요엘 선지자의 예언대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이 임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부어주셔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이 임한 자들에게서 탐욕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2:44~47절입니다.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이 모습을 성령의 충만으로 봅니다.

 

사도행전 4:32~37절입니다.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5)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은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성령의 충만을 여러 가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도행전의 이런 모습이 성령의 충만 이라고 봅니다.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는 것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인인 채로 예수님을 믿어 자기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는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인간으로 불가능하기에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성령이 임한 자들은 자신의 탐심이 드러나는 동시에 그 탐심이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압니다.

 

마가복음 7:20~23절입니다.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바리새인들이 비난을 할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이러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십니까? 이러한 더러운 것들의 목록 중에 하나가 탐욕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십자가에 못을 박힌 겁니다.

 

갈라디아서 5:24~26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식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그러함에도 우리 안에는 아직 온갖 정욕과 탐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것이 이미 십자가에 못이 박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갈라디아서 5:16~17절입니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예수님을 믿어 성령이 임하게 되면 갈등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대적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오늘 본문처럼 악한 정욕과 탐심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고상한 율법주의나 윤리도덕주의로도 나오기에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소욕은 우리안의 육체의 소욕을 드러내면서 그 육체의 소욕이 이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음을 알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육체의 소욕이 힘을 잃게 됩니다.

 

이어지는 18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비록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의 갈등을 하고 있지만 이런 현상은 성령의 내주와 인도함이 있기에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은혜의 성령의 법아래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육체의 소욕이 무엇인지 성령의 소욕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19~23절입니다.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육체의 일이란 타락한 모든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것을 율법으로도 유교적 윤리로도 어떤 법으로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육체의 일이 성령이 임한 자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들은 육체의 일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함을 알기에 그것을 미워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들을 통하여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분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육체의 소욕이 얼마나 가득한지를 보게 될수록 십자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나의 모든 정욕과 탐심이 이미 십자가에서 못 박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 역사 속에서는 계속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미 십자가에서 못 박힌 것들이기에 이 역사 속 무덤에 묻혀야 할 것들입니다. 이것들을 안고 천국에 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나그네 삶은 오늘도 이 땅에서 탐욕의 무덤이라는 흔적을 남기며 가는 겁니다. 우리가 지나온 삶의 흔적을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돌아보면 탐욕의 무덤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를 포장하여도 회칠한 무덤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이루어 놓았다는 것들이 탐욕의 무덤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행위를 의지할 수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의 정욕과 탐심이 십자가에서 못 박힌 복음을 알기에 앞으로의 삶도 나의 정욕과 탐심이 나올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믿음의 창시자이며 완성 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됩니다(12:2).

 

베드로전서 4:1~3절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성령이 임한 성도는 다베라 사건도 기브롯 핫다아와 사건도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육체의 남을 때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