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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7:5~12 지혜의 그늘 아래 2019. 5. 1

 

5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6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7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1)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11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12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본문 5절을 봅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더 낫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은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를 어리석은 사람의 찬양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는 것보다 지혜로운 사람에게 책망을 듣는 것이 낫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칭찬받기를 좋아합니까? 책망받기를 좋아합니까?

 

디모데후서 3:15~17절입니다.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1)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2)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중에 우리가 좋아할 내용이 있습니까?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받는 일을 우리는 근본적으로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읽는 우리도 하나님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의 책망이 들리고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이 은혜이며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이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는데 어느 정도로 책망하는지 보셔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고 합니다(6:5, 8:21). 악에 익숙한 인간이 스스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흑인이 그 피부색을 바꿀 수가 없고 표범이 얼룩반점을 스스로 바꿀 수가 없는 것과 같다고 말씀합니다(13:2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합니다(17:9). 이런 인간의 죄를 책망하는 지혜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 지혜의 말을 전하는 자를 핍박하고 죽인 것이 구약과 신약의 증거입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지혜가 사람으로 오셔서 책망하시니 그 하나님마저 살해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다고 합니다. 바로 앞의 말씀과 연결하여 보면 어리석은 자들의 웃음소리란 어리석은 자들의 칭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구약에서 거짓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책망보다 백성들에게 거짓 평안을 말합니다. 물론 그들의 입에 무엇을 채워주면 축복을 말하지만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않으면 트집을 잡고 재앙을 말합니다(3:5). 이런 자들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 가시나무가 타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들리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냥 사라지는 연기와 같습니다. 그런데도 거짓 선지자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탐욕 때문입니다.

 

본문 7절 새 번역입니다. 탐욕은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고, 뇌물은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탐욕을 내면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그 탐욕으로 인하여 뇌물을 받으면 그 지혜로운 자의 마음이 병이 들고 결국은 망신을 당합니다. 말씀이 이러함에도 사람들은 그 탐심을 물리칠 능력이 없습니다. 때로는 뇌물을 물리치는 청백리(淸白吏)가 있습니다만 그러한 사람은 명예를 얻게 됩니다. 지난주에 본 대로 명예도 탐심입니다. 그러므로 탐심의 끝과 뇌물을 받는 자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본문 8~9절입니다. “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공동번역입니다. “8 일을 시작할 때보다는 끝낼 때가 좋고, 자신만만한 것보다는 참는 것이 좋다. 9 짜증을 부리며 조급하게 굴지 마라. 어리석은 사람이나 짜증을 부린다.”

 

사람이 언제 분노하고 짜증을 부리게 됩니까? 어떤 일을 시작하였는데 일의 진행이 자기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화가 나고 짜증이 납니다. 그 일의 끝이 자기에게 기분 좋은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으니 참지 못하고 분노를 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 자체가 이미 타락한 인간이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왜 모든 일의 끝이 자기를 좋게 하는 결론이 나와야 합니까? 심지어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는 말씀을 알고 있어도 자꾸 엉뚱한 이야기하면 화가 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작한 일의 끝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들의 끝을 아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히브리서 9:26~28절입니다.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세상에서 인간들이 계획하고 성취하는 사사로운 일들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의 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때가 바로 세상의 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끝을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 끝이 초림입니다. 이 끝을 성령이 임하여 아는 사람들은 이미 세상의 끝을 알고 살아갑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며 그 이후에 심판이 있음을 알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재림으로 인하여 십자가의 세상 끝이 확증됩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그 아들의 희생을 통한 완성을 목적으로 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들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영광입니다(13:31). 그러므로 세상의 끝이 십자가임이 온 우주에 드러나는 날이 재림입니다.

 

요한계시록 21:1~6절입니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1)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십자가로 다 이루신 그 예수님께서 이미 이런 끝을 다 말씀하셨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이신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묵시 속에서 완성이 된 것입니다. 이 묵시적인 완성을 성령으로 인하여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일을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진다고 하여도 분노하거나 짜증낼 일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신 그 일을 믿고 살아가는 것으로 자족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받아야 함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로 다 이루신 그 완성 그 끝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어지는 8절입니다.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셨다는 그 끝을 알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도 자기 탐심에 이끌려 삽니다. 이들은 자기의 행위를 따라 성공과 실패를 가늠 질하면서 살기에 늘 두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 속에 살기에 그런 삶이 흉악한 자들이며 살인하는 자들이며 음행하는 자들이며 자기의 운명을 점치며 우상 숭배를 하며 살다가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의 이 끝을 믿으신다면 세상의 일들은 다 시시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옛날이 지금보다 더 좋은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질문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옛날이 지금보다 낫다고 합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은 현재의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워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 처지가 너무 힘 든 사람이었다면 지금 형편이 나아졌을 경우에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이 지금보다 나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왕년(往年)에 잘 나간 것을 추억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하기에 이런 말 자체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본문 11~12절입니다. “11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12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라새 번역으로 봅니다. “11 지혜는 유산을 받는 것만큼이나 좋은 것이니, 이 세상에서 살면서 그 덕을 보기 때문이다. 12 돈이 사람을 보호하듯, 지혜도 사람을 보호한다. 그러나 지혜를 깨우쳐 아는 지식이 더 좋은 까닭은, 지혜가 그 사람의 목숨을 살려 주기 때문이다.”

 

지혜는 유산을 받는 것처럼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유산을 많이 받은 사람과 유산을 받기는커녕 빚만 물려받은 사람의 세상살이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받는 것이 유산을 받는 것만큼 좋다고 합니다. 세상의 유산이나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라는 것을 유산처럼 받는 것을 비교합니다. 세상의 유산을 받은 것이 좋습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유산으로 받는 것이 좋습니까? 세상에서 부모의 유산을 받는 것은 돈의 그늘아래 사는 것입니다. 돈의 그늘아래 사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는 대한민국이라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실감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금 수저 흙 수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유산과 관련된 말입니다.

 

그러나 지혜의 그늘아래 살아가는 것은 그런 세상의 썩어질 유산이 아닙니다. 이 유산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하심으로 인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주시는 것이 지혜의 그늘입니다. 이 지혜의 그늘은 세상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여서 아무고 그 그늘아래 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만이 이 지혜의 그늘아래 머물려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그 내용이 참으로 지혜의 말씀으로 들리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11절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봅니다. 지혜는 유산과 같이 좋은 것이라, 해 아래 사는 사람치고 그 혜택을 입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혜가 유산과 같이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모두가 지혜의 혜택을 입고 산다는 말씀입니다. 잠언 8장을 보면 지혜가 천지를 창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해 아래 모든 사람이 다 지혜의 혜택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간은 지혜의 그늘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그늘에서 살려고 합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이 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돈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딤전6:10). 그런데 누가 돈의 그늘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백성만이 돈의 그늘이 아니라 지혜의 그늘에서 살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이런 소원은 우리에게서 나올 수가 없기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돈의 그늘에서 살지 못하도록 조치를 하십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나니 방주를 짓습니다.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노아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팔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중요한데 노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홍수가 닥치게 되자 누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인지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렇게 깨닫는 순간은 이미 늦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지금 지혜의 그늘아래 들어가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18~24절입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2)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 그늘 아래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볕 심히 뜨겁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 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내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 볼 때 날 위해 고난당하신 주 예수 보인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십자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 나 사모하는 광채는 주 얼굴뿐이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두려움 없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아멘! (찬송가 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