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구약 안식일 신학과 미래적 하나님 나라
신현우 교수
1. 시작하는 말
구약 안식일 신학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신약으로 오면서 더욱 영적으로 승화됩니다. 안식일의 노예 해방 정신은 악마의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으로, 안식년의 빚탕감 정신은 죄의 빚의 탕감 즉 죄사함으로, 희년의 기업 즉 토지 회복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1) 사망의 세력으로부터의 영적인 해방, 2) 죄사함, 3)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음, 이 세 가지는 신약의 하나님 나라 신학과 연관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지난 시간에 다룬 구약 안식일 신학의 빛 아래서 더욱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럼, 먼저 구약의 안식일 신학의 노예해방 정신과 신약의 사망 권세로부터의 영적 해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2. 노예 해방과 하나님 나라(사탄으로부터의 해방)
희년이 되면 노예가 해방되는 것을 지난 시간에 레위기 25장에서 읽었습니다.(레 25:54)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데, 하나님 나라는 노예를 해방시키면서 임하였습니다. 누구의 노예를 해방시켰는가 하면, 귀신의 노예, 즉 귀신들린 자들을 귀신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말쿳 야붸"의 번역어로서 즉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방식은 이 땅을 통치하는 기존 권력을 부수고, 그 권력 하에서 종살이 하는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방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을 장악하고 있는 마귀의 권세를 부수고 내 백성을 내어놓으라고 선언하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신이 쫓겨가는 것을 하나님 나라 도래의 증거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1:20을 봅시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 신학을 명확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13을 봅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이제 사탄의 왕국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진 것입니다. 사탄은 그 왕권을 박탈당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왕권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를 보내시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노예가 되어 끝없이 고역에 시달리는 노예들을 희년을 통해 해방시키실 뿐 아니라, 인간이 마귀의 노예가 되어 영적으로 착취당하며 죄와 사망의 그늘 아래서 살아야 하는 영적 노예들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새 시대를 선포하시면서 해방시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영적 해방을 위해 오셨음을 안식일 날 회당 설교를 통해 명백히 선언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16-21을 봅시다: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사야 61:1이하의 글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중에 "포로된 자에게 자유"와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는 바로 영적 포로의 해방을 뜻합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로마군에게 포로된 자를 구해주는 이야기는 없기 때문에 이사야서가 성취되었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영적 포로 해방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귀의 포로된 자들 즉 귀신들린 자들을 주로 고치셨기 때문입니다.
3. 빚탕감과 하나님 나라(죄사함)
이제 구약 안식년의 빚탕감이 어떻게 신약의 하나님 나라로 전개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방금 전에 읽는 누가복음 4장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사야의 글을 통해 자신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오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가난한 자"란 영적으로 빚진 자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음에 나오는 "포로"도 마귀에게 포로된 영적 포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3은 이러한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영적으로 빚진 자 즉 죄의 빚을 하나님께 지고 갚을 길이 없는 자들에게 복음 즉 기쁜 소식은 무엇입니까? 그 빚이 탕감된다는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영적 빚탕감 즉 죄의 빚탕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것은 빚을 대신 갚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구약에는 안식년 빚탕감법과 함께 가장 가까운 친족이 빚을 대신 갚아주는 고엘 제도가 있습니다.(고엘이란 구속자입니다.)
레위기 25:24-28을 봅시다: "24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25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26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으면 27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릴 것이니라 28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것이 곧 그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예수님은 죄의 빚이 진 자들, 즉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고엘’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신 빚을 갚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신 빚을 갚았나요?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대개의 중죄인들은 죽음으로 그 값을 치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상의 고난을 통하여 대신 형벌을 받음으로 죄의 빚을 갚아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6:28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사도 바울은 이러한 죄의 빚 갚음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즉 대신 빚을 갚는 죽음으로 이루어졌음을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7을 봅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골로새서 2:13-14은 더욱 구체적으로 이것을 가르쳐 줍니다: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여기서 '법조문으로 쓴 증서'는 keirografon의 번역어로서 빚문서를 가리킵니다. 빚을 진 사람에게는 빚문서가 있습니다. 죄의 빚을 진 사람의 빚문서를 없앤다는 것은 바로 죄의 빚을 갚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의 고난을 통해 우리의 죄의 빚을 갚으신 것입니다.
4. 기업 회복과 하나님 나라
구약에서 고엘이 대신 값을 지불할 때 기업된 토지가 회복되는 것처럼 신약에서는 우리의 고엘되신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으로 죄의 빚을 대신 갚으실 때, 기업된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기업"이라는 용어는 매우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이었습니다. 이 기업은 레위인을 제외한 11 지파에게 고루 분배되었는데, 그들은 가족마다 땅을 소유하고 계속 자손들에게 상속하여 물려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궁핍한 자들이 잠시 땅을 빌려주고 그 값으로 지탱을 하다가 이제는 빚을 내어 살다가 갚지 못하면 빚을 갚기 위해 최고 6년간 남의 종으로 전락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토지를 장기간 빌려주어 생산기반이 없는 자들은 계속 다시 빚을 지고 종이 될 위험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마침내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이 되거나 고엘이 대신 값을 지불할 경우에는 토지가 원주인에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는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상속받는 유업(기업)으로 묘사됩니다. 마태복음 25:34을 봅시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하나님 나라는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상속받는 유산에 비유됩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천지창조 이후부터 성도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5:5은 죄의 빚을 탕감 받은 자들이 받는 기업, 하나님 나라를 구약 희년 이미지를 사용하여 땅으로 묘사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땅은 원어로 살펴보면 정관사과 붙은 "그 땅"으로서 성도들이 기업으로 상속받는 새 땅 즉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베드로후서 3:13은 이 미래적 하나님 나라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합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요한계시록 21:1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이 유산을 받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로마서 8:16-17을 봅시다: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갈라디아서 4:7을 봅시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는 후사 즉 상속자란 의미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권세"가 있습니다.(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것은 우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는 상속권일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마태복음 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는 것이 옛 언약이었다면,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는 것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옛 언약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이 기업으로 주어졌듯이 이 새 언약에 약속된 것은 새 언약 백성들 즉,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기업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들에게 상속시키려고 예수께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죄를 대속하는 십자가상의 새 언약 체결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9:15을 봅시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 없는 신분의 사람들, 즉 죄의 빚을 갚지 못해서 사탄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예수께서 죄의 빚을 자신의 죽음으로 갚고 사탄의 노예를 해방하여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으로부터 상속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길을 트셨습니다. 마귀가 만든 감옥의 빗장을 열고 이제 마귀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믿고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로 나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자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므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6:9-10을 봅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갈라디아서 5:19-21을 봅시다: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에베소서 5:5도 봅시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5.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와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구약의 안식일을 성취하는 하나님 나라를 간구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는 노예 해방을 비는 기도입니다. 왜냐구요? 이스라엘 역사는 무엇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노예를 해방하는 법을 어김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했습니다.
예레미야 34:14-16을 봅시다: "14 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려 왔거든 너희는 칠 년 되는 해에 그를 놓아 줄 것이니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지니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느니라 15 그러나 너희는 이제 돌이켜 내 눈 앞에 바른 일을 행하여 각기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하되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 계약을 맺었거늘 16 너희가 돌이켜 내 이름을 더럽히고 각기 놓아 그들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 너희의 노비로 삼았도다."
히브리인들은 노예해방법을 어겼는데, 이것을 하나님은 "내 이름을 더럽혔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기원하는 것은 노예가 해방되어지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도 "사탄의 노예된 죄인들을 죄와 사망의 올무에서부터 풀어주옵소서"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기도문은 하나님 나라를 명확하게 간구하는 문장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마 6:10a) 여기서 나라란 원어로 '바실레이아 수' 즉 당신의 나라이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즉 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사탄의 노예된 자들을 풀어 자유케 함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고, 이제 창조된 그의 백성을 다스리기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간구하도록 주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 이 기도문은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며"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피우시온'이란 헬라어는 '내일의'라고 번역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과 대조되는 "내일"이 맞는 번역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대조가 앞에서는 하늘과 땅, 뒤에서는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로 계속 나타나기 때문에 여기서도 무언가 대조가 본래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태복음의 초기 번역본인 나사렛인들의 복음서에는 실제로 내일의 양식이라는 번역이 나타납니다.
일용할 양식이나 내일의 양식을 비는 것은 매일 일용할 양식이었던 만나를 비는 기도 또는 내일의 양식을 오늘 거두는 기도를 뜻할 것입니다. 내일의 양식을 오늘 거두는 것은 안식일 전날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16:5를 봅시다: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그렇다면 이 기도는 안식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안식을 주옵소서" 이 기도는 끊임없는 고된 노동으로 신음하는 애굽의 노예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였을 것이며, 오늘날 우리가 영적인 애굽의 노예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께 탄원해야 할 기도일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여기서 '죄' 즉 '오페일레-마'는 '빚'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죄'는 이어서 14절에 나오는 '파라프토마'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빚탕감의 기도입니다. 구약 안식년에 빚이 탕감되듯이, 그리고 그 법에 따라서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빚탕감을 실행하였듯이, 이제 하나님께서 인간이 하나님께 진 죄의 빚을 탕감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안식년 빚탕감법을 실행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매우 걸림이 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구약 안식년 신학을 토대로 확대해석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종에게 자유를 주고 풀어 준 것처럼 우리를 마귀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옵소서," "우리가 우리 친족의 기업을 값을 대신 지불하고 회복시켜 준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옵소서"라는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의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구약 안식일 신학의 폐지가 아니라 연속적 발전이며 완성인 것입니다.
6. 맺음말
우리는 구약 안식일 신학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신약으로 오면서 더욱 영적으로 승화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구약의 노예 해방은 사탄의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으로, 빚탕감은 죄의 빚의 탕감 즉 죄사함으로, 희년의 기업 회복 즉 토지 회복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온 하나님 나라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마귀의 세력을 부수고 이제 그의 백성을 통치하신다고 선언하시고, 십자가의 피로 죄의 빚진 자들의 죄를 대신 갚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제 죄와 사망의 그늘에 가리워져 있는 백성들이 자유를 얻었고 용서를 받았으며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예수님을 통해 도래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 간의 창조사역 후에 안식을 영원히 누리시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그러한 안식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된 인간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활동을 닮은 창조활동을 함과 동시에 창조 후에 쉬신 하나님을 모방하여 이제 역사의 종말에 영원한 쉼의 시간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는 바로 완전한 안식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안식의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쉼을 얻는 곳, 그러한 시간이 이미 벌써 이 세상에 들어와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성전과 안식일을 통해 구약에 예표 되었고, 오늘은 예배당과 주일을 통해 연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안식의 현재화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함께 좀 더 풍부한 차원들을 우리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구약 안식일 신학과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대해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사님, 그래서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각자의 위치에 따라 성경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게 비일비재한 게 교회 현장(주로 목사님들의 설교를 통해서)이고, 이것은 신학교의 교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로지 성경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지만, 특히 신학 교수들의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전부가 신학자가 될 수 없지만 바른 신학자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주위에 신학 책을 읽어라고 권하면 대부분의 반응은 무관심이거나 그냥 목사님 설교만 들으면 되지, 성경만 열심히 읽으면 되지 뭐하러 어려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냐고 합니다. 이건 우리의 성경 해석이 신학에 바탕을 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인 것인데, 성경을 더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알기 위해서는 책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은 책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가능합니다.(갑자기 제가 책전도사가 되었네요.ㅋㅋ)
저도 이제 인터넷 댓글을 달 정도니 신기합니다 ^^
윗 글중 분별할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라시는 ... 공감은 하지만 ..
이 부분에서 절 용감무식하게 만드십니다 .
사람이 신학과 책을. 그리고 오랜 신앙생활을 롱해
하나님을 분별한다 ....?
전 성경적 견해를 달기엔 일천한지식이고 ...
신학을 나름 6년 하고 기독교 강요 는 거의 외우고 ..
루이스 벌콥의 조직신학 .
게리할더스의 성경신학 정도만 압니다 .
신학교선 늘 골치아픈 장학생였고 사역현장선 복음전달이 얼마나
한 사역자의 전체을 걸어야 가능한지 그정도는 체험했습니다 .
신학과 책이 아닙니다.
물론 그게 뒷받침이 안되는게 사실 문제이긴하지만
오늘날 신대원서 가르치는게 목회성공 이라는 명제하에 강의를 합니다 .
적어도 그 소속 교단 . 그 노회서 양들을 많이 모아야된다는 ....
감히 말씀 드리지만 거기서 벗어나는분은 거의 드물고요 .
신학 . 중요합니다 .
하지만 제대로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마치 공룡이되어버릴듯 합니다
힘들게 연구해서 키우죠
쥬라기 월드의 박사들처럼 .....
어차피 자기는 살아남을거란 생각때문이죠 .
그래서 전 복음을 조금 맛본이후 신학책 절반은 버렸습니다( 무거운건 남겨둬야 혹 현찰화 )
그 책들을 버리면서 근 2년을 갈등했었습니다 .
교회당회서는 색안경을 쓰고 절 바라봤고 ..
결국 짤리고 ㅎㅎ
이장우 목사님 책임입니다 ㅋㅋ
문제는 근데 그때부터 복음이 조금씩 이해되었습니다
성경입니다 .
그걸 제대로 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많은 신학생들.
심지어 안수받은 목사님들도 공룡이될뿐입니다 .
오늘날 대형교회는 정말 다소 쥬라기 공원입니다 .
늘 1. 2. 3 편을 만들다보니 별 짓 다 합니다
말씀 위주의 소위 보수 교단 거기서 공부한 전도사가 본 현실 입니다. ...
그러니 성도들은 어떻겠습니까 .?
교회당이 쥬라기월드입니다 .
올바른 성경이해를 설교하는 목회자의 부재라 감히 생각합니다 .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은헤로
.전 그 진실이 무서워 근처도 못가봤습니다 ..
예수님을 .성경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신학자나 우리의 자인식이 소위
성찰이란 가슴속 울림을 꺼집어내어서 비라봤을대 그게 얼마나 그들만의 리그에 뜻을두면서
속이는지 알게해주십니다
물론 이런 상황 마져도 주님 예비하셨고 이미 말씀으로 증거되고있으니 ...
0 너희중에 누구든지 지헤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야고보서 1:5).
ps. 지극히 작은자의 좁은 소견입니다.
'아파르' 님 반갑습니다.^^ 이렇게 게시판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아파르 님의 댓글을 보고 몇 자 적어 봅니다.
아파르 님께서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그중에 신학에 대해 회의를 느끼신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뭐라 말씀을 드릴 수가 없네요.
저의 경우에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그래서 신학교계 내의 헤게모니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근데, 제가 본 신학 책들 중에서는 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책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나마 도움이 된 책들이 몇 권 있습니다. 이 책들로 인해 저는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그래서 소개하는 것이구요.)
제가 댓글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모든 신학교 교수들이나 목사들의 책이나 설교들이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분별하여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어떻게 하나님을 인간이 분별하겠습니까?)
현대 교회의 문제는 신학이나 신학생들이나, 신학교를 통해 배출된 목사들이 넘쳐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된 신학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신학을 배우기를 소망합니다...
'아파르' 님께서 늘푸른교회 이 목사님을 통해 복음을 새롭게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다니 저로서도 무척 감사한 일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깊은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신학자들이 이렇게 정리하고 교수를 하는데도 왜 이 땅의 목회 현장들이 이럴까요?
성전과 안식일을 예배당과 주일로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이어질 글에서 더 풍성한 내용을 끝까지 봐야 하겠지만).
물론 예배당에서 주일날 복음이 선포되면 성전의 기능과 안식일의 기능이 목표하는 안식의 현재화가 되겠 지만
단지 구약의 성전과 안식일을 예배당과 주일로 연속된다고 하는 것은 또다른 법으로 묶게 됩니다.
예배란 요한복음 4장예서 예수님께서 이 때라고 하시면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주신 그 때가 없다면 아무리 예배당에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고 하여도 예배가 안되지만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도 예수님이 만나주시면 영과 진리의 예배가 됩니다.
그런데도 신학자들이 구약의 성전과 안식일을 신약의 예배당과 주일로 연결시키는 이유는 신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신학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배당과 주일이라는 교회를 위한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산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런데도 신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신학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신학을 하는 이유는 교인들이 말하는 교회가 없다면 그들의 존립근거가 없게 됩니다.
교회가 없다면 신학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학교 교수들에게 누누히 들은 이야기는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이 바른 교회를 위한 신학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마땅히 바른 교회를 위한 신학이 나와야 하지만 그 중심을 보자는 것입니다.
신학교수들이 성경을 해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신학인지
교회를 위한 신학인지 구별 해 보는 것도 이런 글의 관전 포인트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