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광장

  1.  자유게시판
  2.  행사갤러리
  3.  감사찬양
  4.  시편찬양방










창원시 성산구 대방동338-3 아카
데미 빌딩4층 담임목사 이장우
055-285-3726 HP:010-3848-3726

글수 906
  • RSS
  • Skin Info
  • Tag list
  • List
  • Webzine
  • Gallery
2013.03
26
준성아빠
2013.March.26.화09:48 2905 Views

 

'분노의 윤리학'에서의 박명랑의 여러 실험들은 사실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인상적으로 장식한 오버헤드 숏은 얼마 전 라스폰 트리에가 '도그빌'에서 시도한 바 있고, 절정부를 연극적 무대 위에 올려놓은 건 테일러 핵포드의 '데블스 애드보킷'을 연상케 한다. 등장인물들의 시점에 따른 시퀀스의 분절은 구로자와 아끼라의 '라쇼몽'을 보는 듯 하고 돌발적인 분노의 폭발과 갑작스런 등장인물들의 죽음은 아벨 페라라의 '퓨너럴'과 유사하다. 복수라는 주제나 하드보일드 스타일, 선명한 피의 제의는 박찬욱의 '복수 시리즈'를 닮았고, 반박자 빠른 템포와 럭비공같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의 전개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픽션' 같은 느낌을 준다.

 

내용도 마찬가지다. 옆집 여자를 훔쳐보는 정훈(이제훈 분), 빚을 지게 해서 매춘을 종용하는 포주 겸 사채업자 명록(조진웅 분), 여대생과 불륜을 저지르는 대학교수 수택(곽도원 분), 떠나 버린 애인 때문에 분노하는 스토커 현수(김태훈 분), 이들 네 명의 캐릭터나 그들에 의해 벌어지는 에피소드들도 다 어디서 한 번쯤은 보았음직한 낯익은 것들이다.

 

주제도 그렇다. 선악 판단의 모호함, 혹은 윤리적 상대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현대 영화의 공통된 특징이 아닌가.

그렇지만 '분노의 윤리학'의 박명랑에게는 뭔가 참신함이 있다. 그에게는 그다지 새롭지 않은 요소들을 결합시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비범한 솜씨가 있다. 그는 다소 의도적이고 과장된 설정을 억지스럽지 않은 이야기로 풀어낼 줄 아는 훌륭한 이야기꾼이다. 그의 템포는 관객들보다 늘 반박자 빠르다. 연속적 반전으로 그는 관객들이 쉽게 자기 영화의 결말을 예측하지 못하게 만든다.

 

또 그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한데 묶을 때 그것이 이야기 속에 어떤 긴장과 힘을 만들어 내는지를 잘 안다. 이 영화를 시종일관 지배하는 독특한 웃음 코드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충돌의 결과물이다. 예컨대, 교양 있는 건달이라든지, 몰카남 경찰이라든지, 유혈이 낭자한 순백의 스튜디오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코믹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박수를 받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분노'와 '윤리학'의 결합이다.

 

감독 박명랑은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점찍었음이 분명한 명록(이름도 비슷하다)의 입을 통해 분노의 철학을 논한다. 명록에 따르면 희로애락이라는 인간의 감정 중 단연 갑은 '노(怒)'다. 왜냐? 명록의 이론에 따르면 이렇다. 화나는 일과 그렇지 않는 일이 동시에 일어날 때 인간의 감정은 어느 쪽으로 기울까? 즉 기쁘거나(喜), 슬프거나(哀), 즐겁거나(樂) 하는 중에라도 화(怒) 날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될까? 화를 낼까, 안 낼까? 당근 화를 낸다는 것이다. 이유는? 분노라는 감정이 가장 세기 때문이란다. 유치할 정도로 단순하지만 동시에 설득력이 있는 명록의 논증은 인간의 감정 중 분노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잘 드러낸다.

 

분노는 인간의 감정 중 가장 강력할 뿐만 아니라 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다. 현수가 진아를 죽인 것이나, 명록이 정훈과 현수를 폭행한 것이나, 정훈이 명록을 죽인 것이나 다 분노 때문이다. 진아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4명의 비열한과 여타의 등장인물들 모두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자신들의 분노를 분출해 낸다. 그리고 이들 분노가 한꺼번에 분출되어 나오는 곳이 바로 스튜디오 로코코다.

 

분노의 폭발 현장이 스튜디오 로코코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로코코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던 당시의 프랑스 사회를 풍미했던 문화 사조를 일컫는 말이다. 하얀 순백의 스튜디오와 귀족적 에로티시즘이 물씬 풍기는 진아의 세미누드는 로코코 양식의 전형이다. 그 때문에 스튜디오 로코코를 피로 물들인 얼치기들의 복수 혈전은 프랑스 혁명을 희화화한 것이 아닌가 짐작케 한다. 그 짐작이 맞다면 아마도 감독은 이러한 설정을 통해 지금 우리 사회가 혁명 전야의 상황임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감독은 분노라는 최강의 감정을 윤리학과 연결시킨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철학적이고도 신학적인 의미의 지평을 열어젖힌다. 영화는 분노가 그냥 분노가 아니라 그것이 늘 윤리학과 연결되어 있음을 통찰해 낸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그들이 분노하는 이유가 무척 흥미롭다. 놀랍게도 영화는 그들의 분노의 원인을 윤리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윤리란 선과 악의 판단과 관련되어 있다. 즉 분노는 결국 선과 악에 대한 판단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분노의 근저에는 바로 이러한 윤리적 심판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통찰이다. 현수의 분노는 진아가 자신을 떠나 교수와 불륜을 저지르는 행위를 악하다고 판단한 결과로 말미암았고, 명록의 분노는 빚을 갚지 않은 채 갑작스럽게 죽은 진아와 그녀를 죽인 현수에 대한 윤리적 심판이 원인이다. 정훈도 명록이 그의 자료를 강탈해 갔을 때 결국 그도 분노를 폭발하고야 만다. 그의 분노는 명록의 불법탈취 행위에 대한 심판으로 말미암았다. 간통남 수택은 검찰과 경찰 후배들의 무관심을 정의롭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분노한다. 선화는 겉으로는 분노를 폭발시키지 않았으나 실은 그 누구보다 분노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분노가 뜨거운 분노라면 그녀의 분노는 차가운 분노다. 그녀의 차가운 분노의 원인은 남편 수택의 간통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 때문이다. 이처럼 윤리(학)가 분노의 원인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통해 분노는 윤리학과 결부된다.

 

분노가 윤리학과 결부되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 그건 분노가 자신의 악을 은폐하는 방식을 통해서다. 스튜디오 로코코에서 벌이는 비열한들의 유치하면서도 현란한 기소의 내용은 서로의 악을 고발함으로써 자신들의 분노를 정당화한다.

"

쟤 때문에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 것은 옳아."

 

더 나아가 그들은 정당한 분노 때문에 저지른 폭력도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영화 속에서 분노는 늘 폭력으로 표출되는데 만일 분노가 정당하다면 분노의 결과물인 폭력도 정당하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쟤 때문에 나의 분노는 옳으며, 그 분노의 결과로 일어난 나의 폭력은 정당해."

 

분노는 자신의 악을 은폐하는 정당화의 기제다. <데블스 애드보킷>의 존 밀턴이 정확히 지적한 대로 분노는 죄인들의 마지막 무화과 나뭇잎이다. 현수의 살인은 정당하다. 왜냐? 정아의 불륜에 대한 정당한 분노 때문이다. 정훈의 총격도 정당하다. 명록의 불법 탈취에 대한 정당한 분노 때문이다. 뭐 이런 식이다.

 

요약하면 분노는 이중적으로 윤리학과 결부된다. 윤리(학)이 분노의 원인이라는 점과 분노를 통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분노는 타인의 악을 고발하고, 자신의 악은 감춘다. 그러니까 결국 분노는 윤리에 대한 헌신 때문에 일어난다. 참으로 역설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악인들이 실제로는 모두가 윤리에 헌신되어 있으며, 선을 추구하고 있다니 말이다. 해서 그들의 주장을 모두 들은 선화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네요."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아담과 하와가 보였던 태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아담은 잘못을 하와에게 돌리고, 하와는 뱀에게 전가했다. 결국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잘못이 분명 저질러졌기 때문이다. 한 여대생이 살해당한 엄연한 사실이 존재한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은 엄연한 현실이 존재한다. 이 엄연한 현실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잘못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건 결국 선악 판단의 기준이 사유화(privatization)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여기서 가장 오래된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선악 판단의 보편적 기준이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선악 판단의 보편적 기준과 관련해서 인간 문명은 늘 심각한 모순에 처해 왔다. 한편으로, 인류는 선악 판단의 보편적 기준을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것이 이데아, 이성, 양심, 권력, 교회, 종교, 정언명령, 세계 인권 선언, 법체계, 생명 가치, 타자의 얼굴, 인류 공영 등…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모든 기준들은 언제나 잠정적이었을 뿐 늘 의심을 받아 왔다. 결국 역사 속에서 보편적인 윤리적 기준은 존재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악 판단의 보편적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인류 문명은 거대한 윤리적 상대주의의 쓰나미를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윤리적 판단기준을 가질 뿐이라고 주장하는 윤리적 상대주의를 문명이 버텨 낼 수 있을까? 문명은 재난은 견뎌 내겠지만 아마도 아노미는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선악 판단의 보편적 기준을 인류는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고, 또 앞으로도 가질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인류는 보편적인 윤리적 기준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없어도 그건 언제나 전제되어야 한다.

 

영화 '분노의 윤리학'은 관객을 정확히 이러한 모순적 현실 한가운데로 불러낸다. 스튜디오 로코코에서 비열한들의 뻔뻔스러운 자기주장들은 윤리적 상대주의가 범람하는 아노미적 현실을 잘 보여 준다. 이를 통해 영화는 그들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판가름할 수 있는 보편적 기준이 과연 존재하는지를 묻는다.

 

이 점에서 선화가 앉은 의자는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네 명의 비열한(네 명 중 한 명은 명록의 꼬붕으로 전체 흐름상 그는 수감된 수택을 대리한다)이 흘려 만든 피의 십자가 앞에 의자를 놓고 앉는다. 마치 법복을 입은 대법관처럼 말이다. 그녀는 사뭇 진지하고, 또 차분하게 세 사람의 의견을 청취하고, 조율한다. 나름대로 진상을 파악하고, 설득력 있게 세 명의 화해를 주선한다. 그렇게 그녀는 서로 대립하는 의견의 충돌을 아우르는 하나의 포괄적 타결안을 제시한다.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그들의 주장들을 아우르는 타협안이니 이것이 보편적 기준으로 적합하지 않는가?

 

하지만 관객은 그녀의 타협안이 결코 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먼저 그녀의 공리주의적 대타협이 살아남은 비열한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는 조금 쓸모 있을지 몰라도 억울하게 죽은 진아의 핏값을 보상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욱 큰 문제는 그녀가 겉으로는 초연하고, 객관적인 양 행세하지만 실상은 그녀 자신도 그 문제에 연루된 장본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스튜디오에 널브러져 있는 세 명의 비열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에 연루된 제 4의 인물인 남편 수택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녀는 남편의 외도에 대해서 분노하며 그를 심판하고 싶어 한다. 결국 그녀의 포괄적 대타협안은 자신의 분노와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에 불과할 뿐 정의나 보편적인 윤리적 기준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이 점에서 '분노의 윤리학'은 구로자와 아끼라의 '라쇼몽'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라쇼몽'은 관객을 대법관의 자리에 앉혀서 간음과 살인 사건에 연루된 세 명의 연루자들의 증언을 청취케 한다. 관객은 그 자리에서 세 명의 증언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왜곡되어 있는지를 똑똑히 보게 된다. 이때 제4의 인물인 나무꾼의 증언이 나온다. 그의 증언은 일견 객관적인 듯 보이나 실제로 나무꾼 역시 그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임이 밝혀진다. 결국 그의 말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면서 영화는 끝난다. '라쇼몽'과 마찬가지로 '분노의 윤리학' 역시 어느 누구도 절대적인 진리 주장을 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기준이 선악 판단의 보편적 기준이라고 주장할 수 없음을 잘 보여 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노의 윤리학'은 윤리적 상대주의를 옹호하지 않는다. 영화는 선악 판단의 보편적 기준을 늘 상정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사용된 오버헤드 숏을 통해 알 수 있다. 위에서 수직으로 지상을 내려다보며 찍은 이 앵글은 지상을 내려다보는 신의 시점을 닮았다. 순간 이동을 통해 분절된 시점들을 연결하는 구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전체 상황을 모자이크처럼 짜 맞추어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형식적 장치들은 신이 세상에 대해서 그러하듯 관객으로 하여금 전체 상황을 한눈에 조망하도록 돕는다. 즉 감독은 관객의 시점을 신의 시점과 일치시킴으로써 한 여대생의 피살 사건과 연루된 비열한들의 기소 및 변호의 내용을 심판하게끔 촉구한다. 물론 관객이 상대주의적 윤리학을 해소할 만한 보편 윤리학을 구성해 내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이 모든 사건을 내려다보는 신적 시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킨다. 하지만 영화는 보편적인 선악 판단의 기준을 전제하면서도 그것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 2~3장의 선악과 이야기를 다시 생각게 한다. 창세기 2장에 따르면 에덴동산 중앙에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서 있었다. 창세기에 따르면 그 나무 열매는 따먹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열매였다. 그것을 따먹는 행위는 창조주에 대한 반역이며, 범죄다. 그렇다면 생겨나는 질문은 이것이다. 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가 '악(혹은 죄)을 알게 하는 나무'가 아니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일까?

 

자끄 엘륄은 <원함과 행함>에서 그 나무를 윤리의 나무라고 해석한다. 그렇다! 그 나무 열매는 단순히 악을 아는 열매가 아니다. 그 열매는 선과 악을 판단케 하는 나무 열매였다. 인간의 범죄 이전까지 인간은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았다. 해서 반역 이전에는 윤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에덴이 비윤리적 공간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선와 악의 판단 기준이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존재하는 상태였다. 이런 점에서 에덴은 초윤리적 공간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이제 그들은 뱀의 말대로 '신처럼(like God)' 선과 악을 심판하는 심판자가 되었다. 이전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선과 악을 심판했다면 이제부터는 모든 인간이 선과 악을 심판하는 심판자가 되었다. 이와 함께 윤리가 탄생했다. 윤리는 본성상 반역적이다. 왜냐? 인간은 늘 선과 악을 판단하고 선만을 택함으로써 스스로 선한 존재, 혹은 거룩한 존재가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처럼 된 인간이 신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행위이다. 하지만 창세기는 선언한다. 윤리는 범죄의 산물이며, 반역의 결과라고.

 

결국 윤리(학)의 곤경은 선악 판단의 기준을 모두가 사유화한 데에 있다. 성서 식으로 표현하면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남을 판단하는 그 잣대로 그도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분노의 윤리학'이 잘 보여 주듯이 인간이 윤리(학)에 헌신하면 할수록 세상은 더욱 분노와 폭력으로 난무하게 된다. 사실 역사 속의 모든 전쟁과 폭력의 이면에는 늘 윤리(학)에 대한 헌신이 존재하고 있었다. 9.11 테러리스트가 그러했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악의 축과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윤리학이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칸트나 리츨의 주장과는 다르게 하나님나라는 결코 윤리의 왕국일 수 없다.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윤리(학)가 사라질 것이다. 모든 무릎이 한 분 왕께 꿇리게 될 것이며, 오직 그 한 분 그리스도께서 홀로 공평과 진리로 통치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만이 참되며, 그의 판단만이 정의롭다. 그 때문에 교회는 윤리에 헌신한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판단에 복종하는 자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하지만 이런 점에서 교회는 세상과는 다른 윤리(학)적 곤경을 안고 있다. 그건 그리스도의 통치로 말미암아 이미(already) 윤리(학)가 폐기되었다는 종말론적 현실과 그리스도께서 아직(not yet) 재림하지 않으셨기에 여전히 윤리(학)가 요구되는 역사적 현실 사이의 모순 때문이다. 교회는 윤리(학)가 요구되는 필연적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판단을 묻고 구하는 종말론적 공동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본성상 고린도전서 14장이 보여 주듯 예언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예언 공동체로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판단을 분별하는 공동체이며, 그 판단으로 통치하는 공동체라는 뜻이다. 그리고 바울이 잘 말해 주듯 그리스도의 판단은 어느 감독이나 장로, 목사에 의해 독점적으로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모든 지체들이 참여하는 영분별의 과정을 통해 희미하게 드러난다. 그것이 완전하지는 않으나 교회는 공동체의 모임 속에서 드러난 그리스도의 판단의 통치를 받는다. 교회는 분노의 윤리학에 지배를 받는 곳이 아니라, 평화와 정의의 왕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그의 백성이다.

신광은 / 대전 열음터교회 담임목사·<메가처치 논박> 저자

댓글
2013.03.26 09:51:40
준성아빠

저는 신광은 목사님의 글들을 통해 여러 번 전율을 느꼈습니다. 분노가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타당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옷을 찢은 대제사장의 분노의 행위는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는 행위일뿐만 아니라 진정한 선악의 판단자이신 예수님을 자신의 선악의 가치로 판단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댓글
2013.03.26 23:06:10
이장우목사.

고린도후서 10장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번호
제목
글쓴이
공지 성경 본문찾기, 관주,사복음대조,성막이야기 1 imagefile
복음은혜감사
2009-12-11 194011
공지 이장우 목사 지역별 성경공부 안내
복음은혜감사
2013-04-22 188823
공지 저절로읽어지는 성경일독 소개합니다. 3 imagefile
복음은혜감사
2014-07-29 169439
공지 창원 늘푸른교회 방문시 시내버스 노선도입니다.
복음은혜감사
2016-01-03 146721
공지 [안내사항] 회원가입후 설교보실수있습니다 imagefile
복음은혜감사
2022-01-13 104831
906 반갑습니다 1 secret
채집사
2014-10-17 2
905 종전홈페이지의설교내용 1 secret
정경근
2009-12-22 5
904 감사의 말씀 1 secret
남해안
2014-12-07 5
903 교회와 이단 1 secret
올리브
2016-01-21 5
902 안녕하세요. 1 secret
yoon1220
2016-12-27 5
901 안녕하세요 목사님~ 1 secret
기쁨하늘맘
2018-01-15 5
900 질문 올립니다. 1 secret
emily
2016-01-02 7
899 일본에 잘 돌아 왔습니다. (김 도국) 1 secretimage
민파파
2019-01-19 7
898 목사님 1 secret
연두와보라
2018-02-23 9
897 목사님을 다시 뵙게되어 너무 좋았습니다. 3 secretimage
Taz
2013-04-10 216
896 생방송 동영상 잡음으로 인한 사운드카드 교체하였습니다.
임창길집사
2014-03-16 2879
895 가입하였습니다. 1
헤벨
2014-04-28 2885
894 실시간 교통정보,CCTV 실시간알려주는 앱입니다.
임창길집사
2014-05-15 2895
'분노의 윤리학'을 보고(펌) 2 2
준성아빠
2013-03-26 2905
892 구름과 달 2
임창길집사
2013-03-19 2911
Copyright ⓒ 1999-2021 Nulpurun churc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