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26:1~23 나병든 웃시야    2017. 11. 5

 

1 유다 온 백성이 나이가 십육 세 된 웃시야를 세워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 2 아마샤 왕이 그의 열조들의 묘실에 누운 후에 웃시야가 엘롯을 건축하여 유다에 돌렸더라 3 웃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십육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이 년 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아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4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5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본문 1~5절을 보시면 웃시야가 요아스와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요아스가 여호야다가 살아있을 동안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합니다. 웃시야도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웃시야는 16세에 왕이 되어 50년을 왕으로 다스립니다. 그런데 웃시야도 아마샤와 요아스처럼 처음보다 나중에 좋지 않습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제대로 역할을 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그 말씀에 왕이 순종하면 형통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타락하게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1031일이 무슨 날인지 아시지요! 종교개혁 기념일인데 올해가 5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개혁이 미완으로 남았기에 개혁한 교회는 계속 개혁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개혁보다 그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임하여야 온전한 교회라고 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인간이 스스로 개혁하여 온전해 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개혁을 이야기하는 것은 중세 암흑기라는 그 종교성에서 말씀의 회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가톨릭은 사제가 있습니다. 사제는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개혁교회란 성경에서 인정하지 않는 종교의식을 폐하자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구하게 되는 것은 결국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함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사의 의식을 얼마든지 행할 수가 있지만 그 뜻과 의미가 말씀으로 선포가 되지 않으면 그런 제사와 의식들이 외식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여호와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일 때 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말씀을 보고 듣는 시간에 두는 이유를 알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이 설교할 때에 몇 시간씩 했다고 합니다.

 

본문 6~10절입니다. “봉독 7절을 보면 여호와를 찾았기에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심으로 매우 강성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이 되었습니다. 또 농사를 좋아하여 농사를 장려한 것을 봅니다. 이러한 것도 여호와의 찾았기에 여호와의 도우심입니다.

 

11~15절입니다. 봉독 여호와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군대가 강성하여지고 특별한 무기도 개발하여 그의 이름이 멀리 퍼졌습니다. 남 유다 웃시야 시대와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시대에 이스라엘은 상당히 강성하여졌습니다. 그 중에 유다의 웃시야는 여호와의 도우심이라고 반복합니다. 여호와의 기이한 도우심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웃시야의 능력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강성하여지는데 어떻게 됩니까?

 

16절입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강성하여졌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 범죄 하였습니다. 그 범죄란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고 한 것입니다. 성전의 분향은 제사장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려고 한 것은 왕이 강성하게 되니 마음이 교만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강성하였는데 교만하여진 것은 지금의 강성함이 자기의 능력으로 된 것으로 안 것입니다. 개구리 올챙이시절 모른다고 여호와의 도우심을 잊어버린 것이 교만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주의 은혜임을 모르면 반드시 교만하게 됩니다.

 

17~19절입니다. 봉독 웃시야가 교만한 결과가 성전에서 분향하려고 한 것입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을 왕이 하려고 한 것입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리다가 향로에서 불이 나와서 죽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서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웃시야가 강성하여지니 다른 것은 자기의 권세로 하는데 성전에 제사는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니 화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분향하려고 한 것이 교만입니다. 제사장 아사랴가 분향하지 못하게 하자 웃시야 왕이 화를 낼 때에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 것입니다.

 

20~23절입니다. 봉독웃시야 왕이 교만하여 분향하려다가 나병이 발하여 죽을 때 까지 별궁에 거하며 그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고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보게 됩니까? 여호와의 묵시를 밝히 스가랴가 사는 동안에 웃시야 왕도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를 구하였기에 여호아께서 웃시야를 강성하게 하였지만 강성하여지자 교만하여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병을 들게 하여서 더 이상 나대지 못하게 별궁에 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죽을 때 까지 별궁에 거하면서 자신의 교만하였음을 돌아보게 하신 것입니다.

 

레위기 10:1~3절입니다. “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하지 아니한 다른 불을 담아서 분향하다가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이때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고 온 백성 앞에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인인 인간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제사장 아론의 아들이라고 하여도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함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이런 말씀을 웃시야가 못 보았든지, 보았는데도 자신이 분향하였다면 이 말씀을 우습게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김이 교만입니다.

 

민수기 16:1~15절입니다. 봉독 레위지파의 다단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 250명이 모세를 대항합니다. 이들은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엎드려 기도하고 고라와 그의 모든 무리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자기에게 속한 거룩한 자가 누구인지 알게 하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무리들을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고라 자손에게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는 것이 작은 일인 줄 알고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고 그들을 오라고 하니 그들이 오지 않겠다고 합니다. 모세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준다고 해놓고서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고 불평만 하고 있습니다.

 

16~35절을 보면 250명이 향로를 가지고 오게 합니다. 그러자 고라가 온 회중을 회막 문에 모아놓고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여 섭니다. 이때 여호와의 영광이 온 회중에 나타나면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회중에서 떠나라고 하시면서 이들을 순식간에 멸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이때 모세가 한 사람이 범죄 하였는데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느냐고 합니다. 중보의 기도를 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반역하는 무리들의 장막 사방에서 떠나라고 합니다. 그러자 떠난 자들이 있지만 250명과 그들의 가족은 그들과 함께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죽음이 특이함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벌하심을 보여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땅이 갈라져 산채로 스올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분향하는 자들 250명은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 그들을 불살랐습니다.

 

36~4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향로의 불은 다른 곳에 쏟아버리고 그 향로는 여호와 앞에 드렸기에 거룩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철판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게 하셨습니다. 40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물이 되게 하였으니 이는 아론 자손이 아닌 다른 사람은 여호와 앞에 분향하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함이며 또 고라와 그의 무리와 같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여호와께서 모세를 시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아론의 자손이 아닌 자가 여호와께 분향하지 못하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41~45절입니다. 고라와 반역하는 무리가 땅이 갈라져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심판을 눈으로 목격하고서도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에 대한 반역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향로 사건을 통하여 누가 여호와께서 거룩하게 세웠는지를 보여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원망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다시 이들을 순식간에 멸하시겠다고 이 무리에서 떠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어떻게 합니까?

 

46~50절입니다. “46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워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 47 아론이 모세의 명령을 따라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48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 49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만 사천칠백 명이었더라 50 염병이 그치매 아론이 회막 문 모세에게로 돌아오니라

 

제단의 불을 담아 향을 피워 급히 회중에게 갔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으로 염병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론이 백성을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쳤습니다. 고라의 일로 땅에 산채로 들어간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만 사천칠백 명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웃시야가 몰랐겠습니까?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이런 말씀도 왕에게 전하였을 것입니다. 왕의 자리에 늘 율법 책을 등사하여 두고 그것을 보고 그 율법대로 백성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강성하여지니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교만이 분향하려다가 나병이 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교만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떱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내 좋은 방식으로 취사선택(取捨選擇)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간은 모두가 교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비틀어 자기중심으로 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나병만이 아니라 땅이 꺼져서 죽임을 당하여도, 향로에서 불이 나와 우리를 살라도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그런 저주가 임하지 않습니까? 모세와 아론처럼 우리를 속죄하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피로 우리를 속죄하고 있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고 세상의 어려움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목요일 오후 2시경 창원 터널 입구의 사고는 전국적인 뉴스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인들도 그 사고 전후로 몇 사람이 지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조금만 빠르거나 늦게 그곳으로 갔다면 불붙을 드럼통이 자신의 차를 덮칠 수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런 사고를 당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저주가 아닙니다. 진짜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는 자가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웃시야가 나병이 들어서 별궁에 거하여도 그것이 저주가 아니라 자신의 교만한 죄를 알게 되었다면 그것이 복을 받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8:1~3절입니다.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실 때에 가장 먼저 고쳐주신 자가 나병환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깨끗하게 하신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통하여 자신이 전신에 나병환자임을 아는 자만이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모든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교만하여 나병이 든 자임을 아는 자라면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 저주 받은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의 저주가 넘겨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우리의 교만이 깨어지고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