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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1~6 어느 때까지? 2020. 8. 19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편 13편의 표제어입니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이 시편도 다윗이 환난 가운데 주님께 부르짖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주의 기름부음 받음으로 인하여 예상하지 못한 환난이 닥칩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어 주의 영이 임하게 되면 자신이 원하지 않는 길로 이끌리어 가게 됩니다. 베드로가 젊어서는 자기가 띠를 띠고 갔지만 늙어서는 다른 사람이 띠를 띠우고 원하지 않는 길로 끌고 갈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21:18). 이런 환난을 당하면 하나님이 너무 멀리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까지인지 묻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점을 보려고 갑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장래를 알고 싶은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가난한 마을에 점집이 더 많았습니다. 왜 그런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함과 그로 인한 고통의 끝이 언제인지 알고 싶어서 점집을 찾는다고 봅니다. 역시 수요와 공급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도 소위 영빨(?) 있다는 사람의 기도 받으러 간다는 사람들도 그런 심리일 겁니다. 지금의 환난이 언제 끝날지 알고 싶을 뿐 아니라 정성을 바쳐서라도 빨리 끝내고 싶은 겁니다. 이런 마음으로 점집이든 기도원이든 교회든 찾아가면 방법을 제시하여 줍니다. 방법은 지성이면 감천인데 결국은 돈 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무슨 때를 기다리는 겁니까?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봉독” ‘어느 때 까지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 첫 번째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이 탄식은 주님께서 영원히 자신을 잊은 것 같이 여겨지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때까지 나를 잊어버린 것처럼 대하시겠느냐고 합니다. 이 말의 다른 표현으로 어느 때까지 여호와께서 자신을 숨기겠느냐는 탄식입니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해야 합니까?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해야 합니까? 원수들의 조롱은 네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더니 왜 그런 꼴이냐는 겁니다. 하나님이 너를 돕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번민하고 근심이 되기에 어느 때까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45:15).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보면 인간의 최초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이 스스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무화과 나무아래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며 찾아오시는 하나님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이미 찾아오셨습니다.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다윗은 쫓기고 있습니다. 고난이 계속됩니다. 그래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하는지를 묻습니다. 우리도 이런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전능하시다면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시고 이렇게 오래도록 가만히 계시는가 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성도로 부름 받은 자들은 이런 탄식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욥기 7:17~19절입니다. “17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욥이 까닭모를 환난을 얼마나 심하게 당하는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 같은 것을 내 버려두심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침 삼킬만한 시간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언제까지 하시겠느냐고 합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언제까지 그렇게 하시겠냐고 합니다.

 

시편 35:13~17절입니다. “13 나는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14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몸을 굽히고 슬퍼하기를 어머니를 곡함 같이 하였도다 15 그러나 내가 넘어지매 그들이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불량배가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서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아니하도다 16 그들은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 같이 나를 향하여 그들의 이를 갈도다 17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려 하나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선을 악으로 갚은 자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관망만 하시겠느냐고 합니다.

 

본문 3~4절입니다. “봉독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혀 달라고 합니다. 눈을 밝혀 달라고 하는 것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지 알게 하여 달라는 말입니다. 주의 뜻을 알게 하여 달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렵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사망이란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사망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는 나의 모습을 원수들이 보고 내가 그를 이겼다고 하는 것이 두렵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흔들리게 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하게 될 텐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가지고 내가 잘되어야 하나님도 영광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의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되어야 한다는 개념은 세상의 가치관을 따른 개념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성경을 보면 욥의 환난이나 시편 35편의 환난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욥이 죄를 지어서 환난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35편도 선행을 악행으로 갚는 자들로 인한 환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환난을 이해하려면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예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그 삶의 방향을 따라 가면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기 마련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오늘 본문이나 욥기서가 이해가 되면서 주님의 때를 기다리게 됩니다.

 

본문 5~6절입니다. “봉독앞에서 언제까지를 네 번이나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을 영원히 잊어버린 것 같고, 주의 얼굴을 나에게 숨기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내 원수들을 나를 치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어느 때까지 있어야 합니까? 이런 절박한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이미 응답을 받아 찬양합니다. 그 탄식 속에서 자신은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으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찬송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자기에게 은덕을 베풀어 주셨다고 합니다.

 

시편에서 이런 내용을 분위기 급전이라고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느 때까지 이렇게 억울한 환난을 당하고 있어야 하느냐는 탄식을 하다가 다른 설명이 없이 갑자기 찬양이 나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탄식의 부르짖음 속에 기도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인 확신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 중에 말씀의 선포를 믿게 되어 확신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실제적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문제해결의 방식이 아님을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17절입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변화산에서 이 음성을 들었습니다(17:5).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분입니다(8:29).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데 그가 이 땅에서 당하신 모습은 고난을 당하고 배척을 받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향하여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고 하는 일이니 사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그 영을 넘겨주십니다. 부활과 승천으로 성령을 보내어주십니다.

 

성령이 임한 자들은 자신이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수의 용서를 구하면서 죽어갑니다. 스데반 집사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그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가신 길과 사도들이 간 길로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받아서 세상의 원수들을 자기 발아래 다 굻리고 싶어 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을 세상의 힘으로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많은 숫자를 원하고 돈을 원하고 세상의 힘을 원한다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누가복음 18:1~8절입니다.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우리는 이 말씀으로 얼마나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구하였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원수에 대한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하는 과부의 심정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믿음으로 기다리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이 무엇이겠습니까? 욥의 환난과 기름부음 받은 다윗의 환난을 통하여 간략하게 살펴본 내용은 선을 행함으로 오는 환난입니다. 악을 행한 자들은 당연히 벌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런데 악을 행하지 않았는데 주님의 택하심으로 인하여 원수들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환난을 당하는 겁니다. 이런 핍박과 환난을 당하면서 심판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믿음으로 기다리겠느냐고 묻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4:4~7절입니다.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옥에 갇힌 바울사도가 빌립보 교회에 대하여 편지한 내용입니다. 기뻐하고 관용할 수 있는 이유는 주의 재림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6:9~11절입니다.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란 구약의 성도들입니다. 모든 구약의 성도들이 다 순교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기에 이 세상에 대하여 나의 욕망에 대하여 죽임 당한 자들입니다. 땅에서 뽑혀 하늘에 심겨진 자들입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흰 옷을 입게 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간구를 들으신 주님께서 흰 옷을 입혀주시면서 잠시 쉬라고 하시면서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한 이들은 십자가 이후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흰 옷을 입게 되는 자가 다 차면 재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이런 약속을 알고 믿게 되면 지금 당하는 환난이라는 것도 소망으로 견딥니다.

 

누가복음 2:25~30절입니다.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성령의 감동으로 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 약속을 시므온이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을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안식을 누리며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성도들입니다.

 

히브리서 10:30~39절입니다.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33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구약의 성도나 신약의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같습니다. 빛이 들어온 삶인데 고난, 비방, 환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됩니다. 갇히고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자들과 사귄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심판을 집행하지 않습니다. 심판을 주님께 맡깁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산 구약의 성도들은 십자가로 흰 옷을 입고 안식하고 있습니다. 이제 신약의 택한 백성들이 다 주께 돌아오면 오실 이가 오실 겁니다. 이것이 잠시 잠깐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13:11). 이러한 약속의 말씀이 믿어지는 사람들은 세상의 온갖 요란함 가운데서도 주님 다시 오실 때 까지 기쁨으로 소망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