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한 자의 신앙은? (고린도전서 139-13)

 

(고전 139-13)9.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여러분 장상한 신앙 성숙한 믿음을 갖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그래도 은혜를 알고, 영성을 말하는 기독교인들의 최고의 관심사가 뭔 줄 아십니까? 사람은 정말 변하는가? 변할 수 있는가? 만일 변한다면, 무엇이 얼마나 어떻게 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 믿음이 성장할 수 있을까? 자라날 수는 있을까?이런 수준 있는 고민은 바람직한 것이며 아주긍정적인 것입니다.오늘 본문에도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그런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다.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이 변했다는 거잖아요. 성장했다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바뀌게 하는 겁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그건 시간입니다. 경험입니다. 물론 이것은 방향성이 맞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 정보 경험 이런 것을 통하여 인간은 어느 정도 자기 생각이나 입장이 성숙한 자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연륜이라고 하죠,저는 어렸을 땐 아버지가 젤 힘이 센 사람으로 알고 있었고요.그리고 실력이 제일 좋은 최고로만 알고 있었던 때가 있었죠?? (목수 일을 하셨거든요)여러분도 어릴 땐, 다 그랬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잘못된 정보가 가져다 준  착각이잖아요, 세상을 나의 좁은 생각으로만 본 것입니다.이제는 여러분도 합리적인 생각과 경험을 통하여 그런 잘못된 확신과 편협한 시각을 버리게 되었잖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인간은 바른 길을 들어섰다는 가정 하에 드린 말씀인데요.


인간은 애탕초 그 과녁이 빗나가 다 삐뚤어지고 뒤틀려서 어긋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타락했다고 하는 것인데요. 이처럼 인간은 근본 뿌리째 잘못 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대 전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회심의 원어 메타노이아‘(μετανόια)는 완전히 180도 회전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거든요. 조금 방향이 어긋나서 그것을 돌리는 정도가 아니라 가는 목적지가 다르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던 길을 돌이켜 유턴 하다 이런 뜻이 있단 말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지혜를 짜내도 스스로 깨닫기를 나는 날 때부터 죄인이요 예수가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요. 오직 주 예수를 믿음으로만 인간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는 자는 없다고 로마서에서도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러므로 성령이 임해야 인간이 주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복음이 깨닫게 되는데요. 이것을 회심한다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성도가 회심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오실 때까지 생각하고 말하고 깨닫는 것이 장성한 자의 신앙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인데요. 이렇게 잘못된 생각의 방향이 바로 잡히는 것을 방향성이 맞았다 하는 것이요. 이것을 돌이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인간은 죄의 길에서 돌이키는 관점의 변화 시각이 변화가 필요합니다. 누가복음 23장의 골고다 현장에서 슬퍼했던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예수께서는 유명한 말씀을 하시죠.”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해 울라무슨 말씀이죠. 저들이 잘못된 메시야관을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지금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의 왕으로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그런 정치적인 메시야 민족적인 메시야를 지금 바라고 있었던 것이잖아요. 그렇게 예수를 바라보는 우리 시각이 잘못 되어 버리면 결국 십자가 지신 예수를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저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뒤 다 뿔뿔이 흩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메시야관은 어떻습니까?복 받게 해 주는 예수 문제 해결해 주는 예수 성공하게 해 주는 예수 이런 거 아닌가요, 세속적인 메시야관입니다. 이런 것은 잘못된 메시야니즘이죠. 다만 예수를 내가 하나님 만나는 도구로만 생각한단 말입니다.(14:6)”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했죠

 

본문에 깨닫는 것이 바뀌었다했잖아요 이건 회심으로 죄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그 뒤로도 끝임 없이 지향성을 갖고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매진해야 한다는 뜻인데요. 어디까지 자라가야 합니까?(12)”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때가 언제 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보게 하시지 한 사람으로 진리를 온전히 다 아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거대한 진리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했잖아요. 그러나 그떄우리가 주님의 시각을 가지게 될 때, 그리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이 완성되는 그 시점 시공을 초월한 세계를 말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아무도 이 세상에서는 예수가 될 수 없고 내가 진리가 될 수 없으며 사랑의 완성자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랑이 필요한 자로 존재로 사랑을 흘려주는 파이프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다. 진리다 보혜사다, 사랑의 완성자다 하는 이야기는 다 이단에서가 나올법한 이야기인 거죠. 이단은 교주를 신성시해야 하기. 때문에 기도하다 계시를. 받았다 꿈에서 현몽을 했다 그렇게 설화를 만들어 자기들만이 완전한 진리를 갖고 있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있는 것인데요. (이런 것은 100% 다 가짜라고 보시면 됩니다.)우리도 남이 갖지 못하는 십자가 복음을 가졌다고 하는데 우리에게도 이런 지적교만이 나타날 수 있거든요. 나는 다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리다. 이런 흑백논리에 메몰 될 수 있어요.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가 지금 아는 것은 부분적으로 아는 것 일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어느 누구도 주님 직접 대면하기까지 진리가 될 수 없고 진리를 온전히 내 것으로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거든요. 다만 진리 되신 예수 안에 품어 진리로 간주해 주시는 은혜일뿐입니다. 내가 예수가 되어서 구원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필요한 자로 입증되어 예수의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이 사실이 우리가 육신을 갖고 이 세상을 사는 한, 어떤 진리를 깨달아도 변치 않는 거예요.그분이 오셔서 내 육이 죽고 예수 안에 함몰 당하는 실제적 연합이 이루어 지지 않고는 여기서 벗어날 사람이 없는 거예요.오직 한분 예수만 부활 하시고 승천 하신 것입니다.여러분! 고린도 교회가.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말이 많았습니까?나는. 바울파요, 나는 베드로파요, 하면서 그러나 모두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 뿐인 것을 몰랐던 거죠.그럼에도 인간은 절대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한 범위 내에서 인간의 제한된 두뇌로 이해할 뿐 온전히 알 수는 없어요. 어차피 우리는 그 나라에 가서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뵙기 전에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아는 것뿐이거든요.그 많은 성경을 기록했던 바울도 이 점에.대하여 뭐라 합니까?(빌립보서 313-14)"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성경의 진리를 인간의. 언어로 이거다. 라고 한 마디로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창세전 예정과 역사를 초월한 십자가의 구속, 그리고 제한 속죄와 인간 모두를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아십니까그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어떻게 설명할건데요, 그리고 성령 충만과 인간이 성령을 거역하고 소멸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예수의 영광스런 재림과 심판 이런 것을 완벽하게 설명해 낼 수 있습니까?


성경이 말하지 않는 부분을 억지로 풀다가 이단이 되는 겁니다.우리는 겸허하게 성경 안에서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어렴풋이 이해할 뿐입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나는 예수의 속죄 은총이 필요한 결핍이 있는 자요, 하나님이 나로  믿게 안 하시면 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없음의 존재라는 자아 인식이 뚜렷하게 성령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가, 이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여러분! 이건 우리가 그냥 하는 말로  '내가 죄인이야~, '내가 문제야~, '나 때문이라니까, 이런 식의 자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책하고 반성해서 구원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래서 예수가 내 대신 십자가를 지셔야 했구나? 이렇게 예수가 필요한 자로 드러나야 예수의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장성한 시각은 균형 감각인데 외줄타기 달인은 결국 균현감각의 문제잖아요..그래서 장성한 신앙은 극단주의를. 피하고 남을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제 경우를 한번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저의 경우 성화주의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부터 극단주의에 빠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요. 난 내가 진리를 가졌다고 믿는 순간 남을 무조건 배격하고 공격하고 나와 다르면 다 잘못 되었다고 비판의 칼을 뽑아 들기 일쑤였죠.그러나 성경 속의 진리는 어떤 교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어떻게 죄인인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는 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복음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그것을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 성경을 오로지 나의 구원에 초점을 맞춰 함부로 재단하고 교리를 정립하는데 쓴다면 이건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며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바른 태도가 아니죠.사람들은 다 자기의 입장에서 자신의 편의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어 있는데요. 이런 것은 매우 위험 하거든요.그런데. 우리가 어렸을 땐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아서 그렇게 성경을 보고 그렇게 해석하고 그것만이 내가 진리를 바로 수호하는  길이다. 이렇게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런 것은 다 장성한 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저도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음을 새삼 고백하는 바입니다., 이런 태도가 어린 아이의 모습인가 하면은요. 언제나, 어린 애들은 자기만 생각하고 나만 옳고 넌 틀리다. 이잖아요. 완전한 흑백논리인 거죠.


그리고 어린 아이는 언제나 모든 것을 힘의 논리로만 봅니다. 아빠하고 옆집 아빠하고 싸우면 누가 이겨??? 그리고 이분법이죠, 악당하고 저기 살인범하고 누가 더 악인이야,,여러분 성경을 놓고 모든 것을 옳고 그름의 관점, 그리고 하나님과 사단의 선악 대결로 보면 성경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어떤 분들은 모든 잘못된 것을 다 귀신으로 규정하고 그걸 물리치고 몰아내야 한다고 법석을 떱니다.(감기. 혈기. 의심, 조는 것도 귀신 역사)여러분 이런 주장은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귀신 쫓다가 결국 귀신에 제압당하게 된다)이들은 매일 순간마다 누구의 심기를 살피게 되죠.결국 귀신의 종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 보세요, 마귀는 예수 당시 사람들을 율법의 종이 되게 했고요.오늘날 귀신론, 신비주의 세대주의 종말복음이라는 새 말씀, 계시록에 종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사단 귀신이 그렇게 두려운 존재입니까?하나님과 사단을 선악의 대립 구도로 놓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이원론에서 비롯된 이단이거든요. 그렇다면 선과 악이 처음부터 스스로 존재해야 되고, 악마와 귀신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대적하여 싸우는 두 절대적 신이 처음부터 있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이원론이거든요. 이건 오직 홀로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겁니다.성경은 우리가 마귀와 싸워 이긴 승리자가 아니라 패장병으로 등장시키고 결국 십자가 안에서만 승리자로 여겨 주시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언제나 마귀에게 시험 당하고 넘어지게 되어 있는 거예요. 예수만 마귀와 대적하여 이긴 것입니다. 공연히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한다고 40일 금식하는 것 작정기도 하는 것 다 어린 아이의 어리광은 이요 장성한자의 모습이 아닌 것이죠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다 멸망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이처럼 우리는 성경을 선악의 대립구도가 아니라, 거기서 내가 마귀를 이기게 하심으로 승리를 챙기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난 없음이에요. 그럼에도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나는 날마다 육신에 지고, 마귀에게 걸려 넘어짐에도 주님의 은혜로 어떻게 십자가 안에서 이김을 주셨는지, 이런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하는 것이 진짜 십자가 복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여러분 나는 내가 하는 짓을 볼 때, 형편없는 자가 맞죠. 심판받아 마땅하잖아요. 죽었어도 몇번 죽어야 하는 신세죠, 그런데 주님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그와 연합하여 살았다고 간주하시는 그 능력은 무엇이냐 이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넓이와 다양성 그리고 측량할 수 없는 진리의 오묘함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을 받게 되면서 그 말할 수 없는 진리를 하나하나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께 속에서 부터 우러나오는 감사와 감격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분명 성령은 우리를 이리로 인도하신다는 거예요, 아멘.여러분 언제나 마귀는 우리가 성경 안에서.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내가 잘났다, 내가 옳다, 그런 관점으로만 성경을 편협하게 보게 하여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 목적임을 아시기 바랍니다.은혜의 양면성과 구원의 이중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구원 받은 성도는 죄인이에요, 의인에요.의인이 맞아요. 정확한 표현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에요.

의인은 어떤 의미에서 의인이죠? 관계적 측면 그리고 신분적 측면 그리고 합법적 측면에서 우리는 의인이나 실족이란 측면에선 아직 죄의 영향력에서 완전 벗어나지 못한 죄인이라는 거죠이것을 양 극단에 치우치게 되어 장성한 신앙의 관점으로 보지 않게 되면서 바로 구원파적인 시각으론 보게 될 수 있는데요.여러분 기독교인들이 구원 받았음에도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이런 고백을 이해 못하고  '저거 .아직 구원 못 받았네, 라고 비판한다면, 자기 들이 성경을 제대로 못 보는 소경이라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이처럼 잘못된 정보로 성경을 극단적으로 보는 시각은 우리가 아직도 어린 아이의 신앙이라는 겁니다.이런 단계에 머무르게 되면 쉽게 이단 교리에 빠질 수 있거든요.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무엇에 한번 데인 기억은 그 비슷한 일만 봐도 그 사건이 떠오르는 거에요.,,일종의 트라우마. 저도 체질이 알레르기라 알레르기 반응이 심합니다.어떤 사람은 아주 심합니다.찬 공기 습한 바람만 스쳐도 재채기가 나오고 콧물이 나오고 몸에 두드러기가 생기거든요.이것이 몸에는 아주 안 좋습니다.그러나 만일 이단교리 비슷한 곳에 빠지려 할 때, 이런 반응이 나타나면 이단교리에 쉽게 빠지지 않게 하는 경계 사이렌 같아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저도 이와 같이 이단적 교리에 10여년을 속아 왔던 기억 때문에 이단 비슷한 주장만 나와도 반응이 옵니다. 이건 아닌데.... 그러나 이런 예민함이 도움도 되지만 부정적 요소도 있다는 거에요. 오늘은 부정적인 문제가 뭔지를 다루어 보면서 우리 신앙인의 장성을 방해하는 유아기적 사고를 버리고 장성한데로 나아가는 시간이 될 줄로 믿습니다.사람이 영적으로 민감하고 예민한 것은 좋은 거죠.성화 맞아 틀려, 중생 거듭남 구원은 단회성이냐. 반복성이냐?

한번 구원 받으면 끝이냐 아니면 계속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 건지회개는 단 한번하고 그치는 것이냐 반복적인 것이냐..이렇게 진리를 흑백 논리로 접근하면 분명 오류가. 생긴다는 거예요.중생. 언제요..회개할 때, 아니잖아요, 이미 영원 전에 묵시 안에서 일순간에 이루어진 하늘의 신비 아닙니까?, 예정이란 교리를 떠나서 중생 거듭남, 구원은 세상의 언어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박식했던 '니고데모도, 그 의미를 세상적인 언어로만 받아들인 거예요.

(사람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야 된다는 겁니까?)이런 맥락에서 우린 회개가 먼저인가, 거듭남이 먼저인가, 이런 질문 많이 하죠? 그러나 저는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사람이 거듭났기 때문에 회개가 나오는 것이라고 봅니다.그러므로 내가 회개한다는 것은 이미 거듭났다는 증거거든요,(거듭남이 없이 하나님을 향한 회개가 나올 수 없다고 본 거죠)회개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거듭나 구원 하신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그런데 시간 속에서는 회개가 먼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내가 성경을 보다가 말씀을 깨닫고 펑펑 울며 회개 했더니 거듭남이 믿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아! 내가 회개했더니 거듭남의 은혜를 주셨구나?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회개라는 부르심의 과정을 통하여 나를 부르시고 내가 거듭났음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하나님의 부르심은 보이지 않는 묵시의 세계에서 이미 일어난 사건이므로 우리 육의 눈으로 감지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회개가 나타나게 되면서 내가 이미 거듭난 자라는 구원이 그때, 인지(認知)된 것이지 그 회개가 구원을 가져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이렇게 우리가 성경을 이중 잣대로만 보게 되면 극단주의로 흐르게 되고 성경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자기모순에 스스로 빠질 수 있는 것이기에 아주 위험한 것이며 우리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이런 것은 장성한 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화주의에 대해서도 우린 장성한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성도가 구원 받은 후에 그 본질이 변화되고 거룩함에 이르러 결국 완전 성화 즉 구원에 이른다는 성화론은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죠. 이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는 이중 은혜로 진정한 복음이 아닙니다. 이건 죄인이 거듭나고 구원 받는 은혜가 있고 또 성화로 완성되는 이차적인 은혜가 따로 있다는 거잖아요.그래서 요즘 종말 복음이니 계시록 복음이니 우리 영혼을 추수하는 복음이 따로 있다고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그래서 처음엔 성화의 자만 나와도 거부하고 성화주의를 공격하고 날선 검을 자주 사용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것들이 장성한 자의 모습이 아닌 것이죠.성경이 성화론을 말하고 있진 않지만 성도가 구원 받은 후 뭔가 그 신앙이 자라고 믿음이 성숙해 지는 그 과정을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울리는 처음 믿을 때 보다 말하고 생각하고 깨닫는 것이 달라졌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잖아요.

(여러분 10년 전 은혜에 대한 생각의 깊이가 같다고 하실 분은 없으시겠죠.~)이것을 성화적 측면으로 본다면 이런 것마저 잘못 되었다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성도는 성령에 의해 일방적으로 거듭난 것이고,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 거룩함을 입었는데 또 무슨 변화를 찾고 성숙을 논하느냐? 그런 것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물론 저도 이렇게 단편적으로만 생각 했었다는.건데요.그런데 어느 날 부터 이것이 너무 성경을 단편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그렇다면 성경에 성화는 아니지만 성도의 변화, 성숙, 자라남, 그리고 풍성한 은혜와 말씀의 누림 이런 단계조차도 잘못된 것이라고 그저 무시해야만 하는 것인지, 이런 현상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이런 생각을 언제부터인가 생각하게 되었다는 겁니다.(디모데전서 415-16)"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희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분명 성숙함을 이야기하잖아요. 이런 부분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무엇을 전심전력하라고 하는가 하면 육체의 연습이 아니라 경건을 연습하고 은사 받은 것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하면서 내가 이를 때 까지 말씀을 읽는 것과 권하는 것 그리고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라 하십니다.왜 거기에서 너의 성숙이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우리는 자칫 성화론을 부정하다가 그리스도인의 자라남. 성숙한 신앙의 변화 이런 것까지도 외면하는 우를 법하게 되지 않나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그럼에도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변화와 성숙을 내 개인적인 것으로 사유화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것은 다 주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작품이기에 모든 것 하나남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으로 내 것이 아닌 것이죠.그래서 성경은 이 변화와 성숙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혜의. 체험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에베소서 413-14)에서는 우리가 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않아서 사람들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거든요.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에 그리고 믿는 것에 말씀 안에서 장성하지 못하면 매일 이단 사설이나 간사한 유혹에 빠져 헛된 교훈의 풍조에 밀려서 요동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그럼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정한 장성(성숙)이 뭐냐?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하게 되는 것, 우리는 장성한 자가 된다. 성숙해진다. 라고

생각하면 부모 도움이 없이 스스로 잘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러나 성도의 장성은 이와 반대인 겁니다. 어릴 때는 내 스스로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네, 이렇게 그리스도가 나를 통치하고 정복하는 부분이 더 많아지게 되잖아요. 이것을 내가 감지하고 수용하게 되는 것 이것이 장성한 자의 모습이거든요.그런데 우린 자꾸 내가 빼앗기는 것 같은 겁니다. 그래서 자꾸 그분의 손길에 빠져드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죠.사실 인간은 나 죽었어, 하고 납작 엎드리는 것이 아니라 틈만 나면 두더지처럼 머리를 처 드는 거예요. 이럴 때마다 주께서 지긋이 눌러 주면 쏙 들어가잖아요. 이렇게 나란 놈은

왠만 해서는 죽지 않는 지긋지긋한 놈이구나?이걸 깨닫는 그 지점을 이걸 성화라 하고 이걸 성숙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화의 끝 지점은 바로 나는 온데간데없고 그리스도만 오롯이 남게 되는 그 지점이거든요. 이렇게 나란 존재는 그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소멸되어야 하는 것인데..진짜 이 역사 속에서 인간은 소멸되지 않거든요.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그리스도를 충만케 할 수 없다 이겁니다. 그래서 난 할 수 없으니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를 덮으소서! 이런 고백을 이끌어 내시는 것을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거예요.그렇게 나는 없음, 티끌, 그 자체임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이 사는 길임을 아는 것이 성숙이라는 거에요, 다시 말씀드리면, 무얼 하는 것이 아니라 나 할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벧후서 318)"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하셨죠. 우린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성경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 새사람을 입었으니 새롭게 변해야 된다고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놈의 인간이 변합니까?이 말씀이 담고 있는 뜻은 말이죠. 그렇게 인간은 원래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데..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변한다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하는데 죽을 수 없으니 그래서 예수가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로구나!~ 이걸 알아먹으라는 거예요.이거 하나 알고 가라는 겁니다. 어렵지 않잖아요. 그러나 인간은 죽을 때까지 요것이 안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진리를 내가 얼마나 아는가그 정도가 바로 성숙의 정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끝으로 행함의 문제가 중요한데요. 어떤 행함이거죠?~먼저는 믿음과 은혜와 대립되는 행위를 부정하는 그런 말씀들이 많이 나오죠?(로마서 3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우리는 은혜와 대립되는 율법적인 행위는 철저히 배제해야 합니다.그런데 성경은 주님이 오실 때 우리에게 어떤 행함이 필요하다 말씀하고 있으며 그 행한대

갚아 주신다는 말씀이 있거든요.(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마태복음 1627)"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로마서 26~8)"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무슨 말씀이겠어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하시잖아요.은혜를 말하는 자들은 행위는 다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행위가 다 잘못된 것이 아니라 율법적인 행위 그리고 자기 의를 자랑하는 행위 이런 것들은 지양해야 할 행위이지만 그 반대로 우리가 권장하고 지향해야 할 영생을 주시는 행함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요한복음 3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하나님 안에서 행하게 되는 행함이 따로 있다는 거잖아요우리의 행함에는 나의 의를 드러내는 인간적인 행위가 있는 반면, 요한복음 3장에는 하나님 안에서 행한 행함이 있는데, 그 행함은 빛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인 즉은 진리를 따르는 언약 백성은 자신의 죄 성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까발려질 때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되느냐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그들은 빛 가운데로 나와  자기 속에서는 선함이 나올 수 없다는 자기 고백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자기 의에서 나온 행함은 절대로 그것이 자신 안에서 나왔다는 믿음 때문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이처럼 나의 추한 현장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들켜질 때, 그것을 인정하고 "주님 내가 이런 사람이었네요, 나를 도우소서! 주님 밖에는 없습니다." 이리로 가는데,,,,그 반대로 자기 의를 내 세우는 자는 자신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죠내가 조금만 조심하면 이런 실수 안 할 수 있었는데 굳게 다짐하고 반성하는 것이 대단한 믿음인양 착각하게 되는데요, 여기서 방향성이 다르게 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성찰하고 결단하고 각오를 다지고 해서 어떤 결과를 이루어 냈어요.....결론이 뭐죠!

나 다 해 냈어, ‘나 다 지켰어, 그런데 여기엔 예수가 없다는 겁니다.여러분!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리신 것은 겨우, 그런 우리 성질, 습관, 기질을 이런 거 뜯어 고치기 위하여 오신 것이겠어요, 이리로 가면 정말 고상한 성화주의로 가는 겁니다.성경에서 말하는 성숙은 이런 차원이 아니거든요.하지만 이런 것도 인간적으로 그리고 도적적인 선을  위하여 아니 우리 자존심을 위하여 이런 못된 근성은 고치려고 노력해야 되겠죠,허나, 이런 노력들이 우리의 성화적인 행함이라던가? 장성한 신앙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면 뭔가 핀트가 잘못 끼워진 것입니다.이렇게 되면 나란 존재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평가와 진단이 잘못되어 버리거든요,

우리 열심의 방향성이 잘못 설정되어 우린 하면 할수록 더욱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게 되어 있거든요. 이렇게 되면 결국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쓰레기요, 먼지만도 못한 인간임에도 나의 실체를 감추고 여전히 나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여러분 이거 진정 주를 신뢰하거나 주를 믿는 행함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이런 사람은 결정적일 때 언제나 주께 대들게 되어 있어요.이런 반응은 어둠이 빛 가운데로 나와 나의 죄 성이 들키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나의 추하고 못난 자아가 폭로되는 것을 방해 합니다.여기서 행위는 무엇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나에게서 죄 성이 튀어 나올 때, "주여! 이것이 내 모습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고 주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는 그 반응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행함입니다.왜냐, 성령만이 이걸 보게 하시며 성령 안에서만 이 고백이 가능하기에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나타나는 행함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함은 결단코 인간의 이성이나 윤리 도덕 겸양에서 나올 수 없는 하늘 차원의 진리에서만 풀어 낼 수 있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이런 이유 때문에 저 또한 행함을 순수하게 보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처음엔 행위의 ',자만 나와도 행위주의 행위론자들 이라고 배격하고 공격하곤 했거든요.여러분 무엇을 행하고 나서 나의 의를 자랑하고 내 행위를 드러낼 바에는 아예 아무 일도 안하고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낫다. 이렇게까지 생각했던 적이 있었죠그런데 지금은 그 반대입니다.이것이 뭐 행위 구원론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고 내 의를 자랑하고 내 의를 드러낼까봐,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 차라리 뭔가 열심히 행하게 되므로 그 행함을 자랑하고 자신을 입증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사고를 치더라도 정말 언약 백성은 그 행함이란 과정 안에서 나의 한계성과 무력함을 알게 하셔서 예수께로 나오게 하십니다.그래서 자신의 실상이 드러날 까봐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 사고를 치고 넘어지더라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 나은 거예요.왜냐하면 그 말씀 안에 있는 자들은 어떤 경우를 만나던 그 문제 속에서 내가 왜 구원 받아야 할 죄인인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과정이거든요,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완전한 행함을 끝임 없이 명령하고 요구하는 이유인 것입니다.우리는 구원 받은 자로 진리를 요구 받는 자리에 서 있는 거구요.그거 지킬 수 없는 자로 심판 받고 또 그렇게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으로 용서 받은 자로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그럼에도 우리는 내가 완성 되었는데, 하며 가만히 있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게 된다면 내 허물이 드러날 기회마저 빼앗기게 되잖아요.복음의 한 측면만 보고 있는 꼴입니다.(결국 하나님은 그를 가만히 놔두시지는 않을 겁니다)그가 진정 택함 받은 자인데,,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을 보신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가만히 오셔서 묻습니다. “더 맞고 할래 지금 할래,,,,,~”이렇게 터치하시는 것입니다.이처럼 택한 자녀는 구원과 상관없이 반드시 그 죄 성과 허물은 드러나야 하고 인간 스스로 선을 내어 놓을 수 없음이 우리가 사는 동안 이 육신을 입고 입증 돼야 하거든요. 그래야 예수가 오셔야 하는 이유가 명백해 지는 겁니다그대로 있음 그냥 어둠일 뿐이에요.그래서 행함은 우리가 무얼 했느냐, 안 했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한 일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양과 염소를 구별 짓게 됩니다..여러분 내가 양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 나에겐 염소 같은 특성만 있다는 거 알아야 합니다. 내가..양이 아니라 염소에 더 가까운 자라는 것을 우린 무엇으로 알 수 있죠우리 중 내 행위를 들먹이며 목사님 왜 난 안 알아주는 거죠.이렇게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서운한 맘 들었던 분들 많이 계시죠. 이거 이상한 거 아니거든요. 이런 마음이 없다는 것이 꼭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일도 안 했음 서운할 필요도 없겠죠? 그러면 안 되고요 서운한 맘도 들고 그래서 그런 내 자아가 들키고, 거기서 "~내가 염소 같은 자로구나" 폭로 당하고 여러분이런 것이 십자가 구원의 현재성입니다.아직도 난 십자가가 필요하고 예수 구속이 필요한 인간이구나, 이걸 날마다 체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의 살아있는 자아를 확인하고 주여 나를 도와주세요. 십자가 앞에 무릎 꿇는 체험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야 내 안에서 마귀의 근성이 나타날 때그 즉시 이거 염소의 근성이네, 마귀의 습성이구나, 이것을 알게 되거든요.염소는 어때요내가 하나님 앞에 일을 많이 했는데자꾸 무엇을 안했다고 하십니까하며 빡빡 우기고 있잖아요. 우린 다 염소의 근성 갖고 있습니다.그런데 양으로 취급되는 것은 내가 염소인 걸, 아는 자가 하나님의 호의로 인해 의인()이라고 봐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만일 우리가 이런 생각 못 버리고 그날까지 간다고 상상해 보세요."난 선한 일 많이 한, 주님께 고분고분한 양이었으니까" 이런 태도를 갖고 있는 자가 바로 

염소라니까요? 여러분내가 거짓선지자요내가 염소인줄 아시기 바랍니다.그럼 진짜 양은 어떻게 나옵니까?(마태복음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이상한 습성을 갖고 있죠? 자기들이 행한 상 받을 일들을 고스란히 잊어버리는 기상실증(건망증)에 걸렸다는 건데요.(여러분 지금 양의 근성인지 염소의 근성인지 금박 드러납니다),,,,

지난주 지난달에 교회 봉사 충성, 전도 선행한 거 생생하게 기억 나시죠! 기억 안 나야 되거든요..~양은 왜 기억이 안 나게 되는 건지 아세요. 그거 맘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에요왜죠, 그것이 정말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여러분! 내가 한 일은 죄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 불순종한 어리석은 모습밖에는 기억이 없는 겁니다.뭔가 선한 일이 나에게서 나왔다면, 그건 나란 도구를 쓰셔서 주님이 주체가 되어 나도 모르게 한 일일 쁜 임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면목이 없을 뿐인 것이죠, 어디에 내가 했다고 들이댑니까? 염소가 아니고서는 말이죠,,,그래서 내가 장성한 자가 되어선 어릴 때의 생각을 버렸노라고 했던 것은 무엇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일에 대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깨닫는 것이 달라졌다는 것이거든요.내가 한 일에 대한 나의 태도, 반응, 자세 이런 것들이 내가 하나님을 앎을 통하여 달리 생각하고 깨닫고 말하게 되었다는 겁니다.그래서 장상한 자는 반드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자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골로새서 110-12)"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하나님을 아는 것에 계속 자라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을 아는 일에 자라는 만큼 우린 내 속에서 절대로 선이 나올 수 없음이 자명해 지게 될 것입니다. 뭔가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행동이 나왔다면 그건 기억에서 사라져야 할 것이고, 나로 빛 가운데 행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뿐이겠죠.사랑하는 여러분 앞으로 계속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시는 가운데 더욱 풍성한 은혜가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나는 쇠하여지고 나는 초라해지겠지만 그것이 주를 영광스럽게 하며 주를 높이는 복된 행함인 것을, 믿으시고 묵시 안에서 그리고 이 역사 안에서 그 은혜를 맘껏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