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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9:1~6 산 개와 죽은 사자 2019. 7. 10


1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2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3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4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5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니라 6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지난주에 본문 1절을 통하여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미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난 한 주간 사랑받고 사셨습니까? 미움 받고 사셨습니까? 자기 나름대로 사랑받을 짓이라고 생각하고 행동 한 것이 미움을 받는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좋은 것과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에 어떤 사람이 그 두 사람을 보고 피차일반(彼此一般)이라고 하면 두 사람 다 기분 나빠 하는 이유는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 미래의 일이기에 모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확증이 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사랑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미움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 2절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새 번역입니다. 모두가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깨끗한 사람이나 더러운 사람이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나 드리지 않는 사람이나, 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죄인보다 나을 것이 없고, 맹세한 사람이라고 해서 맹세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도 죽는다. 삼단논법에 대한 예시로 자주 사용되는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물론 죽는 과정과 장례의 과정이 다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나 드리지 않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 맹세를 하는 사람이나 하나님이 두려워서 맹세를 하지 않는 사람이나 죽음은 모두에게 일반으로 찾아옵니다. 악한 자는 벌을 받고 착한 자는 복을 받는 모습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다가 일반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본문 3절입니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공동번역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운명을 당하는데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일 중에서 잘못되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은 악으로 차고 넘쳐 얼빠진 생각을 하며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

 

착하게 산 사람과 악하게 산 사람이 살아생전에 그 보응이 모든 사람이 알 정도로 드러난다면 악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줄어들 것입니다. 예배를 잘 드린 사람과 잘 드리지 않은 사람이 살아 생전에 확연하게 표가 난다면 다들 예배를 잘 드리려고 할 것입니다. 예배를 잘 드린다는 말 안에는 온갖 내용이 다 포함됩니다. 예배를 잘 드려서 인생에 성공하고 세상의 복을 많이 받았다는 간증을 자꾸 듣게 되면 그렇게 따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에 악이 가득차서 얼빠진 생각을 하며 살다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정리해 봅니다. 사람의 행위가 장래의 일을 결정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들으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나의 선하고 착한 행위가 장래에 반드시 사랑을 받는 결론으로 나온다면 많은 사람들이 선하고 착하게 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역사를 보아도, 내가 살면서 경험 해보아도 착하게 사는 사람이 손해를 보고 악하게 사는 사람이 이익을 보는 세상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속한 환경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노력한 대로 성취가 되어야 열심히 노력할 맛이 납니다. 일반적인 삶의 형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8:20~22절입니다.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1)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이 세상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심고 거두는 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입니까? 이 땅이 있을 동안입니다. 그러면 이 땅이 사라질 날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 계절이 순환될 것이며 심고 거두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심고 거두는 과정에서도 늘 변수가 나옵니다. 태풍이나 기근이나 병충해로 수확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힘들게 양파 농사를 지었는데 가격이 폭락합니다. 이럴 때에 하늘을 원망하거나 아니면 더 높은 뜻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은 대로 거두는 것에 실패를 통하여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된다면 실패가 복입니다.

 

갈라디아서 6:7~8절입니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심고 거두는 일이 두 가지입니다. 섞을 양식을 위하여서는 우리 모두가 다 심어야만 거두어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거두는 일은 성령을 위하여 심어야 합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을 수 있는 자는 죽은 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임한 자만이 자기 죄를 알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에베소서 2:1~3절입니다.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1)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서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아무리 노력하여도 불가능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이란 단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는 일은 썩을 양식인 심고 거두는 방식으로는 안 되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어지는 4~9절입니다.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고 함께 하늘에 앉혀진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았음을 아는 자들이 살아난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죽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일이 성도의 일입니다. 이런 자들은 일반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서 끊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본문 4~6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4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희망이 있다. 비록 개라고 하더라도, 살아 있으면 죽은 사자보다 낫다. 5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가 죽을 것을 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죽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보상이 없다.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6 죽은 이들에게는 이미 사랑도 미움도 야망도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에도, 다시 끼어들 자리가 없다.”

 

창세기의 심고 거둠, 갈라디아서의 심은 대로 거두는 일, 에베소서의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자의 내용을 보면 이 본문도 이해가 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서 세상의 모든 권력과 부와 영광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자 같은 자보다, 영원한 생명을 가졌지만 개와 같은 모습이라도 그 사람이 낫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자는 죽을 것을 알지만 죽은 자는 죽을 것을 모릅니다. 이 죽을 것이란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일반적인 죽음, 생물학적인 죽음,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여진 그런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둘 째 사망을 아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을 모르면 지금 사자처럼 살지만 그는 죽은 자이기에 영원한 사망에 들어가게 됩니다.

 

성경에서 개란 아주 천대받는 이미지입니다. 반면에 사자는 용맹이나 힘과 권세를 표현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왔을 때에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죽은 개나 벼룩 같은 자를 쫓느냐고 합니다(삼상24:14). 사울은 사자 같은 왕이고 다윗은 죽은 개와 벼룩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기름 부음이 사울에게서 떠났고 다윗에게 기름부음이 있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사울이 사자 같고 다윗이 죽은 개와 같지만 오히려 다윗이 생명 있는 산 자라는 말입니다.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되어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여 사울 집안의 사람을 찾으니 므비보셋이 있습니다.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데 유모가 피신시키다가 떨어뜨려 장애가 있습니다. 다윗 왕이 그를 불러서 사울의 땅을 그 앞으로 주면서 왕의 식탁에서 먹으라고 할 때에 므비보셋은 죽은 개와 같은 나를 돌보시느냐고 합니다(삼하 9:8). 왕과 자신을 비교한 말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윗이 도망 갈 때에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합니다. 이때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도록 버려두겠느냐고 하면서 당장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합니다(삼하16:9). 그러자 다윗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저주하도록 두라고 합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개란 아주 천대받고 멸시받는 모습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런 개 같은 비참한 삶이라고 할지라도 살아있는 자가 죽은 사자 같은 왕보다 낫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것은 일반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이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은 영원한 심판이기에 이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이 둘째 사망에 들어가지 않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가 이 땅을 살아갈 때에 개와 같은 모습일지라도 생명 없는 왕보다 낫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사자 같이 살아가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개와 같이 살고 있는 자는 나사로입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쓰레기로 연명합니다. 게다가 온 몸에 종기가 났고 그 종기를 개들이 와서 핥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말씀을 이 말씀과 연결하여 보면 날마다 호화롭게 좋은 옷을 입고 잔치하는 부자보다 거지 나사로가 나은 것입니다. 나사로의 이름은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다른 위로가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니 이런 자가 죽은 자라는 말씀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둘 다 일반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사자처럼 살았던 부자는 음부에 들어가 있습니다. 개처럼 살았던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습니다. 십자가 이후로 지옥과 천국으로 보면 됩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자보다 살아 있는 개가 낫다는 말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형편이 개와 같은 모습이라고 하여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면 세상의 모든 영광을 가진 자 보다 나은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봅니다. “5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가 죽을 것을 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죽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보상이 없다.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개와 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영광을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허물과 죄로 죽었음을 모르기에 영원한 죽음인 둘째 사망을 모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8절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요한 계시록에서 둘째 사망이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2:11, 20:6,14).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이 역사 속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세상의 그 어떤 가치보다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의 보혈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둘째 사망에 들어갑니다.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자들은 죽은 사자처럼 죽을 줄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개처럼 취급을 받아도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 자는 세상의 모든 영광을 다 가진 자보다 영원히 나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