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교회 수련회


주제: 소망에 관하여

주관: 제 3남전도회


일시: 2018. 5.6~7

장소: 마산가톨릭교육관


대한예수교장로회 늘푸른교회

www.evergreen17.com



일정표

3018. 5. 6

   

오후 5수련장 도착 방배정

오후 5~6산책 및 휴식

오후 6~7저녁식사

오후 7~10    소망에 관하여 1

오후 10~      교제와 안식

 

 

2018. 5. 7

 

오전 8~9시  아침식사

오전 9~12소망에 관하여 2

오전 12~        점심식사와 귀가

 


소망에 관하여

 

 

서시(序詩)

 

예수는 인류의 기쁨과 소망 -J.S.Bach

 

예수님은 나의 기쁨의 원천이시며

내 마음의 본질이며 소망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근심에서 나를 보호하시며

내 생명에는 힘의 근원이 되시며

내 눈에는 태양이며 기쁨이 되시고

나의 영혼에는 기쁨이며 보물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과 눈에서

예수님을 멀리 하지 않으려 합니다.

 

1. 서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주님으로 계십니다. 이런 자들은 반드시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은 삶으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어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소망은 세상이 말하는 꿈이나 희망이 아닙니다. 인간이 예측하거나 포획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소망은 종말론적이기 때문입니다. 종말론적이라는 말은 창조-타락-구속-완성(종말)의 개념이 아니라 완성(종말)-창조-타락-구속으로 보는 겁니다. 이렇게 보는 것은 창세 전 언약(17:5, 24. 1:4. 벧전1:20), 곧 영원 전 언약(3:21. 딤후1:9. 1:2. 1:25)이 있기 때문입니다. 종말이 창조를 앞서는 이유는 영원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뜻 가운데 그 아들을 위한 창조이기 때문입니다(1:16).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기 위하여 소망이 아닌 것을 먼저 살펴보고 구약의 소망과 신약의 소망을 징검다리처럼 보겠습니다.

 

 

2. 소망이 아닌 것

 

로마서 8:24~25절입니다.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소망을 바라본다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참고 기다릴 믿음이나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에 성령이 우리 안에서 친히 기도하시고(8:26) 예수님께서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십니다(8:34).

 

로마서 8:18~23절입니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가 탄식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탄식은 소망 없는 탄식이 아니라 몸의 구속을 소망하는 탄식입니다.

 

고린도후서 4:18절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성도라면 그 소망이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소망한다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의 썩어질 것을 소망한다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읽은 이 한절의 말씀이 들어있는 고린도후서 4장만 제대로 읽어보면 이미 무엇이 성도가 바라볼 소망인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고린도후서 4:1절부터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오직 진리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복음이 가려져 있다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려진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이 들리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신이 복음의 광채를 가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신은 보이는 것을 추구하게 합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세상의 자랑이 될 것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 이 세상 신의 일입니다. 아담을 유혹하고 예수님을 유혹한 그 옛 뱀, 사탄이 이 세상의 신입니다.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되고 참된 소망을 가지는 일은 인간 스스로 될 수가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런 자는 보배가 질그릇에 담긴 사람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심히 큰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그 과정은 온갖 환난에 넘겨지지만 그런 일을 당할수록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 이런 예수님을 스스로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이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나누어지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죽음에 넘겨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믿음이며 소망입니다. 이런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골로새서 3: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성경 세 곳만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가 그동안 소망한다고 추구하면서 살아온 결국이 어떻게 됩니까? 세상에서 복 받고 하늘에서도 상 크게 받으려고 열심히 노력하였는데 우리가 추구하는 복이나 상의 개념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으로 생각하였다면 복은커녕 하나님의 진노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렇게 따르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에서 본 대로 이 세상의 신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를 가리고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요한일서 2:15~17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이 정도의 말씀만 보아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어떤 것들도 소망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나의 욕망을 꿈과 비전과 소망이라는 말로 포장하여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추구하면서 살았습니까? 그 이유는 보이지 않는 소망을 보이는 소망으로 바꿔치기 한 거짓 선생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책임이 더 중하겠지만 그런 거짓 선생들이 나오는 것은 그런 거짓된 것을 요구하는 자들의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모습입니다(살후2:10). 진리의 사랑은 받은 자들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로 마음이 가는 자들입니다.

 

 

 

3. 구약의 소망

 

구약의 소망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인 안식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이 안식입니다. 이 안식은 충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창조의 완성은 곧 종말입니다. 그러므로 종말 곧 완성을 보이시고서 창조를 다시 설명하시는 것이 창세기 2:4절부터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가 나오고 선악과가 나오는 것도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뜻은 영원 전에 언약하신 내용이며 그 언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5:39).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이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생명나무를 먼저 말씀하시고 선악과를 말씀합니다. 선악과를 먹으며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것은 생명이 어떻게 주어지는 것인지 알게 하시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가 있어야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명을 주시는지 드러납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은 스스로 선악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의 본성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기에 인간은 생명을 스스로 취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주셔야만 됩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방식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용납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시를 보여주시려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십니다. 타락한 인생의 제물을 받아주시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받아주심이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인정하지 않고 모독한 자가 가인입니다. 그래서 아벨을 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벨 대신 셋을 주셔서 여인의 씨와 뱀의 씨가 어떠함을 보여주십니다(3:15).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 된 인생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이스라엘의 두 가지 악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2:13).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타락한 인생이 다 이런 삶을 살아가기에 서로 자기를 살리려고 아귀다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의 삶 가운데서 이것이 다가 아님을 아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과율로 해석이 안 되는 고난이 닥쳐 올 때에 그 고난의 끝에서 새로운 소망을 바라봅니다.

 

욥기 19:25~27절입니다.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욥의 까닭모를 고난을 욥의 친구들이 인과율로 정죄합니다. 그런데 욥은 그 고난 가운데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볼 것을 소망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을 볼 것을 초조함으로 기다립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른 어려움이 없이 만사형통하였다면 십자가에 마음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른 어려움이 없어보여도 십자가에 마음이 끌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속은 어떤 고난이 있는지 타인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썩어질 소망이 아닌 것에 눈이 뜨이게 되는 것은 고난을 통하여서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3:17~29절입니다. “17 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 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7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격한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른 슬픈 노래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전체를 보면 죄로 인하여 고난 받는 중에도 소망을 노래하는 것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하심이 무궁함을 믿기 때문입니다.

 

시편 19:14~15절입니다. “14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자니이다 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욥기와 같은 맥락의 소망입니다.

 

시편 49:16~20절입니다. “16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17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18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19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생시에 치부하면서 그의 영광이 더하여짐으로 자기를 축하하고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의 칭찬을 받아도 그것은 썩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산다면 아무리 존귀한 자라고 하여도 멸망하는 짐승 같습니다.

 

시편 73:25~26절입니다.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하여 고민하던 시편기자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내용입니다. 하늘과 땅에서 사모할 분이 주님뿐이라고 합니다. 그 주님이 영원한 분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난 중에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이 날이 될 것을 선지자들을 너무나 많이 선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분명히 자신들이 언약을 어김으로 징벌이 주어지는데 오히려 그들은 제의적인 행사를 하면서 자기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메시아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들을 그 날을 심판의 날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2:10~12절입니다. “10 너희는 바위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11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12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 메시아 대망의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의 날이 구원이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됩니다. 온갖 우상을 섬기며 살던 자들은 그 날이 심판의 날이 되기에 스스로 피하여 숨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2:17~22절입니다. “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18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19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20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경배하려고 만들었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21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구원을 받으리라고 소망하며 기다린 날이 오히려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복음, 예수, 영이라고 하지만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있습니다(고후11:4).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지만 그 날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15~17절입니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이사야서와 계시록을 보면서 오늘 우리가 어떤 소망으로 살아가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아모스 5:20~34절입니다. “20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21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것은 종교적인 제의나 제물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입니다.

 

요엘서 2:28~32절입니다.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5)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주께서 만민에게 곧 모든 육체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는 날이 구약의 소망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마음의 할례(10:16, 30:6, 9:26), 새 언약(31:31), 새 영(11:19, 36:26)을 부어주신다는 말씀으로도 이미 예언하였습니다. 그 날에는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장래 일과 꿈과 이상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바꾸어서 온갖 비전센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엘서 2장의 말씀이 성취되었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2:33~39절입니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바로 앞의 말씀을 보면 오순절 성령이 임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술에 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요엘서 2장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말하는 장래 일과 꿈과 이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심으로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주셨다고 합니다. 다윗의 시편에서 예언 된 너는 네 우편에 앉아 있으라고 하신 그 내용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으로 이루어졌기에 지금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것은 구약의 소망이 성취가 된 것이기에 그 소망의 성취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마음에 찔리는 자들이 어찌 할꼬 할 때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소망이 성취된 현장입니다. 이 약속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런 소망으로 산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히브리서 11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1~3절입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전체로 연결하여 해석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필요한 몇 구절만 따 와서는 우리가 소망하는 것들을 얻으려면 마음으로 상상하고 그 상상한 바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루어진다고 하는 식으로 말한 사람이 세계 최대의 교회라는 곳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해석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는 앞에서 읽어본 몇 곳의 성경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 자들이 어떤 모습인지 이어지는 말씀을 봅니다.

 

4~6절입니다.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믿음의 사람들 중에 세 사람만 봅니다. 아벨과 에녹과 노아입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자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죽여 버립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데려가심으로 지상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의 나이로는 삼분의 일만 살았습니다. 에녹에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것은 므드셀라를 낳으면서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므두셀라가 죽으면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내용은 유다서를 보면 에녹이 선지자로 등장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합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늘 종말론적인 의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 역시 세상의 홍수로 멸망할 것을 계시로 받았기에 방주를 예비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으로 살아간 자들입니다. 이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한 성을 예비하여 두셨다고 합니다.

 

구약에서 모세의 수건이 벗겨지지 않은 채로 소망을 기다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4:17). 그러므로 구약 전체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혈과 육으로는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가 가득한 것을 에스겔이 본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는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본 것입니다(37:11). 그러므로 구약의 소망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실 것을 소망합니다.

 

 

4. 신약의 소망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소망하였지만 그들이 원한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시는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증거 한 사람인데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 의심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지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과 부활승천과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복음을 증거 합니다. 성령이 임한 사도들은 구약적인 메시아니즘이 아니라 새로운 소망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국가적이고 혈통적인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선포하며 동시에 소망합니다.

 

사도행전 24:14~16절입니다. “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 그들이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16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바울사도가 벨릭스 총독에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으니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한 이유는 나사렛 예수가 그들이 기다린 그 소망의 실체라고 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구약의 약속이며 그 약속을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전하는 것을 유대인들이 싫어합니다. 동일한 소망인데 그 소망의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으로 이단으로 정죄 당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8:19~20절입니다. “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바울사도가 로마에까지 와서 구금된 상태에서 유대인을 초청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자신은 이스라엘과 조상들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여 하는 수 없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자신도 전에는 예수 믿는 자를 다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나니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망한 그 내용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고 믿고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5: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며 또한 은혜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망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통하여 소망이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우리에게 임한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6,8,10).

 

로마서 8:18~27절입니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이 소망을 위하여 예수님도 기도하십니다(34).

 

이제 신약의 서신에서 소망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여 살펴봅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15:4).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15:12).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5:13).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립니다(5:5). 성령으로 인하여 믿음을 가지게 되면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인한 믿음이 아닌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신을 따른 소망이나 희망은 의의 소망을 기다리지 않고 썩어질 것과 땅의 영광을 구하게 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소망이 무엇인지 그 내용을 보면 그것이 성령으로 인한 것인지 육체의 정욕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도하기를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인지 알기를 기도한 것입니다(1:18).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지 않으면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으로 인하여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면 소망도 하나가 됩니다(4:4).

 

성령이 임하여 같은 소망을 가진 자들은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며 이 소망은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고 합니다(1:5). 이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으면 우리가 그 영광 앞에서 흠 없이 서게 될 것입니다(1:22,20). 복음의 이 비밀은 그리스도이신데 우리의 영광의 소망이 되십니다(1:37).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를 성경은 자는 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에 대하여 알지 못함을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몸의 부활을 할 것이기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살전4:13).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살후2:16~17). 그러므로 소망이 있는 성도는 죽음도 슬픔이 아니라 소망이며 복입니다(14:6).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고 합니다. 소망은 내생(來生)의 유익만이 아니라 금생(今生)에도 유익이 있습니다. 참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자들은 세상이 아무리 우울해보이고 비관적으로 보여도 소망으로 인하여 기쁨으로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이 소망을 인하여 수고하고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입니다(딤전4:8~10). 그러므로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합니다(딤후6:17).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가 되어 전도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한 것입니다.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 영생의 소망입니다(1:1~3). 이러한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십니다(2:13). 그 소망의 결국은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십니다(3:7).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사환이었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의 아들로 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으면 우리가 그의 집이 됩니다(3:6). 그러므로 사도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입니다(6:11). 이러한 소망을 가진 것은 영혼의 닻과 같습니다(6:19). 이 소망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갑니다(7:19). 이 약속을 하신 분이 미쁘시기에 우리는 그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을 수 있습니다(10:23). 이 소망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곧 그 언약의 피와 이를 증거 하는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지 않습니다(10:2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는 이유는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벧전1:3).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산 소망이 아니라 죽은 소망, 썩은 소망, 영원히 심판 받을 것을 소망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은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고전13:13).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이 자기 남편에서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습니다(벧전3:5). 오늘날 신부된 교회는 신랑 되신 예수님께 순종합니다.

 

베드로전서 3:10~17절입니다.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소망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런 소망은 세상의 썩어질 소망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주신 이유는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어올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8~9절입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산 소망의 결론은 사랑하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5. 결론

 

요한계시록 22:17~21절입니다.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성경의 결론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성령은 종말의 영입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들은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없었습니다(4:32). 오늘 우리는 성경의 결론인 이 말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정말로 소망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족하며 살 것입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에 선한 일에 부요함으로 살 것입니다(딤전6:3~21). 우리가 이렇게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어올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온유와 두려움으로 소망에 대한 이유를 말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