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5:37~41 옷단 귀의 술 2020. 10. 25

 

3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41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지난주에 안식일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로 돌이켜서 죽게 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안식일에 나무한 사람을 돌로 쳐서 죽임으로 안식을 얻지 못함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십니다. 이런 내용을 기억하게 하시려고 옷단 귀에 술을 달게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남자들 겉옷 가에 술을 달아둠으로 사람들이 이것을 볼 때 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하여 달아두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다시 봅니다. “봉독 옷단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술을 달게 한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게 하여 음행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음행이라는 남녀 간의 음행 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이 남편이시며 이스라엘은 아내이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찾음이 음행입니다. 그래서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어 여호와의 말씀을 기억하게 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남편이시고 이스라엘이 아내임을 알라고 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유가 함께 사시려고 인도하신 겁니다. 그래서 옷 술을 달게 하여 언약을 기억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정도가 아닙니다.

 

신명기 6:4~9절입니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겉 옷 가에 술을 달아서 말씀을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삶의 모든 상황에서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가르치며 삶의 어떤 상황에서도 이 말씀을 강론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부모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부모란 삶의 모든 상황을 말씀으로 해석하고 강론하여야 합니다. 이런 코로나19 사태로 이런 문제는 더욱 분명해 집니다. 교회로 모임을 할 수도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당도 없고 목사도 없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길은 말씀을 가르치는 겁니다. 여러분 각자가 말씀을 강론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3:5절입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옷 술을 만드는 법에 대하여 예루살렘 대학에서 공부한 장재일씨의 히브리적 관점으로 보는 마태복음에서 보면 이 술을 만드는 방법이 아주 복잡합니다. 유대인들이 히브리어의 자음의 숫자가치를 계산하는 것을 게마트리아라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13의 숫자를 만들어내고 또 옷 술이라는 단어의 게마트리아를 하면 600이 됩니다. 그래서 매듭을 매는 방식과 게마트리아까지 사용하여 613의 숫자의 의미를 담아두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끈을 길게 하여 사람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민수기 본문에서는 이런 방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겉옷의 네 귀에 옷 술을 달라고 하였는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바리새인들의 노력은 이런 율법조차 자기들을 치장하는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랍비의 문헌에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의 옷단 술에 손을 대면 온전해 진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옷단 술을 만짐으로 치료를 받고자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고 옷 술을 만들어 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옷 술 자체를 신성화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옷 술을 길게 하면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것으로 생각한 겁니다. 이것이 음행입니다.

 

마태복음 9:20~22절입니다.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여기서 겉옷 가를 만지는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겉옷 가가 옷 술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본대로 유대인 랍비 문헌에 온전하지 않는 자가 이 술을 만지면 온전하여 진다고 한 것처럼 이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이 바른 믿음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니 그 즉시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현장에서 치유를 받은 것입니다. 이 말씀을 많은 치유사역자들이 이용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무슨 병이라도 고친다고 합니다. 어떤 장로라는 사람도 이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려고 그 사람의 집회에 가는데 다 고침을 받을까요? 저는 그런 치유사역을 한다는 사람들에게 병 고침 받으려고 가는 자들에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코로나19를 확실하게 예방하고 고치는 능력이 있느냐고 물어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기도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실하게 예방되고 치료가 된다면 올해 노벨 의학상을 받는 것은 당연하고 세계적인 갑부가 순식간에 될 겁니다. 치유사역 한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하지 못하기에 자기 집회에 온 자들에게 병 고침을 받지 못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믿음 없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가복음 5:25~34절입니다.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을 청할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지만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이 여인은 많은 의사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고 몸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청하기는 커녕 에수님 앞에 나갈 수도 없다고 여깁니다. 그 당시의 의사는 대부분 민간요법이나 주술적인 치유행위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사들 중에 어떤 사람도 있을까요? 랍비 문헌에서 온전하지 못한 자가 온전한 자의 옷 술을 만지면 온전하여 진다는 말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병을 고침 받으려고 옷 술을 길게 장식한 사람들에게도 같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는 아무른 고침을 받지 못하였고 오히려 괴로움만 당하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에서 병을 고쳐준다거나, 돈을 벌게 하여 준다거나 하는 사람들에게 가면 괴로움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좋은 의사를 만나면 병의 고침을 받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무도 못 고칩니다. 어떤 의사도 죽음에 이르는 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왜 예수님의 옷 가에라도 만지려고 하였을까요? 예수님의 겉옷에도 옷 술은 달려 있었습니다. 유대인 남자들의 옷은 의례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옷 술이 외식하는 자들처럼 길게 달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에 비하면 볼품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은 자기를 구원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 옷 술을 만진 겁니다. 그러자 즉석에서 자신이 나아졌음을 알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리를 돌아보시고 물으십니다. 누가 내 겉옷 가를 만졌느냐? 제자들의 답변이 그걸 어떻게 알겠느냐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어 병 고침을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만 고침을 받은 것을 성경은 여인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해석이 갈립니다. 이 믿음이 도대체 어떤 믿음이며 누구에게서 나온 믿음이냐는 겁니다. 본문은 이 여인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이 자신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주어지기까지 완전히 망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병 고치려다가 재산도 다 허비하고 몸은 더 중병에 들었습니다. 그러니 자기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부정함뿐입니다. 정상적인생리도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데 비정상적인 유출은 더더욱 부정합니다. 그 여인이 앉은 곳도 부정하고 접촉하여도 부정합니다. 코로나 확진 자와 접촉하는 것보다 더 꺼려지는 여인입니다. 그 부정함을 입은 여인이 예수님을 잡으면 예수님이 부정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지금 율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옷 술을 잡는 순간 여인이 고침을 받은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능력이 나간 것을 압니다.

 

이때 예수님은 누가 내 겉옷 가를 만졌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몰라서 찾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하실 말씀이 있습니다. 그 여인의 입을 통하여 자신이 당한 일들을 말하게 하십니다. 자신의 병듦과 많은 의사를 찾아갔지만 고치지 못함과 재산도 다 허비함을 말합니다. 옷 술이 긴 사람의 옷 술도 잡아 보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는 괴롭힘만 당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2:38~40절입니다.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유대사회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나 서기관들은 대단한 존경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라고 합니다. 과부들이 경건한 서기관이라고 재산을 맡길 수도 있습니다. 병든 여인이 그 옷 가의 술을 만지려고 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자들의 가산을 삼키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서기관들이 볼 때에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는 자로 보였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은 이 여인은 그런 자들에게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이것은 옷 술을 달아서 율법을 기억하여 음행하지 못하게 하신 원래의 뜻을 성취하는 내용이 됩니다. 왜 그런지 말씀을 봅니다.

 

신명기 31:19~22절입니다. “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20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22 그러므로 모세가 그 날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쳤더라

 

우리는 율법을 주신 이유가 지키라고 주신 줄 압니다. 그런데 율법을 여호와 하나님께 받아 전한 모세는 율법을 못 지킬 줄 알고 줍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런 말씀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수건이 가려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문자대로 보았다고 하여도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는 모습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자신들이 지키지 못하는 죄인이라서 대속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역할인데 오히려 그 율법으로 자신들을 치장하였기에 이것이 음행입니다.

 

마태복음 26:31~35절입니다.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2)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3)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4)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예수님께서 스가랴 13:7절의 말씀으로 목자를 치면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모두 주를 버려도 자신은 버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지 못할 줄 알고 주셨는데도 자신들은 지킬 수 있다고 합니다. 베드로도 이와 같이 대답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만약 베드로가 부인하지 않았다면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이 필요 없는 구원을 받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댄 그 여인처럼 자신의 의라는 것도 자신의 재산도 자신의 몸도 다 무너진 상태에서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 밖에 없는 자가 되었을 때에 예수님의 옷 술을 만지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임한 은혜를 누가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이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 은혜를 받은 자들은 빈손 들고 주께와 십자가를 붙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