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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9:1~6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 2019. 7. 3

 

1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전도서 9:1절은 이미 8:7~8절에서 본 내용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장래의 일을 모르기에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헷갈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수학공식처럼 인과율로 정확하게 떨어지는 삶이라면 장래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준비를 하거나 예측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그런 인과율로 인생이 해석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도 많이 보았습니다만 악하게 산 사람이 의인의 상을 받는 경우도 있고, 의롭게 산 사람이 악한 사람이 받을 벌을 받는 모습으로 보이기에 도대체 인생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절을 공동번역으로 봅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려고 애를 썼다. 착한 일을 하며 사는 슬기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사랑해 주실지 미워해 주실지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두 헛된 것일 따름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배워온 것이 착하게 살면 끝이 좋지만 악하게 살면 끝이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죽어서도 나쁜 곳에 간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전도자가 세상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렇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하는 슬기로운 사람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사람이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는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미래의 일이기 때문이라고 개역은 번역합니다. 그런데 공동번역은 그러므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모두 헛되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람의 어떤 행위에 따라 미움을 받을지 사랑을 받을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움과 사랑을 이 세상의 일들로만 보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는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짓을 하면 사랑을 받고 미움 받을 짓을 하면 미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일들도 꼭 이렇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냥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무언가 잘해준다고 하는데 그것이 밉게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사도 어떤 사람이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 모릅니다. 나도 어떤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지 사랑을 받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보다는 궁극적으로 영원한 사랑을 받을지 영원한 미움을 받을지 살펴봐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현재의 일도 모르는데 영원을 어떻게 아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영원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나 신에게서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유행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 그 미래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의 모든 타락한 인간들은 사랑받고 미움 받는 일이 내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보면 의롭게 산 사람이 고난을 받는 것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를 지었기에 저런 벌을 받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니면 조상들의 악행이 있거나 심지어 전생의 죄로 인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악한 자가 형통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모르는 남모를 선행을 했거나 조상들의 공덕이 있거나 전생에까지 소급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간이 주체가 된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들은 현재든 미래든 미움을 받을지 사랑을 받을지는 자기 행위에 달린 것으로 보기에 값없이 주는 은혜를 거절합니다. 그래서 은혜조차도 받을 만한 공적이 있기에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말라기 1:2~5절입니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2)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성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리되었습니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불순종하였기에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시기에 비록 포로로 잡혀갔지만 그곳에서 70년 만에 돌아오게 하십니다. 돌아와서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 성전을 재건하고 살아갑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이 재건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하셨지만 나라는 여전히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힘이 든 상황입니다. 그러니 모든 제사들도 귀찮은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물도 흠이 있는 제물을 드리는 그런 시대입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유다 백성들이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항의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성전까지 재건하고 제사까지 드리고 있는데 복을 받기는커녕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느니 원망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면 복을 주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가 하는 원망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사랑받을 만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들이 원하는 복은 주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하니 화가 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에서와 야곱입니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에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에서는 평생에 고난을 당한 일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사병이 318명인데 에서는 400명입니다. 야곱이 형에게 선물을 드리려고 하자 자기도 많다고 거절하지만 야곱이 받아달라고 간청을 함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부자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생애는 그야말로 험악한 세월을 보냅니다. 아내 얻기 위하여 14, 자기의 품삯을 위하여 6년을 일합니다. 야곱의 재산이 늘어나자 외삼촌과 외사촌의 시기로 야반도주 합니다. 얍복 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 뼈가 침을 당하여 평생 동안 장애인이 됩니다. 딸 디나의 사건,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험악한 세월을 보낸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미워하였다는 에서는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복을 받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말라기 1:3~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에돔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에돔이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지만 황폐된 곳을 다시 쌓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다시 쌓은 것도 헐어버린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길게 보면 에돔의 족속들이 미미하게 되고 사라집니다만 그러나 야곱과 에서의 당대와 그 상당한 기간을 살펴보면 에서가 형통하고 야곱은 고생을 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미움을 받는 것처럼 보이고 에서는 사랑을 받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에서를 하나님께서 무너뜨리는데도 계속하여 다시 쌓아가겠다고 합니다. 무너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불굴의 의지로 자기의 인생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야곱도 에서처럼 온갖 잔 머리를 굴려가면서 자기의 부를 쌓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장애인을 만들어서라도 무너뜨리십니다. 결국은 마지막 죽는 순간에 하나님의 약속 하나 붙들고 죽는 것입니다. 장애인이 되고서나서부터 짚고 다닌 그 지팡이에 의지하여 손자들을 축복하고 자신을 아버지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무덤에 묻어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 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내용과 과정과 결론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10~16절입니다.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 모르는 이유는 오늘 본문에서 미래에 달려있기 때문이라는 말씀도 있지만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두 헛된 것일 따름이라고 하는 것도 사랑을 받는 것이나 미움을 받는 것이 사람의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미움을 받고 사랑을 받는 것은 사람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에 달려있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구원을 얻는 일은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달리는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으로 됩니다.

 

물론 세상의 썩은 것을 거두는 일은 갈라디아서 6장의 말씀대로 심은 대로 거둡니다. 육신을 위하여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은 것을 거두지만 성령을 위하여 심은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둡니다. 여기서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을 구별하여 말씀합니다. 그런데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는 썩는 양식을 얻는 방식으로 생명의 약식을 얻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썩는 양식을 거두는 것도 하나님께서 햇볕과 비를 주셔야 거두어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햇볕과 비와 바람을 주시지만 사람이 수고하지 않으면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약속을 완성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야만 되는 일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생명을 얻는 것을 믿게 됩니다.

 

구약에서 미래의 일이라는 것은 메시아 오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끝이라는 말도 메시아 오심을 말씀합니다. 메시아 오심으로 사람이 사랑을 받는 자인지 미움을 받는 자인지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사랑을 받는 자들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이 미움을 받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복음에서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8:42~44절입니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1)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1)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택하신 자들이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들은 마귀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마귀가 유혹한 선악과를 먹은 자들은 사랑을 받고 아니 받고는 자기 행위를 따라 된다고 믿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온 세상에 퍼져있는 인과율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아무리 지혜를 가지고 살펴보아도 아직 미래가 오지 않았고 세상의 끝이 되지 않았기에 제대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미래, 그 세상의 끝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초림과 십자가의 완성으로 성령이 임한 자들은 세상의 끝을 안 것입니다. 세상의 끝 종말에 무엇이 사랑을 받는 것입니까?

 

사도행전 17:30~31절입니다.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알지 못하던 시대는 십자가 이전입니다. 이제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모든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복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로 확증된 것입니다(5:8). 예수님을 믿는 것이 사랑을 받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24~28절입니다.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세상 끝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드러납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고 어리석인 것으로 여기며 멸시하며 믿지 않는 자들은 미움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요엘 선지자의 예언대로 말세에 성령이 임한 자들은 자신이 죄가 무엇인지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단번에 영원히 죄 사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다시 오신다는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자들이 사랑을 받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