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보호를 원하시면 글작성시 게시판 상단 [비밀글기능]에 체크후 작성바랍니다
늘푸른교회 설교를 들으며 예수님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요즘 세대주의를 많이 언급하시어 인터넷을 통해 좀 공부해 보았습니다.
세대주의도 여러 분파가 있는가 봅니다. 그 중 세대주의 종말론을 배격하며 세대주의를 하시는
분들의 설교도 듣게 되었습니다.
문뜩 드는 생각이 교리나 논리나 비판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알미니즘이나 칼빈주의가 기준이 될까요? 세대주의나 개혁주의가 기준이 될까요?
전천년설과 후천년설이 이단 판정의 기준일까요?
저들과 늘푸른교회는 서로를 형제로 여길까요?
(나는 말씀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기뻐하며 골방에서 기도하고 감사하고 늘 찬송하며 모든 말씀을 옳다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없을까요?)
말씀에 의하면 오직 예수님의 긍휼, 곧 은혜로 되는데 왜 논리가 진리를 자꾸 앞설까요?
나는 누구를 형제로 여겨야 할까요?
저의 혼동을 링크를 걸어 대신합니다.
자상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늘푸른교회의 설교는 내용이 좋고 성경을 이해하기에 큰 유익이 있어서 홈페이지에 있는 모든 설교를(오디오포함) 다 들어보았습니다.
어떤 것은 예수님의 의도와 크게 일치한다고 여겨져 서너번씩 들은 것들도 많습니다. 이 설교들을 들으면서 저에게 또렷해진 것은
바울의 고백처럼 십자가의 예수의 죽음이외는 알지 않겠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해석방법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고, 형제를 분별함에도 여러가지 기준이 있겠으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의 오심과 그의 죽으심, 그의 피로 죄사함을 받음이외에는
다른 기준들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에 있어 사두개인보다 바리새인들이 더 나은 답변을 하였으나 그들의 생각도 성경에 의한 추론에
의한 것이었지, 진짜 부활을 알지 못하고 말하였기에 예수님께 부인당합니다. 구약의 인물들이 성경을
연구하여 메시야를 그려냈지만, 세례 요한 조차도 예수를 보고 그이신줄 헷갈려 했습니다.
성경의 감추어진 부분이나, 미래의 해석에 대하여서는 하나님께서 완전히 보여주기까지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계시록도 십자가에서의 과거적 해석도 유익하고, 미래적 해석도 가능하여 어느것이 다른 것보다 조금 나을 수는
있느나, 둘다 진짜 모습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우리의 판단의 기준이 이런 것들이라면 (세대주의는 틀렸고 문자주의는 맞고, 은혜로 해석하면 안되고 하는 등등의 주장들)
바울은 다시 울며 우리에게 편지할 것입니다. 누가 십자가에서 죽었느냐.
가장 낮은 자로 오셔서 가장 낮은 자로 죽으신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그보다 더 낮은 자가 되어 그 궁휼하심을
입은 자라면(혹은 입기를 원하는 자라도) 어떠한 다른 잣대로도 옳다 그르다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예수 이외에 다른 1순위의 기준이 있다면 그가 오히려 십자가의 원수로 자처하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이것을 늘푸른교회 설교를 통해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분명하지 않은 추리에 따른 혼동을 일으키는 많은 주장들이 있어 괴롭습니다.
전에 글
십자가를 우상으로 보는 견해와
이번의 글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논리가 앞서는 것에 대한 경계는 아주 좋게 봅니다.
그래서 저는 논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논쟁을 하다보면 자기 주장을 위하여 십자가마저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주 간단하게 형제로 교제할 수 있는 기준은
전적타락과 전적은혜를 말하면 형제로 교제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인다면
나만이 완전히 안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래의 말씀이 저의 답변이기도 합니다.
평안을 전합니다.
고린도전서 13: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2)제일은 사랑이라
저의 고민과 궁금증은 전적타락과 전적은혜가 기준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의 괴로움의 원인은 아마도 저의 인생이력과도 관계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 50세쯤 되었고, 태어나서 20년 동안은 침례교회에서 자라 침례를 받았고,
20대 초반에는 CCC활동을 주로 하였고,
20대 후반에는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장로교회에서 집사직분을 받고 생활하였습니다.
30대 초반에는 목회자가 되고자 하여 공대박사과정을 포기하고 신학을 준비하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외치는 목사님의 이중적 잣대에 상심하여 신학의 길을 포기하고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10년쯤 그리 살다가 복음이 말로 전해지다 보니 복음이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진리인지
논리인지 그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40대 초반쯤 유튜브가 보급될 때에
유튜브에 있는 많은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단들의 설교와 침례교,장로교,안식교,기독교채널 등.
그 때 늘푸른교회 설교도 처음 접하게 되었고 언약을 따라서도 읽었습니다.
그리고 40대 후반쯤이 되어 늘푸른교회 설교가 성경과 많이 일치하게 설교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의 많은 문제와 성경의 많은 난제들이 설명되어 자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내용들은 저의 성장과정에서 진리인 것 처럼 자리잡게 된 것들과 충돌하여
어떤 것이 과연 진리인지 궁금해지다가 이제는 괴로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십자가 복음 전한다는 교회에서 7년 정도 생활할 때 받은 상처가 (그 때 목사님의 논리중심주의)
흔적처럼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 죽인 자로 드러난다는 표현이 그 논리를 펴는 사람의 인장에서는 진리일 수 있으나
죽은 나사로를 살린 직후의 나사로에게 '너는 예수 죽인자냐'라고 한다면 나사로는 '예수는 나를 살리신
분이요'라고 하지 않을까요? 자기 논리가 옳다고 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잘못된 사람일까요?
물론 저는 이 표현을 좋아하고 저도 이 표현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표현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은 확실히 거리감이 있습니다.
판단의 기준이 전적타락, 전적은혜와 같은 신학적, 논리적 표현이라면 그 속에 얼마간의 진실성이 있을지라도
오판하게 되지 않을까요? 저는 그 때 목사님에게 한 형제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저나 저 같은 사람이 늘푸른교회나 그런 생각을 가진 곳에 가면 한 형제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다하며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유대 지도자들이 실상은 논리와 자기의가 앞서서이지 않을까요?
만일 제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겪는 괴로움이라면 제가 깨어져 예수 믿게 되길 원하고,
논리 중심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면 뭔가 바뀌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원합니다.
위에서 말한 주의라는 것은 다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만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해석문제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해석도 성령의 감동으로 된다면 같은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위의 링크 설교를 다 들어보았습니다.
이 분의 설교를 몇 편 들어보았습니다.
제가 성경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물론 신학적 배경이 침례교와 장로교라 다를 수 있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몸, 성령, 소망, 주, 믿음, 세례, 하나님이 하나라는 에베소서 4:4~6절의 말씀도 믿을 겁니다.
위에 링크한 설교에서 제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로 구약의 완성을 말한 것과
세대마다 하나님의 경륜은 다르지만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동의합니다.
물록 각론으로 들어가면 사람이 믿는 믿음에 강조점이 있는지 은혜에 강조점이 있는지는 다를겁니다.
아마 각론으로 들어가면 이 분은 사람이 믿는 믿음을 강조하고 저는 은혜를 강조하기에 간격이 벌어질 겁니다.
그러면서 각자의 성경구절을 인용할 겁니다.
저의 설교를 얼마나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설교하는 목표는 하나 입니다.
모든 성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요5:39).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신약이 없을 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목사님의 말씀대로 성경을 문자대로 본다면
모든 성경은 구약성경이기에 구약성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모든 구약 성경이 세례요한의 손가락으로 모아져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증거합니다(요1:29).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요19:30)
모든 구약의 말씀을 완성하신 겁니다.
구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십자가로 구원하셨고 그렇지 않은 자는 심판하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이후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행15:11).
그런데 정 목사님은 십자가가 구약의 완성이라고 말은 하지만 이스라엘을 남겨두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이스라엘을 문자대로 이스라엘로 봅니다.
계시록의 이스라엘을 문자대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0:6절까지 십자가로 일어난 일로 봐야
그 앞에서 일어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내용이 문자적인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 지점에서 그 분과 저의 해석이 갈라지는 겁니다.
그리고 정목사님은 구약에 교회가 없었다고 하는데 바울은 광야교회라고 합니다(행7:38).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온 광야의 이스라엘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이후로는 육신적인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합니다.
육신적 이스라엘도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앞에서 사도행전 15장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만
십자가 이후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별이 없이 한 성령 안에서 한 새사람이 지어져야 합니다.
두곳의 말씀만 인용합니다.
로마서 8:28~29절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에베소서 2:11~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위의 두 곳의 말씀만 문자대로 봐도 십자가 이후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이
그 십자가의 피 뿌림과 성령의 역사로 한 새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 일차적이지만
그러나 그 문자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해석하여야 합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벧전1:10~11).
이 답변을 보시고 더 질문하실 내용이 있으면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참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임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