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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6:1~12 나의 완전함에 2020. 11. 18

 

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4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5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6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7 감사의 소리를 들려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9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10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2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시편26편의 표제어도 다윗의 시로 되어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다고 합니다. 11절에서는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다윗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압니다. 간음하고 살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은 완전함에 행하였고 완전함에 행할 것이라고 하나님께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합니다(왕상15:5).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라고도 말씀하고 있습니다(13:22).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신 우리아의 일에는 완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완전함에 행하였다고 하고 앞으로도 완전하게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완전함에 행하였고 행할 것이라는 이 완전함이라는 단어가 시편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세 곳의 말씀을 봅니다. 첫째는 시편 7: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여호와의 심판 앞에서도 다윗은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여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실함완전함이라는 단어와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만민을 심판을 행하여도 자신은 의와 성실함 곧 그 완전함으로 심판하여 달라고 합니다.

 

둘째는 시편 25:21절입니다.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여기서 완전함이라는 단어가 역시 성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성실은 자신의 성실함을 말하기 보다는 자신이 그 완전함 곧 성실함으로 살 수 있도록 보호 하여 달라고 합니다. 다른 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완전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지켜 주십시오. 주님, 나는 주님만 기다립니다.” ‘성실과 정직완전하고 올바르게로 번역을 합니다. 그러므로 완전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지켜 달라고 합니다.

 

셋째는 78:71~72절입니다. “71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를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7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목동 다윗을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아는 대로 하나님의 양을 잡아먹고 죽인 자가 다윗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행하였고 또 완전하게 행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봅니다.

 

본문 1~3절을 봅니다. 봉독 완전함을 다른 번역에서는 올바르게로 번역합니다. 완전하게 곧 올바르게 살아왔다는 것은 주님만을 의지하고 흔들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시험하여 봐 달라고 합니다. 무엇을 믿었다는 말입니까? 주의 한결같은 사랑을 늘 바라보았다는 겁니다. ‘주의 한결같은 사랑인자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함을 바라보면서 살아온 이것이 완전하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완전히 행하였다는 의미가 많이 달라집니다. 나는 나의 행위를 믿을 수 없기에 오직 주님의 인자하심만 완전하게 성실하게 믿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가끔 말씀드렸지만 청년 때에 레위기를 읽으면서 결벽증이라고 할 만큼 씻어댄 적이 있습니다. 이런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성경에서 완전하다는 말씀을 보면서 나도 완전하여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한글 단어의 개념으로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산상수훈을 보면서도 사람이 지킬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하셨다면 하나님이 잘못 한 것이라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을 내가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였지만 행위만이 아니라 마음의 생각조차 죄가 된다는 말씀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이란 사람이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약속을 열심히 이루신다는 말씀에 조금 눈뜬 후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창세기 6:9절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노아가 의인이며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합니다. 이것을 대부분 상대적인 완전함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상대적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복음에 눈이 뜨이기 전에는 노아가 완전하게 살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내용에 조금 눈이 뜨이게 되니 바로 앞의 8절 말씀이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노아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은혜를 입었기에 의인이며 완전한 겁니다.

 

창세기 17:1절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세기 6:9절의 완전함이나 17:1절의 완전함이란 오늘 본문의 단어와 일치되는 단어는 아니지만 의미적으로는 같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성실이라는 말로도 번역을 합니다. 그러면 노아가 의인이며 완전하다는 말이나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뜻이 드러납니다.

 

아브람이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지금까지 무수한 믿음의 훈련을 하나님께서 시키십니다. 믿음이 없는 아브람이 믿음의 사람이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십니다. 그 훈련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씨가 없는 아브람에게 씨를 주신다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15:6). 그 씨의 최종적이 내용은 그리스도입니다(3:16).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후에 행한 일이 아내 사래의 말을 듣고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아브람 86세입니다(16:16). 이스마엘 낳고나서 13년 후인 아브람 99세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왜 내 약속을 믿지 않고 너의 혈육의 힘으로 이스마엘을 낳았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명하시고 이름까지 아브라함으로 바꾸신 후에 자녀를 주십니다. 사라는 이미 경수가 끊어진 여인입니다. 그래서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지만 그 비웃음을 배경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약속을 이루어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시는 방식입니다(4:17). 이 믿음을 하나님은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신 말씀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본문 1~3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처음 읽을 때와 다른 의미로 와 닿습니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이루어 내신다는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에 흔들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런 믿음이란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알아야 나오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자신의 평소 삶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 자기 의를 믿고 삽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여 자기의 죄를 알면 도저히 자기의 마음과 생각과 행위를 믿을 수가 없기에 오직 주의 인자함만을 의지하는 겁니다. 주님의 그 언약적인 사랑만 의지합니다.

 

본문 4~5절을 봅니다. “봉독시편 1:1절의 말씀이 기억나는 내용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허망한 자, 간사한 자, 행악자의 집회, 악한 자로 표현되는 이런 자들이 누구입니까? 주의 인자함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의와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과의 모임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한 내용들이 있습니까? 무슨 말을 하든지 그 내용들은 거의 다 허망한 것들입니다. 허망한 것을 붙들고 살아가면 결국 허망하게 죽는 겁니다.

 

지난 금요일은 은석교회 목사님 사모님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토요일 김집사님 모친 소천 소식을 들었습니다. 7남매가 있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녀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세 번에 걸쳐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흙에서 와서 흙에서 난 것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임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왜 복된 일인지 전하였습니다. 너무나 생생한 말씀의 현실이 흙으로 돌아가는 현장입니다. 말씀이 이러함에도 우리는 허망한 자, 간사한 자, 악한 자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들의 특징은 주님의 인자함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다고 하여도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적이 우리 주님의 인자함에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 허망한 자들이며 간사한 자들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네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남은 자들의 특징인데 나다나엘은 다른 유대인들이 생각한 세상적인 힘의 나라를 원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반면에 세상의 힘을 원하는 행악자의 집회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 의하여 예수님은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인자함만을 의지하는 자들은 주의 은혜를 입었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노아와 아브라함과 다윗과 같이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들입니다.

 

본문 6~8절입니다. “봉독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는다는 말은 4~5절에서 나오는 자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들과 어울리지 않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닌다고 합니다. 주의 제단이란 희생의 제물이 드려지는 곳이며 주께 분향을 하는 곳입니다. 이것은 나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이 있는 곳을 말합니다. 그른 곳에서 감사의 소리를 들려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모임이 성도의 모임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인다는 것도 이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멋들어진 건물이 있고 웅장한 의식이 있어도 허망한 일만 하는 곳이 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시편 84:10절입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 보다 낫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방금 본 6~8절의 내용처럼 악인들과 함께 하지 않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찬송과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는 겁니다. 사람의 영웅담이 아니라 주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하는 곳이 교회라는 모임입니다.

 

본문 9~10절입니다. “봉독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다윗 자신도 살인자입니다. 그러함에도 이런 간구를 하는 것은 주의 인자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인자함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은 비록 그들이 살인자가 아니라고 하여도 그들은 허망하고 간사하고 악한 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의 힘을 위하여 뇌물을 받는 자들이 됩니다. 세상의 뉴스들도 경제적인 이익을 위하여 권력에 뇌물을 주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성도는 주의 인자함을 사모합니다.

 

본문 11~12절입니다. “봉독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겠다고 합니다. 완전함에 행하겠다는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주의 인자하심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겁니다. 허망한 것을 쫓아가는 자들과 함께 하지 않고, 뇌물을 받는 자들과 함께 하지 않고, 주의 인자가 아니라 세상의 썩어질 것을 힘으로 추구하는 행악 자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오직 주의 인자하심에만 의지하겠다는 것이 나의 완전함에 행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미 그 발이 평탄한 데에 섰다고 합니다.

 

본문 12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12 주님, 내가 선 자리가 든든하오니, 예배하는 모임에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다윗이 선 자리가 어디입니까? 주님의 인자함입니다. 그 언약의 신실하심을 보이는 주의 인자함의 자리가 든든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무리들의 모임에서 여호와를 송축합니다. 이런 자들의 모이는 곳이 예배의 자리입니다. 이들은 이미 영화롭게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서 8:28~30절입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3)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주의 인자함을 의지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성령의 역사로 믿게 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1:25~29절입니다.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4)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바울사도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다는 것은 만세로부터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이 성도에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에게도 알려졌는데 그 비밀은 우리 안에 게시는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아 영광의 소망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영으로 임하셔서 보증하시고 이제 장차 영광 중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을 지혜로 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고 수고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다윗이나 바울이 동일하게 완전한 자로 세운다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주의 인자함에 세우는 겁니다. 주의 인자함이 그 언약의 신실하심을 드러났습니다. 그 인자의 확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만세에 만대로부터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 놀라운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은 완전한 자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함에 행하였고 앞으로도 그 완전함에 행하겠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그 인자하심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