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바로듣기]  [음성설교 다운받기]

욥기 3:1~26 욥의 탄식 2016. 1. 20

 

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4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5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6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7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8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9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욥의 재산이 날아가고 자식들이 한꺼번에 다 죽어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순전함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그의 몸이 침을 받았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서 쓰레기 더미에 앉아서 기왓장으로 긁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욥의 아내는 당신처럼 그렇게 순전하게 여호와를 경외하였는데도 이런 재앙을 내리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욥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도 받지 않겠느냐며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욥의 아내도 사라지고, 더 이상 천상에서 사탄의 참소도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욥의 세 친구들이 등장하였습니다. 지난주에 본 내용입니다만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의 몰골을 보고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리 질러 울고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일을 욥과 함께 땅에 않아 있습니다. 욥의 슬픔에 동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심함을 보았기에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어제 경주에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투병을 하면서 저의 설교를 들으며 늘푸른 교회 가서 예배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답니다. 자녀들이 올 계획을 다 세웠는데 갑자기 응급실로 가느라 오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지난 토요일 돌아가신 것입니다. 대구 서머나 카페에 장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묻기에 제가 갈수 있다고 했습니다. 월요일 강구만 장로님이 입관을 했고 저는 화요일 가서 발인과 하관까지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들 가운데 복음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하관을 기다리면서 한 시간 가량 복음 전하고 하관 하고 바로 내려왔습니다. 몇 시간 함께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가족들에게 무슨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일주일을 그렇게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그 후에즉 일주일이 지난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원문으로 보면 욥이 대답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욥기 3장이 욥의 독백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이 바로 옆에 앉아있기에 이들이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독백이라고 해도 욥의 친구들에게 한 말이 됩니다. 그러면 일주일동안 서로 침묵하면서 앉아있을 때에 아무른 생각도 없이 그냥 앉아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욥은 욥대로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을 것이며 욥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할지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평소의 삶이 어떠한지를 알기에 섣불리 인과응보적인 말로 위로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드디어 욥이 입을 열어 자기 생일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욥의 독백이든 친구들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든 간에 결국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탄식하면서 왜 나를 태어나게 하였느냐고 그 날이 없었다면 좋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무효화 하고 싶은 마음인 것입니다. 다른 날들은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도 자신이 태어난 그 하루를 누구든지 없애 버렸으면 좋겠다고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창조를 반대하여 모든 날을 저주하는 자들이 리워야단을 격동시켜서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창조의 반대세력이 있을 수 없지만 고대의 사상 속에 이러한 개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러한 시대적인 환경과 사상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문 3~10절입니다. 그 날 곧 자신이 잉태하게 된 그 날에 대한 저주를 합니다. 욥기 3장부터 산문이 아니라 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는 문학에서 압축과 비유가 가장 잘 드러나는 내용입니다. 한 줄의 시 속에 엄청난 사상을 함유하게 됩니다. 더구나 성경의 시는 하나님의 계시이기에 한 단락 한 단락을 천천히 묵상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원망하는 내용이 계시가 될 수가 있는가 할 것입니다만 성경에는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사탄의 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과 욥과 욥의 친구들의 말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욥이 어떻게 고난을 이기고 복을 받았는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욥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봐야 합니다.

 

표준 새 번역으로 3~10절을 보겠습니다. “3 내가 태어나던 날이 차라리 사라져 버렸더라면, '남자 아이를 배었다'고 좋아하던 그 밤도 망해 버렸더라면, 4 그 날이 어둠에 덮여서,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도 그 날을 기억하지 못하셨더라면, 아예, 그 날이 밝지도 않았더라면, 5 어둠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제 것이라 하여, 검은 구름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낮을 어둠으로 덮어서, 그 날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더라면, 6 그 밤도 흑암에 사로잡혔더라면, 그 밤이 아예 날 수와 달수에도 들지 않았더라면, 7 , 그 밤이 아무도 잉태하지 못하는 밤이었더라면, 아무도 기쁨의 소리를 낼 수 없는 밤이었더라면, 8 주문을 외워서 바다를 저주하는 자들이, 리워야단도 길들일 수 있는 마력을 가진 자들이, 그 날을 저주하였더라면, 9 그 밤에는 새벽 별들도 빛을 잃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려도 밝지를 않고, 동트는 것도 볼 수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욥의 부르짖음은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부 가정법을 사용합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잉태한 날, 자신이 태어난 날이 없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무효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이러한 표현들은 그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이런 탄식을 쏟아내겠습니까! 이러한 자기 생일에 대한 저주와 탄식은 결국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서려 있습니다. 우리는 욥기서 1장과 2장만 강조하다가 보니 욥기 3장 이후에 관심을 잘 가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고통과 재앙가운데 하나님을 원망하면 복을 받지 못할까봐서 끙끙거리면서도 원망을 하지 않고 참고 견디는 것이 신앙인줄 압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신앙이 아니라 오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참고 견디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안 주시는지 두고 보자는 식으로 나오는 것은 자기 자존심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만약 이런 자들이 천국에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고난이 올 때에 다 배신하였지만 자신들은 배신하지 않았다고 자랑할 자들입니다. 사파동의 지방교회 건물에 보면 주 예수의 이름과 그 말씀을 배반하지 않는 교회라고 써 놓았습니다. 계시록 3:8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빌라델비아에 어떤 자들이 있습니까?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나 사단의 회당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성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과 그 말씀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직 은혜로 예수님만 믿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사도요한도 예수님을 배반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약속과 그 은혜로 돌아올 수 있었기에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이러한 탄식에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본문 11~19절입니다. “11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12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14 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15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16 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17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18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19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3~10절까지는 자신에 태어난 날이 차라리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고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이제는 11~19절은 어찌하여 나를 죽이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태어서 죽어서 나왔으면 좋았겠다고 합니다. 해산 할 때에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합니다.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고 내가 젖을 빨았는지 탄식을 합니다. 차라리 죽었더라면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욥의 말에서는 현재의 이 고통들이 죽음으로 끝이 나는 식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말도 자신의 고통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대단한 사람들도 다 죽었는데 자신이 무엇이라고 이렇게 살려두고 고생을 하게 하느냐는 말입니다. 세상의 대단한 사람들이란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금과 은으로 자기 집을 채운 고관들을 말합니다. 이들이 세상에서 대단해 보여도 죽으니 조용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나 낙태되어 묻힌 아이처럼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빛을 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죽음의 세계를 세상의 관계성들이 다 끊어진 것으로 말합니다. 악한 자의 소요도 끊어졌기에 피곤한 자의 쉼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갇힌 자도 감독의 호통소리를 듣지 않게 된다고 봅니다. 작은 자든 큰 자이든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서 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안히 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죽으면 끝입니까? 요한계시록 14:11~13절입니다.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어제 하관시에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만 지옥이란 밤낮 쉼을 얻지 못합니다. 그냥 죽는다고 끝이 나거나 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곧 주 밖에서 죽으면 그 사람은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것입니다.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인내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 곧 예수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따라 사는 자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죽음은 수고를 그치고 쉼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이 안식입니다. 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참된 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괴로워서 탁 죽어버린다고 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20~26절입니다. “20 어찌하여 고난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21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23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24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6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이 본문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봅니다. “20 그런데, 어찌하여 고달픈 자에게 빛을 주시고 괴로운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21 죽고 싶지만 죽을 수조차 없어 보물을 찾듯 파헤치다가 22 묘지의 돌만 보여도 반갑고 무덤이라도 만나면 기뻐 소리친다! 23 빠져 나갈 길은 앞뒤로 막히고 하느님께 영락없이 갇힌 몸, 24 나 이제 한숨이나 삼키고 흐느낌이나 마시리니 25 두려워하여 떨던 것이 들이닥쳤고 무서워하던 것이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26 평화, 평안, 안식은 간 곳이 없고 두려움만이 끝없이 밀려오는구나.”

 

성도는 스스로 죽을 수도 없습니다. 고난을 당하는데도 빛을 주시고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단지 태어나는 빛과 생명만이 아니라 고난 중에 마음이 아픈데도 빛과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않고 보물을 찾는 것처럼 죽음을 찾아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은 탄식뿐입니다. 자신이 두려워하던 일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자신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기의 자녀들까지 죄를 범할까 싶어서 예방적인 희생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범죄로 인하여 두려운 일들이 닥칠까 그렇게 하였는데 이제는 그 두려운 일들이 닥쳤습니다. 이제는 평온도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불안만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이러한 탄식과 고난 속에서 더 이상 내려갈 수도 없는 그 바닥에서 빛과 생명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이런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증언한 내용들이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한 자들의 탄식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잘못하여 오는 고난이 아닙니다. 욥도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까닭 없는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예표하고 있습니다. 욥과 같이 생일을 저주한 선지자가 또 한 사람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하여 고난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였는데 닥치는 것은 고난뿐이니 자기의 생일을 욥처럼 저주합니다.

 

예레미야 20:14~18절입니다. “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15 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16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니 17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배가 부른 채로 항상 있지 않게 하신 까닭이로다 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욥의 탄식과 거의 흡사합니다. 예레미야는 왜 이런 탄식이 나옵니까?

 

바로 앞의 7~8절을 봅니다.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하나님의 권유를 받아 주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사람들에게 종일 조롱거리가 됩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이런 조롱과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까? 그 이유는 말할 때 마다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욥처럼 생일을 저주합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의 탄식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합니까?

 

시편 22:1~8절입니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편의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대로 증거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여 건짐을 받았지만 시편 22편의 이 부르짖음에는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시는 예수님의 이 부르짖음을 사람들은 비웃고 입술을 비쭉거리며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시길 걸! 하면서 조롱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욥이나 예레미야나 시편 가자나 간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의 까닭 없이 당할 고난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그 아들의 희생으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의 비밀이 담긴 고난입니다. 이러한 고난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예수님입니다. 이제 그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그 영을 자기 백성에게 부어주십니다. 부활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로마서 8:18~23절입니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욥의 탄식과 예레미야의 탄식과 시편 22편의 부르짖음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의 완성으로 부활이 있습니다. 그 부활의 생명을 넘겨받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특징이 탄식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유 없는 탄식이 아닙니다. 구약처럼 까닭 없는 탄식이 아닙니다. 구약에는 그림자로 보여주시는 탄식이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된 탄식이 성도에게 일어납니다. 이러한 탄식은 몸의 속량이 일어날 때 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그 몸의 속량 곧 몸의 부활이 일어날 때 까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도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닌 보이지 않는 소망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4~30절입니다.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성도는 묵시 안에서 이미 의롭고 영화롭게 된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이 역사 속에서 탄식하며 고통 하는 것은 몸의 구속이 남아있기에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탄식이 나올수록 성도는 몸의 구속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성령님과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런 자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이 땅에서 탄식하는 중에 받는 위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