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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4:4~8 헛된 삶과 평온한 삶 2019. 2. 20

 

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5 우매 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6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7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지난주에 학대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올해가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기미년 삼월 일일에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대한독림만세를 외친 날입니다.  억압을 벗어나고자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재산과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그런데 독립 운동한 후손들은 대부분 힘들게 살아가는데 친일한 사람들의 후손들은 대부분 부요하게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불법을 하더라도 내가 더 많이 가지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립이 된 이 나라에 여전히 학대와 억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학대와 억압이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사회운동이나 종교적인 활동을 하여도 학대와 억압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세계 단일정부를 세우거나 종교를 통합한다고 학대와 억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단일정부와 종교 통합을 반대하는 자들을 학대하고 억압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인위적인 활동이나 운동으로도 결코 차별 없이 공평하게 살아갈 세상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평화를 말하고 있습니까? 구약에서 평화를 예언하고 그 평화를 이루신 것이 신약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두 곳의 말씀을 서론으로 보고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사야 11:1~5절입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메시아가 오시면 공의로 다스리기에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어떤 평화입니까?

 

6~9절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메시아의 통치를 그림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문자대로 이루려고 하는 자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입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이미 2천 년 전에 오셨는데 이런 세상이 왔습니까?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차별이 없는 이런 나라가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지는지 신약을 봅니다.

 

로마서 3:19~22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 곧 구약이 증거 한 내용입니다. 그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기에 그 안에서는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골로새서 3:8~11절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가 동일한 복음을 듣고 동일한 믿음을 가졌다면 우리 안에 차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온갖 사람의 외적인 조건들도 차별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았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아직도 이 몸의 구속이 일어나지 않았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전자라면 이런 말씀이 나에게 아무른 울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후자라면 이런 말씀을 통하여 벗어버릴 것과 입어야 할 것을 알게 되고 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입니다. 예수님이 전부가 되면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

 

고린도후서 5:1~9절입니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우리의 몸의 구속이 일어나기 전에는 탄식하는 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8:26).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 죽을 몸이 생명에 삼켜졌고 이것을 이루시는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지금 몸으로 주님과 따로 살고 있음을 알기에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몸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말하지만 우리의 죽을 몸이 온전히 생명에 삼켜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을 덧입게 될 때에는 그 어떤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영광의 날을 소망하면서 지금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 받은 자들은 복음 안에서 차별이 없음을 맛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죽든지 살든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본문 4절을 봅니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주에 본 말씀대로 세상에서 학대를 받지 않고 억압을 받지 않기 위하여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인하여 세상의 어떤 것을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루고 나니 이웃에게 시기를 받습니다. 학대와 억압에서 벗어나기는 하였지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만 공동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경쟁심이 있어서 남보다 더 얻으려고 기를 쓰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이 또한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다.” 즉 시기와 경쟁심 때문에 애를 써서 더 얻으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 또한 바람을 잡듯이 헛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시기를 받든지 시기를 하든지 간에 이 세상에서 시기와 경쟁으로 인하여 헛된 삶을 살다가 가는 겁니다.

 

5절입니다. 우매 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낸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입니다. “그렇다고 팔짱을 끼고 놀다가 말라 죽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시기와 경쟁을 하는 것이 헛되다고 해서 팔짱을 끼고 놀다가는 말라 죽는 것입니다. 이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요즈음 자연인이라는 프로그램이 4050대에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혼자서 산에서 살고 싶어 하지만 그 자연인이 얼마나 부지런해야 하는지는 생각을 안 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므로 시기와 경쟁에서 벗어나서 혼자 살려고 해도 팔짱 끼고 놀다가는 굶어죽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6절입니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낫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입니다. “바람을 잡으려고 두 손을 허우적거리느니 한 움큼으로 만족하는 것이 더 낫다사람이 학대와 억압을 받아본 사람이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열심히 재주를 다하여 무엇을 이루면 시기를 받습니다. 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하여 시기와 경쟁으로 인하여 열심히 노력하여 무엇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이루었다고 하는 그 순간은 잠간이며 곧 더 큰 허무가 밀려오는 것은 노력하여 성취를 해 본 사람은 압니다. 그러니 이것도 허무합니다. 그러므로 두 손에 가득 채우려고 평생 시기와 경쟁 가운데 사는 헛된 삶 보다는 한 손에 채우고 평온한 삶이 낫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안분지족(安分知足)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평안하게 살면서 자신의 분수에 맞게 살자는 것으로 보이지만 인간이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7~8절을 공동번역으로 봅니다. “7 나는 다시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또 하나 헛된 일을 살펴보았다. 8 아들도 형제도 아무도 없이 외톨이로 사는 사람이 있다. 끝없이 일만 할 뿐 재산을 모으고 또 모아도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 아무 즐거움도 모르고 이 고생을 했는가?" 하게 될 테니 이 또한 헛된 일이라, 보기에도 딱한 노릇이다.” 안분지족이 안 되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족도 없고 재산을 물려줄 자식도 없으면서도 끝없이 일을 하고 재산만 모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헛된 일을 왜 인생들이 하고 있는 겁니까?

 

전에 어떤 드라마를 보니 재벌인데 서열이 10위 안에 들지 못하는 재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간절한 소원은 10위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온갖 불법도 다 합니다. 그런데 10위 안에 들어가면 1위가 보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헛된 삶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 안에 시기심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에서 시기가 불같이 일어나기에 다시 헛된 바람을 잡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시기가 어디서 오는 것이며 얼마나 지독한지 야고보서를 봅니다.

 

야고보서 3:13~16절입니다.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시기와 경쟁과 다툼이 어디에서 옵니까? 땅의 것이며 정욕의 것이며 귀신의 것입니다. 우리 안에 독한 시기와 다툼 경쟁이 있다면 마귀에게서 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17~18절을 보면 위로부터 오는 것이 있습니다.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땅에서 오는 것과 위에서 오는 것을 비교합니다. 위에서 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런 열매가 없이 사람에게서 시기와 경쟁이 멈출 수 없이 나오는 것은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귀의 속임에 의하여 시기와 경쟁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속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1~4절입니다.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4 1)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시기와 정욕이 어떤 결과가 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새 번역으로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그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 출애굽기 20:5절에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신 성령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고 합니다. 개역은 성령이 사모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이 거하시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6절을 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우리의 옛 사람은 세상의 것을 사랑합니다. 이런 자들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이기에 우리 안에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러면 우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겠습니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합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깊은 뜻을 아시기에 그 뜻대로 기도하셔서 우리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 은혜는 교만이 깨어지는 은혜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서 멀어지게 하십니다. 그렇게 깨어지고 낮아진 마음을 주셔서 주님의 은혜만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우리의 세상 사랑보다 더 큰 은혜입니다.

 

7~10절입니다.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그런즉이란 우리 안에 성령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정욕을 좋아하게 하는 마귀를 대적하게 하시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은 우리의 평소의 세상 사람과 전혀 반대되는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손에 가득 잡으려고 하는 그 손을 깨끗이 하라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합니다. 슬퍼하고 애통하고 울라고 합니다. 세상에 대한 웃음과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합니다. 시기와 경쟁은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기에 낮추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으로 불가능하기에 우리 스스로는 안분지족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자족을 알게 하십니다.

 

디모데전서 6:6~10절입니다.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헛된 삶과 평온한 삶을 이런 말씀들을 보면 분명하여 집니다. 우리 안에 주의 영이 임하였다면 이런 말씀에 아멘이 됩니다. 비록 이 말씀대로 살지는 못하여도 적어도 이 말씀의 방향이 옳다는 것은 인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남은 믿음의 생애가 이러한 말씀이 실제임을 확인받으면서 가게 됩니다. 말씀이 우리의 몸에 체득되어지는 과정이 성도의 삶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시기가 그쳐지고 한 손으로 진 것으로 자족하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 보좌 우편의 주님의 일입니다.

 

누가복음 12:16~21절입니다.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자기 형의 유산을 가로챘다고 자신의 몫을 나누어 주게 하여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하시면서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신 후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만유가 되시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를 늘 허기진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려고 합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주어진 자는 예수님이 전부이시며 예수님이 생명이며 부활이심을 알고 믿기에 예수님으로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자들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열심히 일하지만 자기를 위하여 끝없이 쌓아두려는 헛된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나누며 살아가면서도 자족하며 감사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평온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