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6: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연보가 은혜라는 설교를 고린도 전서에서 하였습니다.

그 설교 전체는 너무 길고 부분적으로만 인용하여 옮깁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를 마감하면서 연보를 하라고 합니다. 매주일 첫날에 각 사람이 이익을 얻은 대로 연보를 하여 모아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회나 다른 교회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하고 예루살렘교회가 연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임을 사도행전을 통하여 이미 보았습니다.

 

어떻게 개로 여기는 자들에게서 돈을 받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인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이 연보를 주고받음으로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라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연보를 안 하는 것이 무슨 의가 되는 것인 양 여기는데 교회가 워낙 돈을 이야기하고 바치면 복 받는다고 하니 그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연보를 안 하고 있는 자기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것이 누구의 것입니까? 내 것을 가지고 드린다면 아까울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하면 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 은혜가 임한 자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8:1-15절입니다. “봉독”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무엇으로 나타났습니까?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은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제발 이런 은혜는 임하지 않았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 이런 은혜를 받았다면 말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예하게 된 것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도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 즉 연보에도 풍성하라고 합니다. 연보가 은혜임을 보게 됩니다. 은혜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이런 은혜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로 부요하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요함이란 세상에서 부자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부요하고 은혜에 부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과 은혜가 풍성한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습니까?

 

환난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이들의 환난과 극심한 가난이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나는 아파트 한 채 뿐인데 다른 사람은 세 체가 되니 나는 극심하게 가난하다고 여기는 것입니까? 상대적인 빈곤감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빈곤입니다.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그런 가난입니다. 그런데도 형제 섬기는 연보에 대하여는 힘에 지나치도록 기쁨으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연보란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지금도 계속하여 은혜가 주어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하늘 보좌에서 낮고 낮은 말 구유에 오셨습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기에 멸망하는 짐승과 같이 자기만 알고 자기 배만 섬기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부요하신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한 연보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부요를 자기의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도 그 부요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