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5:14~6:7 속건제(贖愆祭) 2018. 12. 30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5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 하였으면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네가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3)세겔로 몇 3)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숫양을 양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16 성물에 대한 잘못을 보상하되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숫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오늘은 속건제입니다. 속죄제와 속건제를 같이 말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구별하는 것은 속건제의 건()자는 허물 건()자입니다. 그러므로 속건제를 요즘은 학자들은 배상제(賠償祭)로 봅니다. 속건제는 하나님에 대한 것과 사람에 대한 것으로 나누어 말합니다. 본문 14~16절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 하였으면 속건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속건제는 성물에 대한 잘못을 보상하면서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드림으로 그 속건제의 숫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죄하면 그가 사함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17~19절입니다. “17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18 그는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 제물로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가 부지중에 범죄 한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19 이는 속건제니 그가 여호와 앞에 참으로 잘못을 저질렀음이니라여호와의 계명 중에 부지중에 범하여 알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나중에 깨닫게 되었다면 허물이기에 속건제를 드려야 합니다.

 

6:1~7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 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 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3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 하면 4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잃은 물건을 주운 것이나 5 그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6 그는 또 그 속건 제물을 여호와께 가져갈지니 곧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 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고 갈 것이요 7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으리라

 

허물로 인하여 속건제를 드려야하는 대상이 5:14~19절은 하나님이라면 6:1~7절은 허물을 진 대상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허물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배상을 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배상을 한 후에 여호와께도 속건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죄와 허물이라는 것이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따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6:2절을 보면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 하게 되는 것이 이웃에게도 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함께 갑니다.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허물이 무엇입니까? 맡긴 물건이나 전당 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는 것,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것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러한 죄를 범하였으면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2:1~15절을 보면 도둑질 하면 두 배에서 다섯 배까지 배상해야 합니다. 짐승이 남의 밭에 피해를 입히면 자기 밭은 가장 좋은 것으로 그 피해 입힌 것만큼 갚으면 됩니다. 그런데 속건제를 오분의 일만 하게 하는 것은 죄를 깨닫거나 다른 사람이 깨닫게 하였을 때에 자원하여 하는 것이기에 오분의 일만 더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오분의 일을 드리는 것은 허물로 인하여 속건제를 드리는 것인데 레위기 22:14에는 부지중에 성물을 먹으면 속건제를 드려야합니다. 레위기 27:13, 15, 19, 27, 31절은 서약을 했거나 거래를 한 후에 무르려고 하는 경우에도 속건제를 드립니다. 이 본문은 나중에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속건제는 허물을 깨닫고 드려야하는 것입니다. 그 허물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있는 경우에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그 허물을 배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섬김과 이웃 섬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허물을 발견하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이와 같이 이웃에게도 허물이 있다는 것을 깨닫거나 알려주면 이웃에게도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남에게 피해를 입힌 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저도 설교하는 자로서 제가 의도치 않았지만 자기를 표적으로 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저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저의 허물을 깨닫게 해 주었기에 제가 그 분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여러분들도 서로 허물을 끼치며 살아갑니다. 모두가 자기중심적인 해석을 하기에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두 사람이 다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합니다. 저는 중간에서 두 사람의 말을 다 들어보는데 모두가 자기는 허물이 없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부지중에 짓는 허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이 있다고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면 속건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제사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의 허물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 51:5~6절입니다. “5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거역하므로 죄과가 땅에 가득하나 그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에게 버림받은 홀아비는 아니니라 6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끊어짐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복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거역하므로 죄과가 땅에 가득하다고 합니다. 죄과가 허물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만군의 여호와께 버림받은 홀아비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 허물이 가득함으로 인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이제는 그 바벨론이 허물이 가득함으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는데도 교만하여 자기의 능력인줄 알고 있기에 이곳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바벨론에서 떠나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어떤 곳입니까? 토요일 방송설교 들었다면서 어떤 분이 질문을 했습니다. 방송국이나 어느 교회에 질문을 해도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더라고 하면서 분노에 가득하여 폭풍 질문을 했습니다. 정부 이야기도 하고, 대형 교회 이야기도 하고, 방송국 이야기도 하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난달에는 기독교 방송국에서 바울이라는 영화를 추천하더니 이번에는 2차 대전 때 크리스마스 날 독일 군과 연합군 사이에 캐롤을 부르면서 휴전한 영화를 추천하는데 그러면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하고 군대를 보내지 않아야 한다고 교회가 말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저도 애국자가 한 사람도 없어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도 별로 듣지도 않고 자신이 원하는 답을 바란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냐고 하니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다들 제대로 증인 노릇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을 따라서 보내주겠다고 주소를 물으니 예수님의 말씀에 예! 아니오! 답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당신은 가짜라는 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이런 분이 허물이 가득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분의 분노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세상을 보고 분노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변할 수 있고 세상이 변할 수 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별세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은 속건제를 드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허물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배상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빚진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먼저 속건 제물로 드려진 예수님이 우리의 허물과 죄를 그의 십자가로 도말하여 주셨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사야 44:21~22절입니다. “21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야곱 곧 이스라엘의 허물을 빽빽한 구름을 없애버리듯이, 안개가 없어지듯이 그렇게 없어지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선제적인 조건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사야 43:21~25절입니다.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22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23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4)제물로 말미암아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말미암아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 24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5)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하게 하지 아니하고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이스라엘의 선제조건이 있어서 용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자기 백성의 허물로 도말하십니다.

 

이사야 53:1~12절입니다.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3)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이 말씀은 이사야 52:13절부터 연결되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자기 죄와 허물이 아닌데도 고난을 받은 것은 바로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신 고난 받으시는 것을 속건 제물로 드리신다고 합니다. 그 속건 제물로 드려지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당연히 이웃과의 허물을 서로 고하고 용서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21~24절입니다.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1)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이 말씀과 함께 마가복음도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1:25절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의 말씀과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먼저 화목하고 또 용서 하는 조건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허물을 사하여 주신다면 어느 누구도 그 허물의 사함을 받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종교적인 의무만 다 하면 되었다고 하는 외식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자들은 우리가 함께 본 이사야서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율법적인 의로 자기를 치장하고 있는 자들은 자기의 허물을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속건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기에 예수님이 속건 제물로 오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6:2절을 보면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이웃에게 해를 끼친 것이 허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도 이웃에게도 허물만 끼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올 한해를 돌아봅니다. 나 있음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이 들었겠습니까? 나의 허물로 인하여 가족이. 내가 속한 기관이. 교회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이러한 허물이 속건 제물이 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함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디모데후서 4:9~18절입니다.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14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15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과 함께 한 자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역으로 인하여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만 자기와 함께 있다고 합니다. 바울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 모습이 잘 나옵니다. 바울이 처음 복음을 전할 때에 함께 한 자들이 하나도 없고 다 자신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의 허물과 죄를 십자가로 도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께서 바울에게 힘을 주시는 것은 그 선포된 말씀이 전파되어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신다고 합니다. 바울이 허물을 도말하신 그 십자가의 은혜를 입었기에 자기에게 허물을 끼친 자들에게 그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는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러한 자들을 주께서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