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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3:14~25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 2016. 8. 14

 

지난주에 본 열왕기하 13:10~13절을 먼저 봅니다. “봉독 요아스 왕이 16년 동안 통치하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왕의 사적과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그의 업적은 이스라엘 왕의 역대지략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내용들은 성경의 계시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요아스 왕의 등극과 죽음만 말합니다. 그리고 16년 동안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16년 동안 왕으로 등극하여 행한 일들은 역대지략으로 돌려버리고 엘리사와의 만남을 훨씬 많이 기록합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성경을 보는 눈이 세상의 관점과 전혀 다름을 알아야합니다. 세상의 관점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놀라운 업적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은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본문 14~17절입니다. “14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자기의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15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활과 화살들을 가져오소서 하는지라 활과 화살들을 그에게 가져오매 16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하매 그가 손으로 잡으니 엘리사가 자기 손을 왕의 손 위에 얹고 17 이르되 동쪽 창을 여소서 하여 곧 열매 엘리사가 이르되 쏘소서 하는지라 곧 쏘매 엘리사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보다 기적들은 더 많이 나타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하늘로 승천하였는데 엘리사는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선지자 중에 어느 선지자를 더 선호합니까? 엘리야입니다. 그 이유는 죽을병이 들린 엘리사의 모습이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보는 그런 시각으로 기록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관점은 누가 영웅인가를 말하지만 성경의 관점은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신실하게 이루지는 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죽을병이 든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되고 지금 현직의 왕으로 있는 요아스는 죽을병이 든 엘리사에게 눈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요아스가 죽을병이 든 엘리사에게 눈물을 흘리며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한 말은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한 말이기도 합니다(왕하2:12). 왕이 있고 군대가 있는데도 선지자를 보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마병과 병거는 눈에 보이는 말과 병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선지자를 향하여 하나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아스는 16년 동안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믿었습니다. 왜 엘리사를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으로 믿었겠습니까? 그 이유를 왕하13:7절에서 봅봅니다.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 두지 아니하였더라한 나라의 군대가 이정도로 줄었다면 정말 힘이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만약 요아스가 말과 병거가 솔로몬 시대만큼 많았다면 엘리사를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약하여지는 것이 요아스에게 복입니다. 약함으로 엘리사를 찾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7:16~20절입니다. “16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자주 찾아본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말과 병거와 아내와 은금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한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율법을 평생에 자기 곁에 두고 읽어 여호와 경외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왕의 역할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왕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일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성도들이 이 길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그나마 이 길로 가려고 한 왕이 누구입니까? 다윗입니다. 다윗은 적으로부터 노획한 말의 힘줄을 잘라버렸습니다.

 

사무엘하 8:3~4절입니다. “3 르홉의 아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자기 권세를 회복하려고 유브라데 강으로 갈 때에 다윗이 그를 쳐서 4 그에게서 마병 천칠백 명과 보병 이만 명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대의 말만 남기고 다윗이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마병 천칠백 명이면 병거가 21조라고 해도 병거가 850대입니다. 병거 한 대에 말이 한필이라고 하면 말 850마리 중에 750마리의 말의 힘줄을 잘라 버리고 병거 일백 대의 말만 남긴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다윗과 정 반대로 갑니다. 그 결과 나라가 나누어집니다.

 

열왕기상 4:26절입니다. 솔로몬의 병거의 말 외양간이 사만이요 마병이 만 이천 명이며마병이 만 이천 명이면 병거가 6천대가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솔로몬의 왕국은 바로 아들 되에 나라가 남북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말을 구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율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과 병거를 수입하여 팔기도 하며 자신의 부국강병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말과 병거는 이러한 말이라는 육체의 힘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로 나라를 지키고자하기에 이스라엘은 늘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신명기21:1절입니다.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여호수아 11:1~6절입니다. “1 하솔 왕 야빈이 이 소식을 듣고 마돈 왕 요밥과 시므론 왕과 악삽 왕과 2 및 북쪽 산지와 긴네롯 남쪽 아라바와 평지와 서쪽 돌의 높은 곳에 있는 왕들과 3 동쪽과 서쪽의 가나안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산지의 여부스 족속과 미스바 땅 헤르몬 산 아래 히위 족속에게 사람을 보내매 4 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으니 백성이 많아 해변의 수많은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으며 5 이 왕들이 모두 모여 나아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메롬 물가에 함께 진 쳤더라 6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넘겨 주어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 하시니라

 

시편 20:7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편 68:17절입니다.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시편 76:6절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시편 147:10~11절입니다. “10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11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이스라엘의 말과 병거가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의지하는 말과 병거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과 병거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이 힘이 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의 무기를 만드는 비용으로 세상이 말하는 선한 일에 사용하면 전 지구에 굶어죽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마다 애국자가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무기를 만들자는 말도 전쟁을 하자는 말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를 지키기 위하여 무기가 필요하다고 하는 이런 세상 자체가 지옥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택함을 입은 자들은 그 힘들이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만 붙들게 만들어 내시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 14~17절을 봅니다. 요아스 왕이 죽을병이 걸려서 죽어가는 엘리사에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합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합니다. 엘리사가 왕에게 말하기를 활과 화살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 활과 화살을 잡으라고 하고서는 엘리사가 그 손 위에 얹습니다. 안수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동쪽 창을 열고 쏘라고 합니다. 그렇게 화살을 쏘자 엘리사가 이는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살이라고 합니다.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칠 것이라고 합니다.

 

본문 18~19절입니다. “18 또 이르되 화살들을 집으소서 곧 집으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하는지라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19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왕에게 화살들을 잡고 땅을 치라고 합니다. 그러자 왕이 세 번을 치고 그쳤습니다. 엘레사가 노하여 왕이 대 여섯 번을 쳤다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을 것이지만 이제 세 번만 칠 것이라고 합니다. 엘리사가 말할 때에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구원을 의지하는 행위가 화살로 땅을 치라는 말에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만 칩니다. 왕이 왜 세 번만 친 것이겠습니까? 이게 무슨 짓이냐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살이라고 하였지만 대단한 약속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겨우 세 번만 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말을 여호와의 구원으로 받았다면 수도 없이 내려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들을 치는 것이 절박할수록 멈추라고 하 때 까지 때려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겨우 세 번 친 것은 요아스의 신앙도 주께서 나라를 약하게 하심으로 겨우 나오는 신뢰의 모습입니다.

 

본문 20~21절입니다. “20 엘리사가 죽으니 그를 장사하였고 해가 바뀌매 모압 도적 떼들이 그 땅에 온지라 21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도적 떼를 보고 그의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엘리사가 죽고 일 년이 지났습니다. 모압 도적 때들이 이스라엘 땅에 왔습니다. 그때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도적 떼를 보고 그의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 넣습니다. 이스라엘의 무덤에 땅에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굴과 같은 곳에 시신을 놓아두기에 장사를 지내다가 적이 오자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던지고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던져진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엘리사는 죽을병이 걸려서 죽어 시체가 섞었습니다. 그런데 그 뼈에 닿은 시체가 살아남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까? 선지자는 죽어도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합니다. 그 영원한 언약 안에서 선지자가 죽어서 시체가 되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오전에 본 말씀에서 변화산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모세와 엘리사가 나타났습니다. 모세는 죽어서 장사 지낸 자 된 사람입니다. 엘리사는 승천을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살아있는 채로 승천을 했지만 그 몸 그대로 승천을 했을까요? 홀연히 변화된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모세는 예수님보다 약 15백 년 전 사람이고 엘리야는 약 8백 년 전의 사람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는 이 지상에서 사라진지 오래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르시면 그들이 영광중에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며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마지막 날의 부활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내십니다. 죽어서 4일이 되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나오라고 부르시나 그가 무덤에서 살아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나사로나 엘리사의 뼈에 닿아서 살아난 사람이나 다시 죽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을 다시 살려내신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병들어 죽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에 말이 없고 병거가 없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를 통하여서도 예수님이 부활이며 생명임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약하여지고 병이 들고 죽어가는 것이 결코 서글픈 일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과 생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죽을 목, 이 썩을 몸이 죽지 않음을 입게 될 날이 올 것이기에 늙음과 병듦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니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부활과 생명이 없어도 늙음과 병듦은 자연의 현상으로 담담히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기에 죽기를 사모하고 죽기를 당기고 싶고 기뻐하는 자들이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22~25절입니다. “22 여호아하스 왕의 시대에 아람 왕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하였으나 2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돌보사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고 이때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셨더라 24 아람의 왕 하사엘이 죽고 그의 아들 벤하닷이 대신하여 왕이 되매 25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서 성읍을 다시 빼앗으니 이 성읍들은 자기 부친 여호아하스가 전쟁 중에 빼앗겼던 것이라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무찌르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더라

 

여호아하스와 요아스가 이미 죽었음을 먼저 말해놓고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엘리사와의 관계성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언약관계가 어떻게 펼쳐지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아하스 왕 때에 아람 왕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하였습니다. 왜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한 것입니까? 여호아하스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들을 성실히 괴롭히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항상 죄에서 떠나지 못하는 그들을 진멸하셔야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 멸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신 이유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셨기 때문에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아스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을 세 번 쳐서 무찌르고 그 성읍들을 회복시킨 것은 엘리사의 말을 듣고 화살을 세 번 쳤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엘리사는 죽어서 뼈가 다 드러난 시체가 되었지만 그 말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만사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도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신실하게 이루어졌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약속의 완성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이 약속 안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말과 병거를 의지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되어주시겠다는 것은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을 버리고 세상의 힘이 되는 병거와 마병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요아스는 죽을병이 든 엘리사에게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할 정도로 나라의 힘은 약하여지고 그의 마음도 낮추어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51~54절입니다.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성경이 이루어지게 되는 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길입니다. 요아스가 죽을병이 든 엘리사에게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말한 것처럼 오늘 우리도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있게 되려면 얼마나 우리의 힘이 빠져나가야 되겠습니까? 얼마나 우리의 의로움 들이 무너져야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가 보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오직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의 영이 임하여야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신 예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된다고 고백하게 됩니다(고전1:30). 이런 자들이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