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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799
2020.10
18
목사님 안녕하세요
아래 글을 보고 여쭙고자 합니다
법과 복음 이라는 두 명제가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 지는데 ..
법은 법대로 있고 복음은 복음으로 있다라는 명제가 잘 이해가 안됩니다
이 분의 해석이 맞는지 궁금해서 질문드려요
은혜의 복음안에 있는자가 "니 마음대로 살아라" 라고 한다고 해서 맘대로 살아지지는 않겠지만
반대로 은혜 받은 자가 그 "법"에 묶여 있는 것도 복음이 아니라 생각 되거든요 ..
복음을 안다고 해서 법을 지키지 않는 당위성을 가지고자 함이 아니라 정말 우리게 주신 그 법들을 우리가 지킬수
있는 자들인지 ..
뭐 제가 아는게 없으니 ...
§B. 율법과 복음의 두 범주를 섞는 오류들
- §A.7-8에서 소개한 범주 (A)와 (B)에 대한 명칭을 갖고 조금 살을 붙여 아래에 다시 적어 보갰습니다:
- 법 (Law):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것.
- 복음 (Gospel):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시고 이루신 것.
- 교회를 조금이라도 다녀 보신 분들은 복음을 구원과 연결 짓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옳습니다. 다만, 그렇게 구원론으로 얼른 넘어가기 전에, §A.1-2에서 말씀드렸듯이 위의 두 범주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의 단순한 구분일 뿐임을 놓치지 마십시오. ‘법’과 ‘복음’이라는 범주들은 우리의 구원이라는 문제와 면밀한 연관이 있고, 조금 뒤에 §B.4에서 그것을 이야기 하겠습니다만, 그에 앞서 간단한 논리적 구분 혹은 개념적 구분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 문단 §A.3에서 말씀드렸듯이 ‘법’의 범주는 우리의 순종이 요구되는 범주이고, ‘복음’의 범주는 우리의 믿음이 요구되는 범주입니다.
- 그럼 이제 약속드린대로 법과 복음이라는 범주와 우리 구원의 관계를 짦게 정리하겠습니다. (자세한 것은 본 블로그의 ‘율법과 복음‘ 연재물, 그 중에서도 특히 다섯번 째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 우리 시조 할아버지 아담이 애초에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함으로 우리 모두는 본성상 불순종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입니다. (즉, 우리는 법의 범주에 있는 것을 범함으로써 죄인이 되었습니다.)
-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셨습니다. (즉,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복음의 범주에 있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이상이 법과 복음이라는 범주가 우리의 구원과 지니는 관계입니다. 이제 아래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섞음으로써 발생하는 대표적인 이단 사상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A.2-3에서 말씀드렸듯이, 법과 복음의 범주는 섞일 수 없다는 쉬운 논리적 사실과, 법의 범주는 순종을, 복음의 범주는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 율법주의 (nomism): 이것은 법의 범주에 있는 것을 가져와 복음의 범주에 있는 것을 밀어내는 이단 사상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B.4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칭의는 전적으로 복음의 범주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에 기인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법의 범주에 있는 것 즉 우리가 순종해야 할 것을 가져와 칭의의 근거 가운데 하나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가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하시는데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율법주의는 밑에서 다룰 반법주의의 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내신 법을 훼손한다는 점에서는 반법주의의 배 다른 형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가납하실만한 것이 못 된다고 성경이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행위를 의롭다하심을 받는 근거 가운데 하나로 삼으려하다보니, 거기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께서 본래 제시하신 기준보다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반법주의 (antinomianism): 이것은 복음의 범주에 있는 것을 가지고 법의 범주에 있는 것을 밀어내는 이단 사상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법에 순종할 의무 혹은 당위로부터 자유롭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A.3와 §B.2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고,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지킨다는 것 뿐입니다. 복음의 범주에 있는 것들을 믿는다고 해서 법의 범주에 있는 것에 순종해야 할 의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을 참고사항 정도로 여기는 반법주의에서는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은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인지에 대한 생각이 추상적이거나 이현령비현령식입니다.
- 이 글은 반법주의에 대한 글의 부록이니 만큼, 반법주의의 오류가 무엇인지 그려줄 예를 일부러 하나 더 들겠습니다. 농사를 짓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매우 근면성실한 반면 아들은 게으르고 늘상 늦잠을 잤습니다. 아버지는 평소에 아들에게 “게으름을 부리지 말고, 부지런히 밭을 돌보거라” 명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들은 게으름을 벗지 못했고, 아버지의 밭에는 곡식이 풍성하였어도 아들의 밭은 늘상 볼품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비로운 아버지는 곡식이 부족한 아들에게 자기 밭에서 난 것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자, 그렇다고 해서 아들이 “부지런히 밭을 돌보라”는 아버지의 말에 순종할 당위가 없어졌습니까? 아들이 ‘내가 농사를 어떻게 짓던지 우리가 먹을 것은 늘 아버지 밭에서 나온다. 그러니 난 꼭 아버지 말대로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논리적입니까? 물론 그것은 오류입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것은 그것이 아버지의 명령이고 자신은 그것에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할 의무는 그것이 창조주의, 왕의, 아버지의 명령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거기에 순종해야 할 피조물이고, 친백성이고, 자식이기 때문이지, 구원을 얻기 위해서라든지 혹은 다른 무슨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우리 구원에 필요한 일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해서, 즉 복음이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의 영원한 보증이 되신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할 의무와 당위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율법과 복음에 대한 논쟁은
교회 역사상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논지는 이 글로만 짐작하여 보건데
제일 마지막 문장이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이군요!
구원에 필요한 일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신 복음이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의 영원한 보증이 되신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할 의무와 당위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할 의무와 당위가 되는 그 법이 어느 것인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이라고 하면 율법의 조문만이 아니라 모든 말씀이 다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율법을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것이 된다고 합니다(약2:10).
그러므로 성경에서 율법을 주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어떤 인간도 법으로는 하나니의 의에 이르지 못함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한 자들이 예수님을 살해하였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랬던 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율법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입니다.
어떻게 인도하는가 하면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는 역할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율법의 조문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롬8:2).
새로운 법이 성도에게는 생긴 겁니다.
이 새로운 법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가십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율법의 완성임을 증거합니다.
이런 기회에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를 연결하여 읽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