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주 전 딸아이는 돌팔이 같은 의사의 엉터리 진단으로 고생을 한 적이 있다. 눈꺼풀 아래 작은 이물질이 밀착되어 있어 그것으로 눈꼽이 끼고 침침했는데 그 의사는 알레르기성 결막염이라며 엉터리 약을 2주 동안이나 넣게 만들었던 것이다. 다른 의사의 정확한 진단으로 그렇게 오래 불편했던 눈이 마침내 회복이 되었다.

 

엉터리 진단으로 고생했다는 생각이 들자 그 황당한 의사에게 전화라도 걸어서 한 말씀 하고 싶었다. 당신 그러고도 의사야? 좀 더 성의 있게 환자를 대할 수 없어? 이물질 하나만 들어내면 될 텐데 스테로이드제제의 약을 2주간이나 넣게 해? 그럴 수 있어? 라며 항의 하려다가 그만 참았다. 다행히 다른 병원을 찾아 정확한 진단을 받고 치료가 끝났으며 어차피 고쳐진 그 육신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영적 진단 일 것이다. 나는 오래도록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가끔은 집나간 탕자가 돼지우리 속을 서성이듯, 메마르고 빈약한 세속의 진단을 그리워하며 그쪽으로 눈길을 돌릴지도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 전원의 스위치를 켜고 끄며 애틋한 삶의 여정을 나름대로 잘 이어가고 있다고 착각 했다 응답하라 삶이여라고 부르면 나름대로 응답이 왔고 그 응답은 간혹 나를 무릎 꿇게도 했고, 순응하게도 만들었다. 그때마다 약간의 희열도 있었고 숨 막히게 괴롭고 얼룩진 아픔도 있었다. 그것이 삶이겠거니 했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거기 까지였다.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생의 목적은 피상적이였으며 언제나 파편적이였다. 이원론적 신앙생활 그 이상을 생각 할 수 없었다. 내 안이 온통 흑암인 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돌팔이 의사의 오진처럼 그것은 정답이 아니였다.  진단이 바르지 못했기에 해석은 언제나 낱개의 파편들로 수습되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 나에게 그 빛이 비추어졌다. 그러자 나를 두르고 있는 것은 흑암이며 공허임을 보게 하셨다. 그리고 흑암의 정확한 진단은 흑암을 비추이는 빛이 비추일 때만 가능함을 알게 하셨다. 이 땅이 창조되기 전, 이미 빛으로 존재하시던 그 빛 앞에 섰을 때, 나는  내 것이라 여기는 것을 지키기 위해 애써 온 모든 것 들이 흑암의 뿌리였음을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빛이라 여겼던 그 파편의 불빛들은 엉터리 안약으로 내 눈을 더욱 오염시켜 왔을 뿐 이였다. 그 흑암 가운데 나를 오래도록 가두어 두심으로

그 빛이 얼마나 간절 했던 빛 인가를

숨 막히도록 완강한 빛 인가를

얼마나 눈부신 빛 인가를 알 게 해 주셨다.

 

기쁘고 감사하고 눈물겹게 고마워서 나는 이 사실을 조금씩 말하기 시작한다. 정확한 진단은 그 빛 뿐 입니다 라고.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 말을 하는데 그 말이 통하는 길동무가 생기는가 하면 당연히 통하리라 믿었던 친구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애쓰던  너였는데 왜 그렇게 변했는지 이해 할 수 없다" 고 한다. 그동안 내가 애써 온 것들이 검은 휘장에 가려져 있었던 것임을 이제서야 나는 알겠는데,  얼마나 변덕을 부리고,  얼마나 끙끙 대었었는지를 알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하신 그 빛 앞에 더욱 비추임을 받는 일 뿐,임을 알겠는데, 그 친구는 이런 나를 어의없어 하며 안타까워 한다.

 

어찌되었건 사명이 생기니 내 육신이 아파도,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그 의사에게 전화하지 않고도 이렇게 평온할 수 있음이 그 작은 증거라면 증거라 해도 좋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