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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자신이 거듭난 것을 "어떤 체험이나 경험이나 감정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통전적 "나"가 감지하는것" 이라는 말에 대해서 마음속에서 이 말은 하나님의
거듭남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말이라는 음성이 성령의 말씀인지 아니면 마귀의
말인지 고민 스럽습니다!!
목사님 친절하신 말씀 감사 합니다!!
그런데 제가 반론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깨닫고 싶어서 드리는 말씀 입니다.
사울이 거듭남의 체험으로 사도 바울이 되고, 그 거듭남의 체험을 간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것 아닌지요.
목사님 말씀처럼 거듭님의 체헙을 기준으로 삼거나 우상화 하면 않되지만 그 체헙을 간증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는것 아닌지요?
그런데 거듭남의 은혜를 "체헙하는 것이 아니라 통전적 "나"가 감지 하는것" 이라는 말은 옳지 않은 것만 같습니다.
여기 통전적 "나"는 거듭난 "나"를 의미 하는데 이미 거듭난 "나"가 거듭남을 감지 할 필요가 없는것 아닌지요?
그래서 이말은 하나님의 거듭남의 은혜를 뎦고 헛되게 하는 말로 받아집니다!!
오순아님이 심상선님이시군요!
오늘 서머나교회에서 선생님의 글에 대한 댓글들 다 읽어보았습니다. /
그런데 체험이라는 말과 통전적 나가 감지 한다는 것의 차이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위의 글로 가름합니다.
한가지 바울의 이야기만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예수님 만난 사건을 간증한 부분은 성경에서 두 번 나타납니다.
한번은 사도행전 22장에서 유대인들 앞에서 하였고
한번은 사도행전 26장에서 아그립바 왕 앞에서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곳을 읽어보면 자신의 거듭난 간증의 체험을 말하고자 함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핍박한 그 예수가 지금 살아서 일하고 계심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사실을 증거 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지난 주일 설교결론입니다.
새번역 갈라디아서 6:14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저의 글을 다 읽어 보셨다니 더 드릴 말씀이 없군요!!
목사님은 다 아시먼서 피하시는 느낌을 주시네요!!
내가 죽지 않아서 하는 소리라고 하시니 모든것을 성령님께 의탁하고 멈추겠습니다!!
다만 목사님께 사도 바울이 나이많은 베드로 사도를 책망한 일을 한번 상고 해 보시기를 감히 진언 합니다!!
다 알면서 피하는 것으로 보인다구요!
그렇게 보시는 것은 본인의 자유이지만
저는 알면 아는대로 답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합니다.
수 많은 댓글들을 보면서 무엇을 증거 하고자 말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일을 상고 해 보라고 하셨는데
제가 알기로는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 앞에서 외식한 것이지요!
이런 책망은 당연합니다.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만 의롭다고 함을 받는 것이 복음인데
이 복음을 지금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부인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책망의 결론이 이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이것이 결론입니다.
그런데 체험과 감지의 문제가 이 말씀과 무슨 상관인지 이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순아님의 질문에 동의를 하지 않는 것은 다 알면서도 외식하는 베드로와 같다고 하셔서 이 말씀을 상고 해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드립니다.
체험을 말하든 감지를 말하든 사람들의 자기 주장이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체험이라든가 감지라든가 하는 것으로 논쟁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정말 다 이루심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미완성으로 볼 것이냐의 싸움이 있습니다. /
베드로를 책망한 바울의 결론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런데 체험을 말하고 감지를 말하는 것이 이 내용과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저는 논쟁할 실력도 없는 사람이지만
이러한 논쟁들이 무익한 것이라고 보기에 댓글들을 잘 달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답변하면서 인용된 말씀만으로도 저는 충분한 답변을 하였다고 봅니다.
제가 어느 연세 많으신 분과 어떤 문제로 메일을 주고 받다가 '삭제 당하는 인생'이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아주 많이 그분을 화나게 만든 모양입니다.
자신이 수고하여 만들어 놓은 것들을 무시하는 발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그렇게 만들어 가신다고 봅니다.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다 삭제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만을 우리 안에 담으시는 것이
이 역사속에 아직 남겨진 자기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라고 말입니다.
내일이 개천절이군요!
스데반집사님처럼 저에게도 하늘이 열려지기를 소원합니다.
목사님께는 스데반 집사 보다 사도 요한처럼 하늘이 열려지기를 바란다고 하면 화 내시렵니까?
저도 목사님 말씀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다 삭제 하시고 아버지의 것으로 채우시는 은혜를 깨달으며 감동과 감격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진정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만 담아 순종하며 효자가 되고 싶습니다!!
저의 문제의 촛점은 거듭남의 은혜에 대한 체험과 감지의 문제가 아니라 거듭남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있습니다.
제가 목사님께 다 아시면서 피하시는 느낌을 주신다는 것은 목사님께서 거듭남의 은혜를 체험하셔서 다 아시고 계실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외식하는 베드로 같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반대로 거듭남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대해 사도 바울 처럼
그 말은 거듭남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말이라고 왜 책망 하시지 않느냐는 뜻 입니다!!
스데반이나 사도 요한이나 하늘이 열려서 보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과 보좌에 앉으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거듭남의 체험이나 감지의 문제가 아니라
거듭난 사람이라면 무엇을 지향하게 되는가에 초점을 맞추자는 말입니다.
저의 신학교 때 어느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제자가 교수님의 신상에 대한 질문을 하였을 때에
그 교수님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에 대한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이야기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목사님!! 그렇습니다!!
제 이름이 오직예수 순교예수 아멘예수 입니다!!
제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으로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감히 아버지 앞에 나가 말씀 듣고 하루 종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목사님!
오늘 아침 순간적으로 김성수 목사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어 용서의 글을 드렸습니다.
제가 목사님께도 우매한 말씀들을 많이 드렸던 것을 용서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항상 목사님의 친절하신 말씀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깨닫게 하신 성령님께 감사 찬송을 드립니다!!
감사한 일이군요!
"아" 다르고 "어"다르다는 말이 있지요!
성령에 의하여 거듭난 사람이라면
지향하는 바가 하나로 모아질 것입니다.
그 안에서 자신들의 색깔들은 퇴색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닝의 은혜만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평안을 전합니다.
서머나 교회 게시판을 보신 모양이군요!
우리의 신앙은 계시의존적입니다.
이 말은 나의 주관이나 체험이 기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주관이나 체험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것을 고정화 시켜서 나의 소유물로 가지면 이런 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우리는 자신의 체험이나 다른 것들을 바라보게 한다면 이런 것이 깨어지고 무너져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간단하게 거듭남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8절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으로 나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바람이 부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자기 자신에 근거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거듭났는지에 대한 체험을 붙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자신이 거듭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어디서 와서 어디로 부는지 잘 모르지만 바람이 부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 처럼 알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사람들마다 여러가지 체험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거듭난 자들을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보면 됩니다.
골로새서 3:1~5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즉 거듭났다면 위엣 것을 찾게 됩니다.
너무나 분명한 거듭남의 증거가 이렇게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3~4절입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거듭난 사람은 자신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거듭난 자는 살아있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 소망이란 골로새서 말씀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